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2021년이 밝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우린 과거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일상생활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5인 이상 사적 모임 금지'로 인해 설 연휴에도 가족들을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랜선명절, 가족에게 권하고픈 OO'에선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함께할 수 있는 작품(영화, 드라마, 예능)을 소개합니다. 그럼, 떨어져 있는 가족에게 연락할 준비 되셨나요?[편집자말]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 컷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 컷 ⓒ 코리아픽처스, ㈜노바미디어

 
지난여름, 강의가 있어 지방에 내려갔다가 근처 언니 집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어요. 마침 다음 날이 토요일이라 언니도 쉬는 날이었죠. 우린 모처럼 만나서 밤새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가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게 잠이 들었죠. 언니도 나도 중년이 되고 보니 우리 이야긴 주로 자식에 관한 거나 과거에 머물러요. 사랑이나 꿈에 관한 이야기가 사라져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인데 서글프기도 해요.
 
내가 중학교 때부터 언니와 나는 잠들기 전, 매일 이불 속에서 소설을 썼어요. 주인공이 불치병이 걸려 죽는 <러브스토리>나 <라스트 콘서트> 같은 멜로영화에 눈물 콧물을 흘리던 시절이었죠. 벤치마킹에 능했던 우리도 여주인공이 백혈병에 걸려 죽는 소설을 써놓고 대성통곡했던 밤이 떠올라요. 너무 잔인하다고, 다시 살려내자고 두 손을 마주 잡고 울었었죠. 결국 우린 그 이야기의 끝을 내지 못했어요. 차마 주인공을 죽일 수도, 그렇다고 싱겁게 해피엔딩을 만들 수도 없었던 거죠. 마무리가 되지 못한 이야기는 지금도 내 머릿속에 맴맴 돌아요.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불치병 걸린 사랑 이야기는 이제 구식이 되었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명작들을 찾아보게 돼요. 제목이 너무 유명해서, 아니면 하이라이트 장면들을 너무 많이 봐서 마치 본 것 같은 착각이 든 영화가 있었어요. 바로 <이터널 선샤인>.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가 있다면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 컷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 컷 ⓒ 코리아픽처스, ㈜노바미디어

 
'마스크'를 쓰고 다니며 온 세상을 뒤집어 놓은 짐 캐리, '타이타닉' 뱃머리에서 양팔을 벌리고 서 있던 케이트 윈슬렛, 화나면 몸이 커지는 '헐크', '반지의 제왕' 프로도, '스파이더맨3'의 메리 제인 등 유명한 배우들만 모아 놓은 영화랍니다. 영화를 보기 전까진 짐 캐리가 멜로에 이렇게 잘 어울릴지 몰랐어요.
 
처음 봤을 때 난 영화의 반만 이해했어요. 그럼에도 가슴에 묵직하게 남는 게 있었죠. 며칠 후 다시 보고 나서야 무슨 이야긴지, 어떤 복선이 깔렸었는지 명확하게 들어왔어요. 놀라웠죠. 작가라면 저 정도는 써줘야 하는구나, 싶으니 한편으론 절망했어요. 무려 16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인데도 전혀 낡지 않았어요. <메멘토>나 <인셉션>처럼 시공간을 오가는 신선한 플롯에 누가 봐도 내 이야기 같은 줄거리.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몬탁 해변에서 만나 연인이 되었어요. 사랑에도 생로병사가 있으니 희로애락이 널을 뛰어요. 아슬아슬 연결해주던 널이 깨지고 두 남녀는 이별했죠. 이별이 너무도 괴로운 클레멘타인은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 라쿠나를 찾아가 조엘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려요. 기억을 지워주는 회사가 있다면 구글이나 페이스북의 자산 가치를 뛰어넘는 건 아마도 시간문제일지도 모르겠어요. 우리 모두 레드썬! 을 외치며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 한 자락은 다들 가슴에 품고 살잖아요.
 
이 사실을 모르는 조엘은 밸런타인데이에 클레멘타인과 화해하기 위해 선물을 사 들고 그녀의 직장을 찾아가지만, 그녀는 그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죠. 홧김에 조엘도 라쿠나를 찾아가 기억 삭제를 신청하는데, 그 기억은 가장 최근 일부터 지워져요. 초반의 기억은 다툼뿐이에요. 이별하기 직전이니까요. 하지만 기억속으로 들어갈수록 사랑했던 순간들이 보이기 시작하죠. 싸우느라 잊어버린 소중한 시간들 말이에요. 조엘은 당장 기억 지우기를 멈추고 싶지만, 이미 작동된 기계는 멈추지 않아요.
 
가장 찡한 장면은 마지막 기억이 지워질 때였죠. 떠나는 조엘에게 클레멘타인은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합니다. 처음 만났을 때 인사했던 것처럼. 아련히 들리는 클레멘타인의 속삭임을 끝으로 마지막 기억까지 사라집니다. 결국 두 사람의 기억은 지워지고 놀랍게도 여기서 영화는 다시 시작합니다.
 
사랑에도, 헤어짐에도 이유가 있어요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 컷

영화 <이터널 선샤인> 스틸 컷 ⓒ 코리아픽처스, ㈜노바미디어

 
뇌에선 지워졌지만, 몸이 기억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둘은 우연히 몬탁 해변에서 다시 만나고 다시 끌리고 다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기억을 지우는 과정에서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우연히 듣게 되면서 서로가 과거에 연인이었으며 기억을 지웠다는 사실을 알게 돼요. 테이프 안에는 민망하게도 서로를 향한 비난만 가득합니다.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있듯이 헤어짐에도 이유가 있어요. 같은 이유로 사랑에 빠지고 같은 이유로 이별해요. 그럼에도 둘은 다시 사랑하는 게 해피엔딩인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모든 선택이 결과적으론 비극인지도 모르죠. 이별을 택하든, 다시 시작하든 말이에요. 하지만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니까 우린 알면서도 기꺼이 빠지고 말죠.
 
클레멘타인의 머리 색깔이 네 번 변하는 것도 흥미로웠어요. 조엘을 처음 만날 때는 싱그러운 초록, 사랑이 깊어질 때는 정열적인 빨강, 사랑이 식어갈 때는 빛이 바랜 오렌지, 이별 후에는 차가운 파랑으로 말이죠. 머리카락 색으로 둘의 사랑을, 그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또 그와 그녀가 가장 행복한 기억으로 간직한 꽁꽁 언 찰스강에 누워 있는 장면, 영화 포스터에도 나오는 그 장면이요. 가장 행복한 시간에 바닥의 얼음은 상처처럼 금이 가 있었어요. 마치 사랑은 상처 위에 존재하는 것처럼.
 
얼핏 잠들었다 눈을 뜨니 푸른 새벽이 오고 있었어요. 언니는 텀블러에 커피를 담고 나가자고 했고, 도착한 곳은 백련지였죠. 세상에, 난 연꽃의 키가 그렇게 큰지 몰랐어요. 정말 장관이었죠. 새벽이라 그 넓은 연못에 언니와 나 둘만 있었어요. 우린 연못 사이사이 갑판을 걸으며 또 이야기를 나눴어요. 연꽃에 둘러싸인 정자에 앉아 마시는 새벽 커피는 일품이었어요. 행복했죠.
 
지금쯤 백련지도 찰스강처럼 꽁꽁 얼었겠네요. 언니랑 얼음 위에서 별자리도 보고, 이 영화도 다시 보고 싶은데 시절이 무탈치 않으니, 이번 명절엔 아무래도 힘들 것 같죠? 아쉽지만 각자 집에서 보고 이야기 나누기로 해요. 우리 아직 마무리해야 할 이야기가 있잖아요. 왠지 이 영화가 우리에게 영감을 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우리 소설의 주인공을 어떻게 다시 이어줄 수 있을지, 벌써 기대돼요. 타임 슬립이나 볼에 점 찍고 살리는 것보다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이터널 선샤인의 원래 제목은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티 없는 마음에 비치는 영원한 햇빛)로, 알렉산더 포프의 시에 나오는 한 구절이에요. 우리가 티 없던 마음으로 썼던 그 이야기에 이 영화가 환하게 비치는 햇살이 되길 바라며.
 
2021. 2월. 문하연 드림.
덧붙이는 글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연인 이별 재회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