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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과거사위원 교체 및 진실·화해위원회 가동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국진보연대, 5.18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과거사위원 교체 및 내정자 철저 검증을 촉구하고 있다. 2021.2.2
  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과거사위원 교체 및 진실·화해위원회 가동 촉구 기자회견에서 한국진보연대, 5.18기념사업회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과거사위원 교체 및 내정자 철저 검증을 촉구하고 있다. 202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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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 엉엉." '진실규명 결정문'을 받아든 박옥심은 울음을 터뜨렸다. 6.25 때 억울하게 죽은 숙부 때문에 반백 년 넘게 '빨갱이 가족'으로 손가락질받아 온 슬픔이 왈칵 밀려왔기 때문이다.

박옥심은 '가족 중에 6.25 때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은 없습니까?'라는 홍보문을 보고 2006년 2월 진실규명신청서를 접수했다. 신청서를 내기까지 박옥심에게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정부가 억울한 죽음을 진실규명해준다지만, '혹여 신청했다가 자식이나 손주에게 무슨 불이익이 있지는 않을까' 해서였다. 직장생활 하는 자식들에게 연좌제가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2005년 제정된 과거사법은 한국전쟁 전후에 불법적인 죽임을 당한 이에 대한 진실규명과 명예 회복을 위해서 만들어졌다. 유족들에게 주홍글씨처럼 새겨진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는 1980년에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하지만 그런 연좌제가 1990년대 중후반까지 관행적으로 유지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서남부사건의 실체 

오랜 고민 끝에 작은아버지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 박옥심이 낸 '진실규명신청서'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전남)서남부사건'으로 분류됐다. 서남부 사건은 전남 경찰이 장흥, 강진, 해남, 진도, 완도의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박옥심의 숙부 박명준 사건은 만 3년간의 조사 결과,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되었다. 

(전남 완도군) 신지면 신상리 주민 박명준(당시 24세), 박한필(22)은 형제이고 이복례(17)는 이들의 외조카다. 이들은 박명준의 사돈댁이 있는 장흥군 대덕면 분토리로 피난을 떠났고 1950년 가을 그곳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이같은 사실은 당시 경찰과 함께 토벌을 나간 최병조(약산면 관산리)가 이복례의 언니에게 증언해 알려졌다.

하지만 진실화해위원회는 박명준, 박한필, 이춘례의 죽음을 토벌대의 불법적인 공권력 행사로 인한 것인지 밝힐 수 없다며 '진실규명불능' 처리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토벌대로 참여한 이의 전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실규명불능 처리된 것이다. 이외에도 진실화해위원회는 '서남부사건 진실규명결정문'에서 신청서 114건에 대해 확인 45명, 추정 25명, 불능 72명으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이중 완도군은 확인 1명, 추정 14명, 불능 64명에 달해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을 내리는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참고인 진술 여부, 시신 수습 유무, 제적부 사망신고 기록 여부였는데, 그 중 최소 2개를 충족해야만 했다. 하지만 6.25 당시 정황을 이해한다면 이는 충족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기준이다. 

당시 서남부사건 피해자 다수는 시신 수습을 할 수 없었고, 제적등본에 사망신고일을 정확히 적을 수 없었다. 실제 사망일로 신고하면 빨갱이 짓 하다 죽은 것으로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제한적·소극적 조사는 완도군 피해 중 일부만을 밝히는 데 그쳤고 신청인 중 상당수는 진실규명 불능, 추정 처리됐다.
 
 
 1954년 완도경찰서에서 작성한 '부역자 및 가족 수 조사표'에 실린 내용이다. 완도읍 대신리에 살았던 최민서(가명)가 6.25 때 사살되었기에 그 유가족을 감시하겠다는 것이다. 최민서는 이미 죽었는데, 왜 그를 감시할까?

1970년 영동경찰서가 작성한 '관찰보호자카드'에 의하면 부재자(피살자, 월북자, 행방불명자 등)의 가족에게 간첩이 접선할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감시한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이는 명분에 불과했다. 한국전쟁기 민간인 피학살자의 유가족을 감시해, 반공체제를 강화하고 독재정권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1954년 완도경찰서는 한국전쟁기 민간인희생사건 관련자를 세분화했다. 입산도피자 160명, 자수귀순자 873명, 검거 680명, 전출 613명, 좌익피살자 272명으로 구분했다. 총 2326명이었는데 경찰은 이들의 가족을 일상적으로 감시했다. 직계 후손뿐만 아니라 사돈의 팔촌까지 감시해 취업, 승진 등에 개입해 불이익을 줬다.

이 문서는 1950년대에만 있던 게 아니다. 완도경찰서는 1981년 '신원기록 성별목록', 1984년 '신원기록편람 자료수합철'이라는 문서를 작성해 지속적으로 피해자의 유가족을 감시했다. 그러다 보니 완도군을 포함한 전국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피해자 유가족들이 반백 년 넘게 '빨갱이 자식'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취업, 승진에서 불이익을 받고 살아왔다.

761명과 2000명 사이

전남 완도군에서는 무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한국전쟁 전에는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의 탄압에 의해 불법적으로 희생되었다. 또 한국전쟁 발발 직후에는 보도연맹원들이 집단 학살되었고, 전주형무소, 목포형무소 등지에 수감되었던 재소자들도 희생되었다. 연합군이 수복하기 직전에는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이, 수복 후에는 부역혐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 중 피해가 가장 컸던 사건은 부역혐의사건(일명 서남부사건)이다.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완도군 전체 피해자는 761명이다. 그런데 이 숫자는 당시 진실화해위원회에 신청한 이들에 한정된 것이다. 실제 피해자는 어느 정도일까? 답은 '알 수 없다'이다. 특히 서남부사건은 완도 주민 전체와 관련되어 있다. 주민 대다수가 연합군 수복기에 장흥 등지로 피난을 갔다가 토벌대에게 학살되거나 행방불명, 체포, 자수한 사건인데, 아직까지도 정확한 실체가 규명되지 못했다.

2021년 현재 완도유족회는 한국전쟁기 피해자를 약 2천 명으로 추산한다. 761명과 2000명의 간극은 국가의 총체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발생했다. 완도에서 1천 명에서 2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북한군과 대한민국 경찰이 1950년 9월까지 교전을 벌인 지역이라는 점 둘째, 유엔군 수복기에 주민 대다수가 장흥 가지산 등지로 피난했다는 점 셋째,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해방 후 좌익활동을 왕성하게 했다는 점이다.

이 중 민간인 피해의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은 두 번째 이유다. 완도 주민들은 부역 여부와 상관없이 '완도에 유엔군이 상륙하면 모두 죽는다'라는 말을 믿고 장흥 일대의 산으로 피난 갔다.(박강배.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 현 광주문화재단 실장) 그런데 대한민국 군경은 부역자들이 입산(入山)했다고 봤다. 군·경에게 그들은 빨치산과 다를 바 없었다. 서남부사건 피해자 시신은 대부분 수습되지 못했다. 어디에서 죽었는지 몰랐고, 설령 알았다손 치더라도 전쟁 와중에 산에서 학살당한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진실화해위 조사권 강화와 총체적 조사
 
완도평화재단 이사장 김부남
 완도평화재단 이사장 김부남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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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은 그나마 다른 지역에 비해 제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조사가 많이 이루어진 편이다. 그 결과 신청자의 상당수가 진실규명되었고, 유족은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기도 했다. 완도 유족들이 기금을 형성해 만든 것이 '사단법인 완도평화재단'이다. 재단에서는 여러 가지 사업을 하는데 그중 하나가 미신청인 발굴과 조사작업이다.

재단의 이러한 노력은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 활동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이다. 완도평화재단 김부남 이사장은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완도군 사건에 대해 충실히 조사해 단 한 명의 피해자도 누락되는 일이 없으면 한다"라고 바람을 피력했다.

완도를 포함해 전국의 민간인학살사건을 충실히 조사하기 위해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조사권의 강화와 증언자 확보를 통한 충실한 조사의 시행이다. 2020년 개정된 과거사법은 '조사권의 강화'를 명시하고 있다. 관계기관에 개인정보 자료 제출 요구, 증인·감정인·참고인을 대상으로 비공개청문회 개최, 가해자의 증언시 대통령에게 특별사면과 복권을 건의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실질적으로는 군·경·검·정보기관의 자료협조를 통한 조사권의 강화가 제일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관계 기관의 과거사 업무에 대한 이해와 협조가 필요한데 이것이 만만치 않다. 관련 국가기관이 과거사 업무에 적극 협조하기 위해서는 진실화해위원회 활동에 대한 여야 정치권의 합의와 진정성 있는 참여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난 2020년 12월 20일 출범한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는 출발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야당 국민의힘이 뒤늦게 추천한 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국민의힘이 과연 진정성 있게 과거사 문제를 접근하는지에 의구심이 든다. 국민의힘 추천자 중 정진경 변호사는 2013년 충남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재직 당시 여학생 3명을 성추행한 사건으로 징계 받은 사실이 드러나 자진 사퇴했다.

다른 위원들의 역사의식도 문제가 심각하다. 차기환 변호사는 5.18민주화운동관련 '북한군 남파설'을 주장했고, 고 조비오 신부의 헬기사격 증언을 유언비어라고 했다. 김광동 나라정책연구원 원장은 제주 4.3사건을 '공산폭동'이라고 주장했다. 이들 진실화해위원 8명은 지난 19일 대통령의 임명을 받고 우여곡절 끝에 활동을 시작했다.

전 세계적으로도 과거사 청산을 여러 차례 진행한 나라는 거의 없다. 이번 제2기 진실화해위원회가 성공적으로 활동한다면 전 세계에 모범적인 과거청산의 전형을 만들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정치권과 시민사회의 협력과 참여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이 지난 1월 27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정근식 진실화해위원장이 지난 1월 27일 오전 서울 중구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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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불능, #토벌대, #서남부사건, #연좌제, #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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