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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국악 이야기는 다른 문화·역사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다. 인천시민들의 가슴속에서 울고 웃고, 신명나게 놀았던 인천국악의 숨은 이야기들을 연재한다.[기자말]
"야, 걸로 가면 화장터야."

한 남성관객이 큰 소리로 외쳤다. 영화를 보던 관객은 모두 폭소를 했다. 1957년 6월 어느 날, 애관극장 풍경이다. 반평생을 인천에서 사셨던 외할머니는 이 얘기를 가끔씩 하셨다.

한국영화 <사랑>(1957)은 인천에서 촬영했다. 이광수 원작으로, 주인공(김진규)의 병원은 허봉조산부인과(율목동)였다. 이강천 감독과 스태프들은 내동의 '연안여관'에 장기 투숙하면서, 만석동 세트장과 허봉조산부인과를 오가면서 영화 한 편을 완성했다.

이 지면은 인천국악을 얘기를 하는 것이지만, 인천사람에 관한 얘기를 자세히 하는 목적도 있다. 1936년 11월 19일자 <조선일보>에서, 여의계 신성(女醫界新星) 허봉조는 경성의학강습소에서 '여의사' 공부를 해온 수재로 주목을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인천에 거주하기 시작한 월남피난민에게 도움을 주는 여성리더로서 역할을 했다. 율목동의 허봉조산부인과는 '부인병원'으로 통했고, 보수적인 시절 여의사가 운영하는 산부인과가 부족했던 때라 산부인과 환자를 독점하다시피 했다. 그녀는 인천지역을 위해서 좋은 일을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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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아대에 인천국악인들이 모였다. 인천 국악의 거장인 이두칠(사진 뒷줄 오른쪽에서 네번째)도 자리를 함께 했다.?
ⓒ 아이-뷰/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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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도쿄올림픽이 열렸다. 레슬링의 장창선 선수가 은메달을 땄는데, 장창선 선수는 인천 신흥동에 살았다. 신흥동 1가엔 '우리동네 장사났네'라는 커다란 아치가 세워졌다. 허봉조를 비롯한 몇몇 인천 여성리더들은 장창선의 어머니에게 쌀 한 가마니를 선물했다. 당시 인천사람들은 풍물을 치면서 개선장군 장창선을 환영했다.

지금의 기독병원 건너편에 자리한 허봉조산부인과 건물은 당시 인천에선 매우 잘 지은 건축물이었다. 인천의 오래된 건축으로서 가치가 있었던 그 건물이 없어졌다는 게 지금 생각하니 참 아쉽다. 안타깝게도 영화 <사랑>의 필름마저 남아있지 않아서, 허봉조산부인과는 지금은 인천토박이들 중 60대 이상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이다.
 
인천사람에게 금기시되던 율목공원


허봉조산부인과는 참 멋지고 좋았지만, 거기서 100미터쯤 떨어진 율목공원(화장터)는 인천사람에게 금기시되는 장소였다. 왜 그랬을까? 여기는 일제강점기 정미업으로 이름을 날린 역무(리키다케) 별장이 있었다.

별장 주변은 한 때는 과수원이었고, 한 때는 일본인의 화장터로 유명했다.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더라고, 이미 공원이 됐지만, 초등학생인 나는 한자로 쓰인 비석을 꽤 보았다. 이곳은 일찍부터 한적하면서도, 밤이면 으스스한 곳이었다.

"화장터 쪽에 가지 마라. 밤에는 안 돼. 여자가 가면 못 써."

이 얘기를 나는 집안이나 집밖에서 꽤 들었다. 어린 시절에, 화장터라고 해서 밤에 거기서 귀신이 나오는가 싶었다. 아니었다. 일찍부터 거기서 여러 사건 사고가 있었다. 1939년 4월 27일 밤 10시경, 바로 여기서 큰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신포동 어묵(가마보코)가게에서 일했던 두 점원이 갈등이 깊어졌고, 밤에 아무도 없는 리카다케 별장으로 끌고가서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고 몹쓸 일을 자행했다.

해방이후 미군정 시기에는 더욱더 가서는 안 될 장소로 인식됐다. 1938년 3월 10일 <동아일보>의 한 기사는 "율목동 속칭 역무별장 일대에는 벌써부터 미군 상대의 사창소굴이라고 하리만큼" 이렇게 시작한다. 제목은 "인천 사창굴 적발, 4명을 여경서 문초"다.

인천 앞바다가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은 어디일까? 누군 자유공원에서 보는 광경이라 하겠지만, 나는 '역무별장'(현 율목어린이도서관)과 해광사에서 바라보는 인천 앞바다다. 특히 노을이 질 때의 모습은 장관이다.

역무별장과 해광사(옛 화엄사)는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과 미군이 주둔했던 곳이다. 인천상륙작전을 수행했던 미군들이 바로 여기를 거처로 삼았다. 이런 여러 이유로 해서, 인천 원도심에 살던 어르신들은 '화장터' 주변을 매우 금기시했다.

해광사와 무용
 

이런 곳이 '율목공원'으로 만들어졌다지만, 인천시민들은 크게 반가워할 일이 없었다. 그런 곳에 '경아대'가 생겨지면서 이미지가 달라진 것이다. 1963년 3월 1일,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국악인들이 삼일절인 그날부터 경아대에서 살림살이를 시작했고, 이때부터 여기가 '인천국악원'의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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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경아대
ⓒ 아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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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아대가 생기기 전, 인천인들은 그럼 어디에서 무용을 가르치고 배웠을까? 바로 해광사였다. 해광사는 절이다. 불공을 드리는 시간 외에는, 국악의 연습도장으로 활용됐다.

경아대에서 대금을 비롯해서 풍류를 가르쳤던 이두칠의 큰 딸 이효자는 해광사에서 '고전무용'을 배웠던 시절을 회고한다. 무용을 배우러 가는 해광사 가는 길이 사람들은 별로 없고, 매우 무서웠단다. 한국의 근현대사와 연결해서, 또한 실제 사람의 왕래가 적었던 호젓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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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아대가 생기기전 해광사는 국악연습의 도장으로 활용됐다. 사진은 국악공연 모습
ⓒ 아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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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동에 있는 보각사(보각선원)도 비슷했다. 인천풍류의 아버지로 통했던 이두칠 선생은 불자로서, 보각사의 신도였다. 1964년 6월 16일, '찬불예악(讚佛禮樂)'이란 이름으로, 경아대 소속의 5인이 거기서 연주를 했다.

이 음악이 바로 인천 스타일의 '영산회상'이요, '인천 향제 줄풍류'가 된다. 일제강점기 이우구락부(1920년)에서 시작한 인천의 풍류는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인천향제줄풍류는 경아대는 물론이요, 해광사와 보각사에서 연주된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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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풍류의 아버지로 통했던 이두칠 선생은 불자로서, 보각사의 신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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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전 지역에서 '풍류'는 무형문화재로 보존하려는 경향이 큰데, 유일하게 오래전부터 계속된 풍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유일한 지역이 있다. 바로 인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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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글쓴이는 윤중강 문화재위원(국악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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