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2.08 12:45최종 업데이트 21.02.08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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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유의 '판사 탄핵'에... 판사들 "사법부 길들이기" 격앙

'헌정사상 초유'라는 수식어가 달린 임성근 판사의 국회 탄핵소추가 가결된 후, <연합뉴스>가 사법부 분위기를 전한 기사의 제목이다. 본문 내용도 제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법부를 길들이려는 의도', '각하될 수밖에 없는 탄핵소추를 하는 것은 이상한 일' 등 판사들의 전화 인터뷰 내용을 비중 있게 다뤘고, 임성근 판사 측이 공개한 대법원장의 녹취록 관련해서 '피고인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조차 부끄러워서 할 수가 없다'라는 지방법원 형사부 재판장의 반응을 실었다.


기사 내용이 사실이라면 사법부의 몰염치는 눈 뜨고 못 볼 수준이다. 문제가 무엇이고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궤변이다. 재판 개입이 확인된 법관의 탄핵 소추를 사법부 길들이기라 말한다면, 최근 형평성과 공정성을 크게 의심받는 정치권 관련 판결은 입법부와 행정부 길들이기의 결과란 말인가?

판사들의 '격앙'은 지금이 아니라 재판 개입을 노골적으로 주문한 박근혜 정권 때 필요한 일이었으며,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은 동료 판사의 사법 농단을 단죄하기는커녕 무죄를 남발한 염치없는 제 식구 감싸기다.

몰염치

대법원장 관련 녹취록 파문도 그렇다. 대법원장이 국민 앞에서 거짓 해명을 한 행위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대법원장의 면담을 몰래 녹취하고 사표 반려가 정치적 의도였다고 주장하는 건 본인의 잘못을 희석하려고 사법부 수장까지 이용한 패행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임성근 판사의 사표가 사법 농단의 책임을 묻는 국회의 탄핵 소추가 있기 전에 처리되었다면 대법원장은 입법부의 탄핵 발의권을 정면으로 무시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각하될 수밖에 없는 탄핵소추라는 주장도 사욕이 앞선 예단이다. 헌법재판소의 심리 결과는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퇴임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탄핵을 추진하는 미국 민주당도 실익보다 법의 정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관에 대한 탄핵 소추는 입법부의 사명이자 권한이다. 사법권의 독립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키는 게 아니라 법의 정의와 법관의 양심을 지키는 일이다. 검찰총장의 일탈에 법무부 장관이 징계와 직무배제를 청구할 수 있듯이, 법관도 국민의 대표기관인 입법부에 의해 탄핵이 발의될 수 있는 것이 삼권분립의 취지다.

법무부 장관에 의한 검찰총장의 직무배제나 국회의 법관 탄핵 소추를 두고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라는 호들갑은 검찰권과 사법권이 이제까지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이 행사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삼권의 주체인 입법·사법·행정부가 권력의 카르텔에 묶여 감시와 견제 기능을 제대로 못해왔다는 반증이다.

해서, 대법원장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거짓 해명보다 국민 기대에 못 미치는 사법개혁에 대한 책임을 먼저 물어야 한다. 임기 3년이 지나도록 사법농단 청산은 지지부진하다. 전국법관대표회의에서 사법농단에 대해 탄핵소추 절차를 검토해야 한다는 의결이 있었고, 검찰은 현직 판사 66명의 사법농단 연루 사실을 지목해 법원에 통보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은 이 중 10명만 견책에서 정직 6개월 처벌로 마무리했다.

임성근 판사의 녹취록을 두고 야당은 정권과 거래해 후배 판사를 탄핵 제물로 내놓았다며 거취를 결정하라고 대법원장을 압박한다. 그러나 녹취록에 담긴 내용을 보면 오히려 논란이 야기되지 않길 바라는 보신주의와 비리 판사조차 가족으로 생각하는 대법원장의 우유부단이 도드라져 보인다.

대법원장 후보로 지명된 다음 날 양승태 대법원장을 만나러 온 자리에서 기자들에게 '31년간 재판만 해온 사람의 수준을 보여드리겠다'라고 했던 김명수 대법원장이었지만, 3년이 지나도록 사법부는 여전히 개혁의 무풍 지대다. 사법농단 범죄는 동료 판사들에 의해 무죄를 받고, 비리 판사들이 법복을 입고 다시 재판정에 서는 게 현실이었다.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잘못을 물으려면 양승태 사법부를 제대로 개혁하지 못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박범계 법무부 장관을 만나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최근 사법부 판결에 형평성과 공정성 결여를 의심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수많은 사상자를 낸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서 법원은 SK케미칼, 애경산업, 이마트, 필러물산 등 가습기 살균제 제조·판매 회사들에 무죄 판결을 내렸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 사태를 묵인하고 국가정보원을 통해 공직자 등을 불법 사찰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에게 징역 4년의 1심을 뒤집고 항소심은 징역 1년으로 감형했다. 

검찰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를 기소한 것은 나경원 전 의원의 자녀 의혹 13건 일괄 무혐의와 비교해 형평성을 잃었다는 지적이 있다. 일례로 나경원 전 의원의 딸 성적이 D0에서 A+로 정정된 건 강사 재량으로 보는 반면, 정경심 교수의 표창장 의혹은 물증 없는 가능성만으로 기소했다. 정경심 교수 담당 재판부도 검찰의 기소 내용을 그대로 인정했다. 정경심 교수의 1심 선고 징역 4년을 두고 법원의 사법개혁에 대한 반발이 작용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이 일었고 담당 재판부에 대한 탄핵 청원까지 생겨나기도 했다. 

검찰과 법원의 동맹

김봉현 전 회장으로부터 술 접대를 받은 검사들을 검찰이 불기소 처분했다. 향응을 받은 금액이 96만 2000원으로 100만 원에 못 미친다는 검찰 측 주장은 누가 봐도 제 식구 감싸기다.

지난 4일 법원의 보고서를 박근혜 청와대에 넘겨준 혐의를 받는 유해용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었다. 사법부의 제 식구 감싸기라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한 판결이다. 검찰이 검찰의 비리를 불기소하고, 판사들이 판사들의 사법농단 범죄에 연이어 무죄를 선고하는 현실이 사법부와 준사법 기관인 검찰의 개혁이 절박한 이유를 말해준다.

더욱 우려스러운 건 검찰과 사법부가 합심한 듯 개혁에 저항하는 모습이다. 검찰의 선택적 기소와 불기소, 사법부의 이해하기 힘든 유·무죄 판결. 이래서야 문재인 정부와 국회의 개혁 시도가 번번이 검찰 조사를 받고 사법부의 판단 대상이 되는 건 아닌지, 개혁추진 세력들이 검찰과 사법부 내 개혁반대 세력들의 표적 수사와 보복 판결의 희생자가 되는 건 아닌지 우려가 든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맡은 소임은 사법 개혁이다. '31년간 재판만 해온 사람의 수준을 보여드리겠다'라는 호언이, '조직을 대단히 사랑하고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라는 윤석열 검찰총장의 말처럼, 조직의 권력 지키기 궤변으로 바뀌어서는 안된다. 국민이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바라는 것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길도, 윤석열 검찰총장과 같은 모습도 아니다. 사법농단 판사들이 국민의 심판자로 군림하는 일은 막아달라는 게 국민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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