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12 19:57최종 업데이트 21.02.1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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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인들의 처지가 이전보다 열악해졌다. 64곳의 재일조선학교에 대한 지방자치단체 지원금이 2009년에 비해 2019년에 75% 급감했다고 8일자 <산케이신문>이 보도했다. 2010년에 시행된 고교 무상화 제도를 무시하고 아베 신조 내각이 2013년에 조선학교를 배제함에 따라 지자체들이 지원을 축소한 결과다.

재일한국인 차별이 일본 정부에서만 나오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차별을 지지해주는 적지 않은 국민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과료 9만원을 매기는 유죄 판결이 부과되기는 했지만, 2018년 1월에는 60대 일본인 남성이 혐한 반대운동을 벌이는 재일한국인 청소년을 겨냥해 '박테리아 같다', '악성 외래 기생 생물이다' 같은 글을 블로그에 올리는 일도 있었다. 한국에 대한 일부 일본 기성세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고교 무상교육 같은 진일보한 제도를 시행하면서 재일한국인만 빼놓는 일본의 행태는 지금뿐 아니라 과거에도 다를 바 없었다. 노동제도와 관련한 진전이 있었을 때도 그런 태도가 나타났다.
  

일본서 재일조선인들 항의 집회…유모차 끌고 거리행진하는 사람들 2019년 11월 2일 일본 도쿄 도심에서 조선학교를 지원하는 전국 네트워크, 포럼 평화·인권·환경 등 단체들 주도로 일본 정부가 유아 교육·보육 무상화 대상에서 조선유치원을 제외한 것에 항의하는 거리 행진이 펼쳐지고 있다. 거리 행진에는 재일 조선인과 일본인 등 5500명(주최측 추산)이 참가했는데, 유모차를 끌고 거리행진을 하는 사람들도 많이 눈에 띄었다. ⓒ 연합뉴스

 
오래된 차별

대한민국이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한 것은 1991년이다. 일본은 훨씬 오래 전에 ILO 회원국이 됐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일본은 한국을 훨씬 앞질렀다.


ILO는 제1차 세계대전을 매듭짓는 베르사유 평화조약의 결과로 1919년에 출범했다. 일본은 이 시기부터 ILO와 함께했다.

ILO 홈페이지(www.ilo.org)의 'ILO의 역사(History of the ILO) 코너는 "ILO 헌장은 1919년 초에 합중국의 미국노동총동맹(AFL) 회장인 사무엘 곰퍼스(Samuel Gompers)가 위원장인 노동위원회(Labour Commission)에 의해 기초되었다"면서 이 노동위원회와 관련해 "아홉 국가인 벨기에·쿠바·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이탈리아·일본·폴란드·연합왕국(영국) 그리고 미국에서 온 대표자들로 구성됐다"고 말한다. ILO 헌장을 기초하는 단계에서부터 일본이 함께했던 것이다.

당시의 일본은 제국주의 국가였지만, 적어도 노동제도에서는 앞서 있는 측면이 있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그로 인한 수혜가 재일한국인들에게 돌아가도록 하지는 않았다. 재일한국인 노동자와 일본인 노동자 사이에 장벽을 쳐놓았던 것이다.

그런 실태가 일제강점기 재일한국 노동자들의 실상을 정리한 송강직 경북대 교수의 논문 '일제강점기 하의 한국 내의 쟁의행위와 재일한국인 쟁의행위 비교'에서 나타난다. 2007년에 <법사학 연구> 제35호에 실린 이 논문에 따르면, 'ILO와 함께하는 나라'로 건너간 한국인 노동자들은 차라리 한국에 있는 것만도 못하다고 할 정도의 차별과 탄압에 시달렸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임금 차별이었다.
 
"재일한국인과 일본의 임금 차이는 1921년에 농작물 종사자의 경우 일본인과 한국인은 1일 1.64엔과 0.92엔, 염직물의 경우 1.90엔과 1.25엔, 세탁직의 경우 1.80엔과 1.20엔, 연초 제조직의 경우 1.61엔과 0.93엔, 토목공 2.30엔과 1.30엔, 하물 운반인 2.50엔과 1.60엔, 직공 1.80엔과 1.10엔, 갱부 2.20엔과 1.30엔, 잡역 1.20엔과 0.70엔으로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에 임금의 격차는 컸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인 임금은 일본인 임금의 50%대나 60%대에서 결정됐다. 위의 임금 차이를 백분율로 환산하면, 농업 56.9%, 염직업 65.8%, 세탁업 66.7%, 연초공업 57.8%, 토목업 56.5%, 하물 운반업 64.0%, 직공 61.1%, 광업 59.1%, 잡역 58.3%로 나타난다. 일본인 고용주들이 상호 약속이나 한 듯이 비슷한 수준으로 한국인 노동자를 차별했던 것이다.

차별은 고용주뿐 아니라 일본인 노동자 쪽에서도 나왔다. 동일한 사업장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부당처우 개선을 호소하며 쟁의행위를 할 경우에 일본인 노동자들이 팔짱 낀 채 방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적어도 노동자로서 사고할 때는 국적을 초월해야 하는데도 'ILO 선진국'인 일본의 노동자들마저도 민족차별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동일한 사용자에게 고용된 한일 양국의 근로자들이 공동으로 쟁의행위를 한 예는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략) 하나의 공장 안에 일본인 근로자와 한국인 근로자가 혼재하는 경우가 많게 되는데, 그 경우 한국인 근로자들의 쟁의행위에 대하여 일본인 근로자가 참가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사실이다. 근로자라고 하는 연대감이 강조되는 노동관계에서 민족적 이질감을 극복하지 못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오늘날 하나의 사업장 내에 정규직 근로자와 비정규직 근로자의 연대의 결여와도 같다."

차별은 일본 공권력에서도 나왔다. 노동조건 개선을 호소하는 한국인들을 입건한 일본 경찰이 단순히 형사처분을 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송국(送國) 처분을 내려 추방하는 일도 있었다. 처우 개선을 탄원하는 한국인을 아예 고향으로 돌려보내기까지 했던 것이다.

1935년 오사카에서 벌어진 사례와 관련하여 위 논문은 "쟁의행위의 수단으로 회사 내에 인분을 살포하여 회사에 약 70엔의 손해를 입힌 사건에서 경찰은 인분사건 관계자를 검거하여 이들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송국하는" 처분을 내렸다고 말한다. 평소에는 이해관계를 달리하던 노동자와 고용주·경찰이 재일한국인에 대해서만큼은 비교적 일치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 후속판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에서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지금까지 설명한 사실관계와 전혀 다른 주장을 내놓는다. 그는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본에서 여유로운 삶을 즐겼다고 말한다.

제5장 '일본에서의 노동·보수 그리고 일상'에서 그는 "조선인의 일상은 비교적 자유로웠습니다"라며 "밤새워 화투를 치는 바람에 다음날 출근을 제대로 못하거나 술집이나 조선 여인들이 있는 특별위안소 출입으로 수입을 탕진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였다는 점을 강조한다.

노름이나 유흥에 빠져 돈을 탕진하는 노동자가 반드시 부유하지도 않으며 사회적으로 유리한 입장도 아니라는 점, 그런 노동자들이 저축과 근면에 관심을 갖기 힘들게 만드는 사회구조의 힘도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은 주장이다. 재일한국인 노동자들이 겪은 전반적인 착취와 수탈을 고려하지 않고 지엽적인 면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한국은 넘버2, 중국은 넘버3? 

그런데 한국인에 대한 일본제국주의의 차별에는 하나의 일관성이 있었다. 어디서나 한국인들을 '넘버 2'로 취급했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도 한국인을 2등급으로 다루고, 식민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태도는 만주 지역에서도 나타났다. 일본 지배 하의 만주에서 한국인 급료는 일본인 급료보다 적고 만주인 급료보다 많았다. 또 야마무로 신이치의 연구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만주의 관동군 사령관이 일본인 관리들에게 배포한 복무심득(服務心得, 근무 주의사항)에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충돌할 경우에 별다른 사정이 없다면 한국인을 편들라'는 취지의 지침이 담겨 있었다.

한국인을 만주인이나 중국인 위에 둔 것이 한국인을 특별히 배려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일본인 중심의 위계질서를 세우고자 했을 뿐이다. 한국인을 '넘버 2'로 다루는 것은 한국인을 우대하는 게 아니라 한국인을 차별하는 것이었다.

한국을 2등급으로 대하는 태도는 아베 신조와 스가 요시히데 내각의 대외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일본이 미국·인도·호주와 함께 중국 압박을 위해 구성한 쿼드에서 그런 경향이 발견된다. 일본이 한국을 2진급인 '쿼드 플러스'로 유인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대중국 압박이 한국 경제에 미칠 영향 때문에 한국은 쿼드 자체에 대해 소극적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미국을 앞세워 한국을 쿼드 플러스로 유인하고 있다.
  

지난 6일 일본 도쿄에서 열리는 '쿼드' 회의를 앞두고 미국·일본·호주·인도 외교장관이 스가 일본 총리와 포즈 취하고 있다. ⓒ 연합뉴스/EPA

 
쿼드는 한국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지만 일본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다. 이것은 미국 진영에서 일본의 지위를 높여주고 있다. 뭔가 좋은 일이나 진일보한 일이 있을 때마다 한국을 차별하는 일본의 태도가 이런 국제관계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한일관계가 지금 상태에 이른 이유 중 하나는 그 같은 일본의 태도에 있다. 한국을 존중해줘도 시원찮을 상황에서 일본은 재일한국인과 한국을 얕잡아 보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다. 이것이 한일관계 복원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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