메뉴 건너뛰기

close

#1. 장면 하나, 한겨레를 보며... 언론 자유는 책임에서 나온다  

장면 하나. 지난달 말, <한겨레> 신문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겨레 현장 취재기자 41명(3년차~11년차)이 연명해, 한겨레 국·부장단에 "한겨레 법조 기사들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쓰여지고 있다"며 성명을 낸 것이다. 이용구 차관 택시기사 폭행 보도를 언급하면서 "국장단의 어설픈 감싸기와 모호한 판단으로 '좋은 저널리즘'의 가치가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결국 관련 보도에 대해 사과문을 게재했을 뿐 아니라 편집국장은 내부 구성원들에 사과했고, 사회부장과 법조팀장은 이에 책임을 지고 보직 사퇴했다.

<한겨레>를 정론지라 믿으며 수십 년째 구독하고 있는 입장에서는 분명 충격적인 내용이었지만, 놀랍기보다는 그저 부러웠다. 여전히 건강한 조직이구나 싶어서다. 언론사 역시 위계가 존재하는 기업일진대, 후배들이 연대하여 선배의 잘못을 문제 삼는 건 분명 낯선 장면이다.

여당 편이든 야당 편이든 언론이 정치적 색깔을 드러내는 건 당연하다. 다만,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사안을 덮어버리거나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된다. 그러자면 내부에서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다양한 의견들이 자유롭게 개진되어야 한다. 이야말로 언론 자유의 고갱이다.

언론의 자유는 기자가 자신이 쓴 기사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언론의 기초이며, 사람들이 언론을 사회적 공기(公器: 공적 도구)로써 대우하는 근거다. 의사가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외우듯, 기자는 펜을 들기 전 '기자 정신'을 되뇌어야 하는 이유다.

기자보다 '기레기'라는 단어가 익숙한 요즘인 듯해, 내게는 더욱 신선한 충격이었다. 문제제기를 당한 당사자에겐 언론사 밖 장삼이사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충격이었을 테지만, 내게는 적어도 한겨레가 살아있음을 증명한 셈이 됐다.

권위주의적 위계질서. 조직의 건강함을 보여주는 여러 항목 중에 가장 중요한 지표다. 나이와 직급, 성별에 따른 '계급장'이 막강한 위세를 떨치는 곳이라면, 더 들여다볼 필요가 없는 '빤한' 조직이다. 하물며 올바른 여론 형성에 이바지해야 하는 언론사라면 두말할 나위가 없다.

#2. 장면 둘, 대법원장과 수석판사의 다툼... 저들이 사법부 최고위직이라니
 
대법원장과 수석판사의 다툼을 지켜보며 씁쓸했다. 사진은 4일 오후 한 고등법원에서 직원들이 오가는 모습.
 대법원장과 수석판사의 다툼을 지켜보며 씁쓸했다. 사진은 4일 오후 한 고등법원에서 직원들이 오가는 모습.
ⓒ 연합뉴스

관련사진보기

 
장면 둘. 평소 이슬만 먹고 사는 것처럼 보였던 '포청천'들의 치부가 드러나면서 사법부의 권위가 곤두박질치고 있다. 법관 중의 법관이라는 김명수 대법원장과, 행정부로 치면 차관급이라는 임성근 부장판사 사이의 다툼이, 코흘리개 초등학생들끼리의 다툼만도 못한 '웃픈(웃기고 슬픈)'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집권 여당과 법원 내부에 두루 척을 지고 싶지 않았던 대법원장 처신도 씁쓸하지만, 그렇다고 사적인 대화를 몰래 녹음해 마을 우물에 침 뱉듯 언론에 까발린 수석부장판사의 행태도 보기 민망하다. 이런 자들이 사법부 최고위직이었다니 난감할 따름이다. 그 어렵다는 사법고시는 과연 뭐였나 싶기도 하다.

죄를 지었으면 응분의 처벌을 받는 것이 기본이다. 법관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더욱이 재판에서도 그가 '헌법을 위반했다'고 명토 박은 터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처벌을 피하고자 상대의 약점을 잡아 여기저기 줄을 대려는 모습은, 법관이라는 최고 엘리트와 시정잡배가 다를 게 뭐냐고 되묻게 만든다.

더욱 황당한 건, 법원 내 일부 법관들의 태도다. 차라리 '양비론'을 주장했다면 수긍할 구석이라도 있겠지만, 일부는 대법원장이 후배 법관을 보호해주지는 못할망정 자신의 평판을 위해 사지로 내몰았다며 대법원장의 퇴진을 요구했다. 조직의 수장으로서 조직의 안위를 책임지지 못했다는 것이다.

녹음과 유출이라는 치기 어린 행동에 대한 비난은 고사하고, 그가 왜 국회로부터 탄핵을 당했는지에 대한 성찰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의 조직에 해가 된다면, 구성원 곧 법관이 지은 죄를 덮을 수도 있다는 호기로움마저 느껴진다. 이는 지금껏 무소불위의 검찰이 보여준 '제 식구 감싸기' 행태와도 하등 다를 바 없다.

옛말에 권력을 원하면 검사로 가고, 돈을 벌고 싶으면 변호사가 되고, 명예를 바란다면 판사를 선택하라고 했다. 검사와 변호사에겐 여전히 통용되는 비유일진 몰라도, 이번 일로 판사에겐 말 그대로 '옛말'이 됐다. 온갖 추태가 난무하는 지금 사법부엔 추상같은 권위도, 지켜야 할 명예도 없다.

#3. 장면 셋, 문체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를 보며... 이럴 거면 청문회는 왜 있나

장면 셋. 며칠 전 끝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청문회가 끝났다. 여야 의원들끼리 후보자 이력에 대해 격렬한 공방을 벌인 뒤 여당 단독으로 청문 보고서를 채택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대통령이 임명하는 익숙한 풍경이다. 이전 개각 때도 그랬고, 지난 정권 때도 그랬다.

인정하자. 청문회에선 늘 '아군'과 '적군'만이 있을 뿐, 국민의 눈높이에서 자질을 검증하려는 모습은 기대하기 어렵다. 대통령이 지명한 후보자라면 여당에서는 무조건 '적임자'고, 야당에서는 다짜고짜 '보은 인사'라고 주장한다. 후보자가 해당 부처의 장관으로서 어떤 전문성과 역량을 갖췄는지는, 여든 야든 별 관심이 없다.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 협의 관련 전체회의에서 이달곤 간사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에 관련해 항의하고 있다.
 지난 10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문화체육관광위원회의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경과보고서 채택 협의 관련 전체회의에서 이달곤 간사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표결에 관련해 항의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야당은 후보자의 온갖 흠결을 들춰내 정부를 공격하는 소재로 삼고, 여당은 그를 엄호하는 '경호원' 역할을 자처한다. 후보자마다 흠결도, 여야의 공방도, 결과도 똑같이 반복되다 보니 청문회가 관행적인 절차로 전락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이럴 거면 청문회가 왜 필요하냐는 무용론까지 제기되는 마당이다.

명색이 한 나라의 장관이라면 도덕성은 기본이 되어야 한다. 아무리 업무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도덕성이 밑바탕에 있지 않으면 조직을 힘 있게 이끌 수 없다. 바닷게의 우화처럼, 정작 자신은 옆으로 가면서 다른 사람에겐 앞을 향해 반듯하게 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껍데기' 청문회에 익숙해진 탓인지, 후보자에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들이미는 사람들이 시나브로 줄어드는 것 같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거나, 더 파렴치한 이들도 숱한데 그만하면 낫지 않느냐고 도리어 설득하려 드는 모습을 볼 때 그렇다. 말하자면, '덜 나쁘니' 자격이 된다는 뜻이다.

갑자기 이 세 장면이 겹쳐져 떠오른 이유가 있다. 교사로서, 학교 교육이 걱정돼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 셋은 오늘날 학교가 당면한 여러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교육 개혁을 위한 일선 교사들의 처절한 노력에 힘이 되면 좋으련만, 대개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를 바라는 몽니 같아 안타깝다.

학교는 일반 기업과 달리 수평적인 조직이다. 학교장과 교감 등 관리자를 제외하면, 모두가 평교사다. 직급상 위계나 서열이 세분화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모습이 그렇다는 거지, 속을 들여다보면 어느 곳보다 상명하복의 질서에 길들여진 권위주의적 조직이다.

학교, 속은 권위주의적 조직... 교무실부터 민주주의 실천해야

학교 사전엔 '항명'이란 단어는 없다. 평교사가 관리자의 지시를 거부하고, 학교가 교육청의 명령에 불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사고과에 따른 근무평정과 학교 평가에 초연한 교사와 학교는 없다. 학교는 교육청의 공문이 내려올 때까지, 평교사는 관리자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 복지부동하는 이유다.

교사가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이들이 자신에게 마찬가지로 그렇게 행동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에 찌든 교사가 교실의 아이들 앞에서 민주적으로 행동할 리 만무하다. 수업 시간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기 전에, 교무실에서부터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겨레 젊은 기자들이 보여준 당찬 행동은 이 땅의 교사들에게 '정면교사'일 수 있다.

반대로, 법관들이 보여준 음험한 온정주의는 학교 교육에 그릇된 신호를 주고 있다. 만인 앞에 평등해야 할 법을 법관 스스로 조직 논리를 앞세워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도 이미 알아버렸다. 추상같은 법이 저들의 필요에 의해서 얼마든지 고무줄 잣대로 전락할 수 있음을 분명히 깨달은 것이다.

학교 교육에서 가장 강조하는 덕목은 예나 지금이나 준법성이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가다보면, 위로는 헌법에서 아래로는 교칙까지, 법은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필수적인 도구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공자님 말씀'이라며 비웃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는, 법이 힘 있는 자들에겐 예외가 되고 대다수 사회적 약자들에겐 강제적인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법관에겐 웬만한 범죄도 묵인되며 개인보다 조직을 앞세워야 한다고 아이들에게도 솔직하게 가르쳐야 하나. 언뜻 조폭 집단과도 같은 사법부의 비뚤어진 행태는, 승자독식의 능력주의와 온존한 학벌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할 우려가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 고위 법관들의 추태는 이 땅의 교사들에게 '반면교사'다.

"쌤, 왜 장관 후보자 중에 멀쩡한 사람이 없어요?"

한편 '빤한' 청문회는 최근 학교 교육이 지향하는 인성 교육을 희화화시킬 우려가 있다. 파렴치한이 아니면 예외 없이 장관이 되는 형국이다. 그들로 인해 한국 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나날이 낮아지고 있다. 청문회에서 후보자의 결격 사유를 두고 큰 흠결은 아니라고 항변할 때마다, 꼭 그만큼 한국 사회는 타락한다.

"장관 후보자들 중에 왜 '멀쩡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걸까요? 설마 '멀쩡한' 사람은 애초 장관 자격이 없는 걸까요?"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안경을 만지고 있다.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가 9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서 안경을 만지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관련사진보기

 
청문회가 열릴 때마다 아이들에게서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다. 이는 질문이라기보다 기성세대를 향한 날 선 조롱에 가깝다. 도덕성마저 상대화시키는 현실에서, 학교의 인성 교육은 아무리 그 수업 시수를 늘린다고 해도 효과를 기대하기가 어려워진다. 남보다 '덜 나쁘면 착한 것'이라는 그들의 인식을 틀렸다고만 할 순 없다.

이 땅의 고위 공직자들에게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까진 기대하지도 않는다. 그들의 인식과 행동이, 부디 한국 사회의 평균적인 도덕성만큼만 돼도 더 바랄 게 없겠다. 검찰과 법원의 '제 식구 감싸기' 행태와 '빤한' 청문회를 연이어 지켜보며 사람들은 더 이상 욕할 힘도 없다고 한다. 참으로 아이들 보기 부끄럽다.

태그:#장관 후보자 청문회, #법관 탄핵, #한겨레
댓글1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