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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이 부산으로 이사한 것은 작은아버지 김교환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 김교환(金敎桓, 교항 敎恒, 1879~1949)은 김병희(金炳熙, 1851~1908)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김병희의 동생 영석(英碩)이 아들 없이 사망하여 그의 양자가 되었다. "김영석의 자는 약원(若源)이고, 호는 산천재(山天齋)이며, 형인 병희와 함께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였다. 타고난 성격이 효성과 우애가 있었고, 재주와 기계가 매우 뛰어났으며,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그의 문장은 아름다웠고, 일찍이 밝은 덕을 드러내었다." 김영석은 고종(高宗) 22년(18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에 3등으로 생원에 급제하였으나 26세에 죽었다. 『조선신사대동보』에 따르면, 김교환은 시종원분시어(侍從院分侍御)와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적십자사 사원을 지냈다.

일본군이 김병희, 교상 부자를 죽인 후에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김씨 일가는 도망을 가거나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다. 상삼마을 의병운동이 있었던 1908년 18살의 김교환은 통도사에서 한창 한문 수학 중이었다. 친부의 사망 소식을 듣고 목을 매고 자살을 시도하였지만, 김영석의 부인 언양 오씨가 "너는 내 자식이다. 죽으면 안 된다"라고 말렸다. 그 후 김교환은 부산포를 통해 함경도로 갈 생각으로 몰래 도망을 갔지만 이내 모친이 보낸 오씨 집안 사람에 잡혀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친부의 사망으로 교환은 어린 조카 김정훈(1895~1946)을 대신하여 집안의 어른으로 대소사를 관장하였다. 교환은 만석꾼의 후손답게 살았지만, 조부와 부친이 일본인에 의해 사망함으로 정치 사회적 활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의 삶의 터전은 부산의 좌천동 11통 3호 또는 576번지에 1912년경 124평의 대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조카 김정훈의 집과 가까운 거리였다. 아마 친부와 형이 일본군과의 전투 이후 죽임을 당한 1908년 이후 도피하듯이 부산으로 옮겨와 생활한 듯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알려진 바가 없다. 김교환은 부산 좌천동 576번지에서 상삼마을 401번지로 1915년 5월 24일 이사하였다.

김교환은 고향 양산 상북의 상삼마을과 부산 좌천동 양쪽을 오가며 기부와 육영활동을 하면 살았다. 김교환은 기부행위로 조선총독부에서 목배를 세 번 받았다. 1911년 5월 양산군 중북동 삼상동 빈민 48명에 대하여 곡(穀) 20석(石을 기부하였다. 1912년 6월 양산공립보통학교 설비비를 지원하였다. 양산공립보통학교 시설비로 이○호(李○滈) 17원, 김지홍(金祉洪) 10원, 유덕섭(柳德燮) 32원. 김교붕(金敎鵬) 15원, 권순도(權順度-영국 세관장 딸과 연애한 최익현 숭모자)・이재영(李宰榮-임정 학무차장 이규홍의 부친)・정수모(鄭受謨-정순모, 백산상회 투자자) 10원, 통도사 대표 김구하(金九河) 10원, 통도사 명신학교 대표 김고산(金古山, 통도사 자장암 마애불 조성) 26원을 기부할 때, 김교환(金敎桓)은 10원을 하였다. 그 일로 총독부로부터 목배를 받았다. 1918년 부산부 좌이면에 거주할 당시 답 1두 7승락의 울주군 두서면 토지를 도로용으로 기부하였다. 그리고 1920년 7월 양산군 상북공립보통학교 건축비로 김교환은 2500원을, 정순모는 2천 원, 권순도는 1천 원을 기부하였다. 이로 인해 포상을 하사받았다. 김교환은 지역의 부호들과 같이 학교 설립 등 육영사업에 기부하였다.

부산지역에도 기부를 하였다. 김교환은 1921년 3월 부산상업학교(현, 개성고)가 부산 서면으로 옮길 때 300원을 기부하였다. 고종의 시종부원경을 지낸 부산(울산)의 송태관은 24,550원을, 경주 최부자 최준은 1,500원, 울산의 김홍조는 1,500원을 기부했다. 또 1925년 동래육영회에서 사립동래고등보통학교를 관립으로 변경할 때 건축비 12만 원을 기부할 때 양산사람인 김교환은 2백 원, 정순모(鄭舜模)와 통도사 각 150원, 배영복(裴永復)과 김형철(金炯轍)이 각 1백 원, 김영곤(金泳坤) 60원, 엄주화(嚴柱和, 양산 삼일운동 주동자 엄주태의 형) 20원. 권순도(權㥧度) 소 한 마리, 김교붕(金敎鵬) 10원을 기부하였다. 동래육영회의 기부를 보면 당시 부산과 양산지역의 유지는 상호 밀접한 연관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부산상업학교의 기부는 사돈 집안인 김홍조가 당시 그 학교의 상의원이었던 인연 때문인 듯하다.

김교환, 『경가고존』을 간행하다

1922년 가을에 양산시 동면 여락리 산지 마을에 1912년에 이장된 김재복의 묘를 다듬고 이곳에 7칸의 재실을 짓고 이름을 영모재(永慕齋)라 하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었다. 그 후 1923년 김교환은 할아버지 김재복과 아버지 김영석의 문집인 『경가고존(惸家稿存)』을 편집, 간행하였다. 김교환이 쓴 발문에 따르면, 자신의 집안에는 조부의 『둔재만록(鈍齋漫錄)』과 부친의 『산천유고(山天遺稿)』가 소장되어 있었는데, 김교환이 화를 당해 십수 년 동안 객지를 떠도는 사이 조부의 유고가 소실되었다. 아마 1908년 일본군과의 전투로 집안이 엉망인 상황에서 김재복과 김영석의 유고들이 많이 훼손된 듯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김교환은 영군(營郡)에서 판상운(板上韻)을 취하고 친척들에게 만경사(輓慶詞)를 구해 『경가고존』을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재극(李載克)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교환의 후지(後識)가 있다. 권1은 김재복의 『둔재일고(鈍齋逸稿)』로서, 시 24수, 기(記)·서(序)·제문 각 1편, 부록으로 서·유사·행장·묘갈명·기·후서(後敍)·상량문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2는 『산천재일고(山天齋逸稿)』로 1918년 최세학(崔世鶴)이 쓴 서문과 함께 시 47수, 독(牘) 9편, 부록으로 뇌(誄)·행략(行略)·묘갈명 각 1편이 있다. 『둔재일고』의 시에는 무인다운 풍모와 외세의 침탈에 대한 우국충정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차무융당판상운(次撫戎堂板上韻)」은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과 유사시에 목숨을 던져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겠다는 결의에 차 있는 작품이며, 「차제승당판상운(次制勝堂板上韻)」은 백수(白首)로 관직에 올라 있음이 과분함과 당시 무인의 심정을 쓴 것으로, 나라가 위급할 때를 대비해 무기를 들어보지만, 쇠약해진 뜻으로 인하여 붓을 드는 심정을 술회하였다.

김교환, 양산에 '농림강습소'를 건립하다

1925년 양산군의 부호 김교환(金敎桓)은 조선 실업계의 부진(不振)을 근심하며 소학교 졸업생의 입학난(入學難)을 구제할 취지로 자기의 주택 있는 상북면 상삼리에 사립농공학교를 설립하였다. 설립비 1만 원(6천 원은 부담, 4천 원은 타 유력자)과 농업실습지 약 1만 평(전 5천 평, 답 4천여 평)을 기부하고 그 유지비로 년 4천 원을 부담하며 개학을 준비하였다. 1928년 3월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양산군 상북면 상삼리에 있는 부호 김교환 씨는 농민의 지식 결핍과 농촌의 쇠퇴를 비상히 우려하여 오던 바 지난 3년 전 1925년 봄에 자기 촌락에 자기 소유의 거대한 건물에다가 개인의 전 책임으로 농림강습소를 설립하고 수원고등농림학교 조교사인 지영린(池泳鱗)씨를 청빙하여 3년제 중학 정도의 농림학과를 교수하는 동시에 실습을 주로 하되 일반의 모범과 장래의 개량을 목적하는 동시에 일반 농민의 실생활의 보조도 되게 하며 한편으로는 강습원 내부 충실에 극력하여 실습장 2정보(町步, 6천 평)를 내었으며, 비료사(肥料舍)와 교사 사택과 양잠(養蠶) 겸 교실용(敎室用)을 신축하여 지난 9일에 3년제 졸업생 11명을 내게 하는 졸업식을 신축 교사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는데 일반유지와 각 당국자의 내림(來臨, 왕림)이 있었으며 특히 설립자인 김교환 씨의 영식 김정표(金正杓)씨는 원장(院長)으로써 간곡(懇曲, 정성)코도 우리 농촌을 위하여 성열이 충일한 훈사(訓辭)와 동아일보 양산지국 고문 김철수 씨의 농촌 선구자에게 바라는 심혈이 구출하는 축하는 실로 일반 참석자로 하여금 감루(감동)를 나게 하였고, 금후 계획은 특히 확신하여 생도 30명을 증모(증가 모집)하는 동시에 학년은 2년제로 하며 학과전용 교사를 증축하고 조수를 채용하여 일반 농가의 실농(實農-실제 농사)에 유익한 도움(有助, 유조)이 있게 하며, 구(舊)교사에다가 농민구락부를 창설하고 강습원으로 하여금 생도 이외의 대중에게도 교양기관이 되게 한다는 데 매년 임시 건축, 실습장 개량비 등은 물론 경상비로 2천 원 이상 혹은 근 3천 원의 지출을 한다며 양산 일대는 물론이요, 경남에 있어서 나날이 쇠퇴하여 가는 농촌의 선행자로 특히 사선(死線)에선 농민의 복음이라 한다더라."

졸업식 축사를 한 김철수는 상북면 상삼마을 출신의 동경 2‧8 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당시 동아일보 양산지국 고문으로 있었다. 그의 출생지는 김교환의 집과는 골목 하나 사이의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농촌강습소는 3년제로 1회 졸업생은 1928년 3월로 11명이었다. 김교환의 손자인 김중경(1934년생)에 따르면, 당시 졸업생 11명 중 3명은 양산 출신인 오근수, 유인호, 홍무식으로 이들은 면 위원과 면장을 지냈다고 한다. 학교 운영에 관계했던 아들 김정표는 1928~30년 신간회 양산지회에서 부지회장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6년 양산산업조합장을 역임했다.

학교는 1929년에 폐교를 하였는데 원래 농촌일꾼을 양성하자는 설립목적과 달리 졸업생 대부분이 공무원으로 취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개인이 학교를 경영하는 것은 재정적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또 1926년 5월에 울산농업 보습학교, 1927년 5월 에 김해공립농업학교 등이 개교함으로써 학생 모집 또한 어려웠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의 '농림강습소(사립농공학교)'는 현재 상북면 희망학교 옆 공터였다. 현재 당시의 실습지와 사택 담 일부가 남아있다.
 
양산 상북면 석계리 양산희망학교 인근에 당시 사택의 담장 일부가 남아있다.
▲ 양산 농림강습소의 터 양산 상북면 석계리 양산희망학교 인근에 당시 사택의 담장 일부가 남아있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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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양산지역에 중학교 과정 학교로 1916년 통도사 지방학림, 1934년의 통도 중학교, 1939년 양산공립농업실수학교의 설립 기록이 있다. 하지만 김교환이 세운 '농림강습소(사립농공학교, 농촌강습소)'에 대한 기록은 『양산시지(2004년)』에도 없다.
김교환은 1928년 11월 16일에 칙령 제188호에 따라 '대례기념장'을 받은 기록이 있다. 대례기념장은 일본 천황 즉위식에 참석했던 사람에게 주는 기념장이다.

하북면 용연리 용소마을 뒤편 계곡을 따라 약 1㎞ 정도를 오르다 보면 높이 20m 정도의 아름다운 사폭(斜瀑)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만수동 폭포다. 초은(樵隱) 김교환(金敎桓)이 1936년경에 대를 축조하여 만수대라고도 부르고, 폭포 바로 위 바위에는 '만수동'이라 각자 하였다고 한다. 김교환은 이곳을 소재로 두 수의 절구를 남겼는데, 그 원운은 다음과 같다.

天地秘問無人(천간지비문무인)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춰 둔 곳, 묻는 이조차 없는데
閱盡鴻萬八春(열진홍몽만팔춘) 천지의 원기 모두 겪은 것, 일만 팔천 년이라.

莫道窮搜然後得(막도궁수연후득) 늦게 찾아내었다 말하지 말라.
偶因樵者湊良因우인초자주량인) 우연히 나를 만나 좋은 인연 이루리.

친부와 형이 한꺼번에 죽는 모습을 목격한 김교환은 만석꾼이기에 일제 강점기에 최소한의 협력은 하되 항일 배일적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가진 부를 지역과 사회 발전을 위해 기부하였다. 그것인 친일일 수는 있을 지언정 반민족적이는 않았다. 3‧1운동 이전 지역의 부호는 소극적 친일로 그들의 부를 지역과 사회를 위해 기부를 하고 빈민들 구호활동에 나섰다. 부자는 1919년 이전에는 여전히 존중받을 사람이 많았다. 김교환은 구체적인 개인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실상 상삼마늘 만석꾼 집안은 개인 사진조차 현재 없다. 죽음과 함께 사라졌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이런 경향은 그의 조카인 김정훈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김정훈, 박재혁을 만나다
 
1910년대 양산과 부산을 대표하는 청년 실업가였던 김정훈은 장인이 울산의 부호 김홍조였지만 그 역시 만석꾼의 후손이었다. 출처 동아일보(1927.01.26.)
▲ 김정훈 1910년대 양산과 부산을 대표하는 청년 실업가였던 김정훈은 장인이 울산의 부호 김홍조였지만 그 역시 만석꾼의 후손이었다. 출처 동아일보(1927.01.26.)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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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훈이 좌천동으로 이사를 온 후 정공단 일대를 걷고 있었다. 그의 옷차림은 개화인 그 자체였다. 머리는 이미 단발을 하였고 복장은 조선옷이었지만 부자티가 분명 드러났다. 만석꾼이 아무리 감춘다고 하여 그 형색을 감출 수 있겠는가? 정공단에 정발 장군의 비석을 보고 묵례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생각하면 일본인에게 결코 가벼운 감정을 가질 수 없었다. 이제 10대 후반이 그는 팔팔하게 모든 것에 분노할 나이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처참한 주검을 마주한 어린 그에게 집안 어른들은 결코 앞장서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일하되 은밀하게 감추라고 하였다. 집안이 한순간에 망할 수 있음을 알고 있기에 집안에서는 결코 어디에나 나서지 말라고 하였다. 하지만 젊은 청년으로 그것을 억누르기는 쉽지 않았다.

정공단에 참배를 마치고 이리저리 둘러보는데 자기 또래의 아이가 어린 여동생을 업고 있는 것을 보았다. 동년배였지만 형색은 나이를 다르게 만든다. 재혁은 당시 학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동생을 돌보며 잠시 잠시 이웃집이나 가게를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배움의 갈증은 있었지만 목마름에는 물이 필요하듯 그에게는 집안 가장이 된 그에게는 돈이 절실했다. 막연한 생계 문제가 고민이었다. 그렇게 고민이 깊어질 때마다 정공단에 왔던 재혁이었다. 가끔은 부산진교회에 가서 선교사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그들에게서 미국, 영국, 호주 등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반드시 외국에 나가보리라 생각했다. 얼마나 넓은 나라인지. 얼마나 근대화된 나라인지 궁금했다. 무엇보다 그 나라에 가서 돈도 많이 벌고 싶었다. 나라는 이미 망하였지만, 실감하기에는 더디었다. 상층 관료들은 일본인이었지만 하급 관료들은 여전히 조선 사람이었다. 부산에는 여전부터 일본인이 많았게 식민지가 되었다고 해서 그다지 크게 변함을 느끼지 못했다. 어디를 가나 부산말이 들렸다. 부산말은 일본어와 조선어가 섞여 사용되는 말이었다. 부산말은 부산지역의 표준어가 점점 되어 갔다. 그것은 조선어가 사라지고 일본어가 상용어로 되는 과도기적 현상이었다.

"어이, 그 꼬맹이가 자네 여동생인가? 귀엽네."
"응, 명진이라고 나이 차이가 많은 여동생이야."
"나는 양산 상삼에서 이사 온 김정훈이라고 하네."
"그래, 나는 이 동네에 사는 박재혁이라고 하오."

양반집 자제인 김정훈은 박재혁을 처음 보자마자 관심이 있었다. 박재혁은 남이 보기에도 은근하게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과묵하지만 빛나는 눈빛에서는 그의 총기가 느껴졌다. 재혁이 보기에 김정훈 역시 겉모습은 화려하지만, 내면에는 다소 슬픔이 깃든 사람 같았다. 낯선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기 쉽지는 않지만 일단 말문이 트면 또한 쉽게 대화하는 것이 10대의 특징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나이가 같다는 것과 부친이 사망하였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경제적 격차였다. 김정훈이 1895년 3월생이고, 박재혁은 5월생이다. 두 달 차이니 거의 차이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정훈의 부친은 1908년, 재혁의 부친은 1909년 사망하였으니 1년 차이가 났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자연스럽게 집안 대소사를 나누다 보니 서로의 동질감을 느꼈다.

김정훈은 단순히 부산으로 이사를 온 것이 아니었다. 장인인 김홍조가 울산과 부산에 본격적으로 사업을 하였고 자기 자신도 뭔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14년 그는 윤현태와 더불어 양산을 대표하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1917년 4월 『부산일보』에 '부산의 명사 10인'의 한 명으로 거론될 정도였다. 고려상회 주인‧해륙물산무역상 김정훈, 경남은행 전무 윤상은, 부산상업회의소 부회장 이규정, 초량일기점장 오인규, 경남은행장 이규식, 경남은행 지배인 문상우, 미곡 무역상 김시구, 대동병원장 김성겸, 협동 우선(郵船)회사 주임 이영균, 동래군 참사 윤병준이 그들이었다. 1910년대 김정훈은 양산이나 부산에서 가장 경제적으로 진취적인 청년 실업가로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박재혁은 공부를 계속해서 집안을 일으키는 가장이 되고 싶었다. 나라가 망해도 먹고 사는 문제는 가장 시급한 일이다.

김정훈과 박재혁의 관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후손이나 집안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또한 김정훈과 박명진이 어떻게 재혼하였는지도 알려진 것이 없다. 다만 김정훈과 박명진의 막내딸 김영경(1943년생)씨가 딱 한 마디 한 것이 있다. "친구였다."

김정훈과 박재혁이 정공단에 만난 이후로 박재혁은 김정훈의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그리고 정훈은 재혁이 싫다 하여도 그의 주머니에 억지로 주었다. 그러면서 꼭 한마디 붙였다.

"자네는 이제 내 친구일세, 그리고 이것은 투자네, 나라를 위한 투자고, 먼 훗날 멋진 삶을 살 것 같은 자네를 위한 투자이네. 내년에는 진학하게. 꼭 도와주겠네."

김정훈은 재혁의 집에 가끔 일꾼을 시켜 쌀이며 보리, 장작을 몰래 보내기도 하였다. 재혁의 집에 다소 숨통이 틔게 된 것이다. 물론 정훈은 재혁에게 절대 자신이 보냈다고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재혁은 그것을 알았고 그 고마움을 꼭 갚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1911년은 지나고 있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울산작가회의 울산민예총 감사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태그:#의열단원 박재혁, #김정훈, #김교환, #양산농림강습소, #김홍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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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울산, 양산 지역의 역사문화에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찾는 탐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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