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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27일 오전 9시 47분]

김정훈, 김홍조의 딸과 결혼하다

1911년 1월 18일 양산 상삼마을의 김정훈은 울산 김홍조의 장녀 김순원과 결혼을 하였다. 태어나서 6살 때인 1900년에 증조부인 김재복이 활빈당에 고초를 겪는 것을 보았고, 14살 때인 1908년에는 조부와 부친이 일본군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김정훈이었다. 그의 어린 삶은 절대 정상적이지 않았다. 비록 아버지 형제가 있었지만, 그는 그때부터 집안의 장손으로 두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았다. 일본군에 잔혹하게 살해당한 부친의 삼년상이 끝난 뒤 결혼을 하여 부산 좌천리 12-4호로 이사를 했다. 정공단과는 직선거리 300m 정도였다.

김정훈의 장인 김홍조는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와 밀접한 삶을 살았다. 통도사 하마비를 지나면 "박영호‧김홍조‧김정훈"의 이름이 새긴 이름바위가 있다. 김홍조는 젊을 때부터 불교에 관심이 많았다. 1920년 4월 8일 서울 묘심사(妙心寺)에서 김우식, 김홍조, 이회광 등이 창설한 불교진흥회의 초대회장이 김홍조였다. 김홍조는 1921년 9월 태평양회의에 제출할 청원서에 불교진흥회의 및 울산군 대표로 서명하였다. 또 그는 통도사 금강계단 중수와 통도사 자장암 마애불 조성에 시주할 정도로 불심이 깊었다. 1900년 박영효의 활빈당이 김정훈의 증조부인 김재복의 10만 냥을 강탈한 적이 있었다. 만석꾼인 김재복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 사람은 김홍조일 가능성이 있다.
 
김홍조의 장녀로 김정훈의 첫 부인이다.
▲ 김순원 김홍조의 장녀로 김정훈의 첫 부인이다.
ⓒ 사진 제공: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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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원(1892~1926)은 울산의 거부이자 목재왕이었던 김홍조(金弘祚, 1868~1922)의 장녀이다. 김홍조는 한학을 공부한 유학자이자 일본에 유학한 개화파였다. 1868년 1월 18일, 부친 김규한(金奎瀚)과 모친 최세경(崔世敬)의 장남으로 울산군 하상면 반구리 3통 4호(615번지)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자는 경옥(景玉). 호는 추전(秋田). 본관은 김녕(金寧)이다.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고 금령군(金寧君)으로 봉한 김시흥(金時興)의 25세손이자 사육신 중 하나인 백촌 김문기의 16세손이다. 태어난 집은 전형적인 조선의 초가집으로 소박하면서도 아담하였는데, 구강서원 입구에 있었다. 대나무 숲이 그 집을 울타리처럼 에워싸고 있고 그 아래쪽은 논과 밭이었다. 구강서원은 초가집과 대나무 숲 뒤쪽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태어날 때는 가난한 집이었으나 아버지 김규한이 소금을 생산하면서 큰 부자가 되어 그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했다.

울산 태화강 하구 염포만 일대는 이름 그대로 소금 생산지였다. 당시의 소금 생산 방식은 천일염이 아니었다. 점질토로 염전 바닥을 조성하고, 그 위에 바가지로 바닷물을 여러 차례 살포하여 소금기를 머금은 함토를 만들었다. 그다음에 그 짠 흙에다 다시 바닷물을 부어서 함수를 채취하였다. 이것을 염분(鹽盆)에 넣고 끓이면 소금이 되었다. 자염(煮鹽)이었다. 소금은 말 그대로 작은 금이라 부를 가져왔다. 김규한은 세 가지 소원이 있었다. 그는 "신지천금(身致千金), 진사(進士) 아들, 반구정(伴鷗亭) 내 집의 삼대원(三大願)"을 가지고 있었다. 즉 부자, 출세한 아들, 자기 집이었다. 부자가 된 그는 반구리 일대에서 가장 큰 창녕 이씨의 기와집(반구동 615번지 일대)을 사들였다. 7~8개의 방과 마당, 연못 등이 갖춰져 있었다.

김홍조, 개화파와 교류하다

구강서원(鷗江書院, 1678년 창건)이 1871년에 철폐되었기에 김홍조는 1874년 9월부터 1883년 12월까지 사숙(私塾)에서 한학을 수업하였다. 첫 무과시험에 응시한 것은 1885년 을유년이었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충성할 수 있는 길을 찾고 실천하는 데 있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서울 유학을 하였다.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의 주역인 박영효와 김옥균 등과 교제를 한 것도 이즈음으로 볼 수 있다. 개화파인 김옥균(1851년생)과 박영효(1861년생)는 김홍조(1868년생)의 사상적 스승이었다. 김옥균은 장원급제자로 홍문관, 사헌부 사간원 등 요직을 거친 사람이었다. 박영효는 철종의 사위(부마)로 3개월 만에 사별하여 금릉위에 책봉된 인물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개혁파의 종주요, 독립당의 수령"으로 인식된 인물이었다. 서울에 유학 온 10대의 김홍조는 개화파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통도사 백련암 출신인 개화승 이동인 역시 개화파들과 교류하고 있었다. 개화파가 불교에 친밀했고 이동인과 교류하였기에 김홍조 역시 불교와 밀접하였다. 김옥균, 박영효, 김홍조가 찍은 사진 초상화가 남아있다. 김홍조가 박영효, 김옥균과 교류했다는 사진이 남아있다. 김홍조가 갑신정변을 일으킨 인물들과의 친밀도를 보여주는 사진들이다. 하지만 언제 촬영되었는지 알 수 없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리고 정변을 주도한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은 일본으로 망명을 했다.
 
왼쪽부터 박영효, 김옥균, 이규완, 김홍조이다. 사진의 초상화의 원본은 사진이었으며, 복장도 한복이 아니라 양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 김홍조와 개화파 왼쪽부터 박영효, 김옥균, 이규완, 김홍조이다. 사진의 초상화의 원본은 사진이었으며, 복장도 한복이 아니라 양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 사진제공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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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조는 1888년 3월 6품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오르고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다. 1890년(고종 27년) 12월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합격증서 홍패에는 "병선장(兵船將) 김홍조 무과 병과 제1258인 급제 광서 16년 12월"이라 기록되어있다. 무과에 급제한 지 1년 만에 어모장군 경상좌도 병마우후(禦侮將軍 慶尙左道 兵馬虞候)에 올랐다. '우후'는 조선시대 각도에 배치한 병마절도사나 수군절도사 다음의 부장, 즉 부사령관급인 무관직(임기 2년)이다. 종3품으로 군령을 전달하며 군사를 지휘하는 임무 외에 절도사를 도와 군기(群機)에 참여하고, 절도사를 대신하여 군사훈련이나 무기, 군장 점검을 위한 도내 순행을 하였다. 또한 군자(軍資)를 관리하고 절도사 유고가 될 때 그 임무를 대행하였다. 과거 급제자가 종9품인데 1년 만에 종3품에 올랐으니 거의 파격적인 승진이 아닐 수 없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승진에는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교류한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의 영향은 아니었을까? 1891년 12월 총어별장(摠禦別將) 초관이단(哨官二單)으로 병마우후를 맡다가 1894년(고종 31) 11월 다시 재차 근무하며, 울산도호부사(蔚山都護府使, 군수)를 겸임한다. 근무지 울산의 병영(兵營)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소재지로 그는 일본 침입에 대한 군사·국방을 담당하였다.

1884년은 갑신정변이 일어난 지 10년 후 갑오동학 농민혁명이 1894년에 일어난다. 조선 개국 이래 가장 격변의 시기였다. 반봉건, 반외세의 기치를 내세운 동학 농민운동은 청일전쟁의 계기가 되어 외세가 한반도에 본격 침략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삼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은 자국의 힘이 아닌 외세의 힘으로 개혁을 추구했지만, 외세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반외세의 동학과 친외세의 갑신정변의 실패는 한반도의 정세를 격랑으로 몰고 갔다. 이 시기를 통해 김홍조의 삶도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에 망명 중이던 서광범, 서재필은 일본의 수모와 냉대를 견디다 못해 4개월 만에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주로 일본에서 망명 생활을 한 박영효는 도쿄에 교포 학생을 위한 친린의숙(親隣義塾)을 설립하였다. 김옥균에게 김홍조가 금전적으로 지원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김옥균은 1894년 3월 28일 오후 4시 중국 상하이의 뚱허양행에서 프랑스 유학파인 홍종우가 쏜 세 발의 총을 맞고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박영효에게 1894년은 의미 있는 시기였다. 박영효는 1894년(고종 31년) 7월 사면되자 8월에 귀국한 뒤 일본 공사의 추천으로 김홍집 내각의 내무대신이 된 후 총리대신서리가 되어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조선의 자주성을 강조하는 개혁을 추구했다. 1894년의 갑오개혁은 친일적인 김홍집 내각에 의해 추진되었다. 청국 연호 대신에 개국 연호(1894년은 개국 503년) 사용, 문벌과 반상 제도의 타파, 문무존비의 차별 폐지, 연좌제 폐지, 조혼금지, 공사노비법 혁파, 천인의 면천 등 조선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다. 천지가 개벽할 일련의 일들이 벌어졌다. 새 세상, 개벽이 된 것이다. 김홍조가 1894년 11월 14일 병마우후를 중임하게 되었는데 박영효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박영효는 1895년(고종 32년) 7월 초 반역 음모사건(고종 양위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고, 연이어 같은 시기에 왕비 시해 음모죄로 궁지에 몰리자 신응희(申應熙)·이규완(李圭完)·우범선(禹範善) 등 일행 20여 명과 함께 일본 공사관의 주선으로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였다. 조선에서는 계속 자객을 파견하였고 그는 외부 출입을 삼갔다.

김홍조, 박영효의 후견인이 되다
 
가운데 박영효, 오른쪽 김홍조. 김홍조의 삶에 항상 박영효가 가까이 있었다.
▲ 개화파 사진 가운데 박영효, 오른쪽 김홍조. 김홍조의 삶에 항상 박영효가 가까이 있었다.
ⓒ 사진 제공: 김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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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김홍조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개인적 공부와 더불어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 등의 개화파들을 지원할 목적이었다. 또한 젊은 청년들을 일본에 유학에 보내고 지원할 입장이었다. 박영효는 1900년(광무 7년) 7월에 고베에서 이승린(李承麟)·이조현(李祖鉉)·김창한(金彰漢) 등을 불러 모으고 망명 중인 동지를 규합해 정부를 전복하고 고종황제를 양위시킨 뒤 의화군 이강을 국왕으로 추대하기 위한 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리고 국내에 있던 한규설과 윤치호, 윤석준 등에 자금조달을 부탁할 목적으로 그해 11월 이승린과 이조현을 비밀리에 조선에 파견했지만, 의금부의 밀정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된다. 이때 김정훈의 증조부인 양산의 김재복이 쿠데타 자금을 모으기 위한 활빈당의 표적이 되었다. 박영효의 정계복귀 공작과 고종 폐위 기도는 수포가 되고, 궐석재판에서 교수형이 선고되었다. 그는 일본인 경호원을 고용한 뒤 은거한다.

「거부열전」을 쓴 이용선에 따르면, 김홍조는 부산항이 개항되자 목재왕으로서 많은 돈을 벌었다. 부산 개항지에다 건축용 목제를 공급했고, 경부선 철도 개설 때 쓰이는 침목 장사를 했다. 당시는 그야말로 '날개 돋친 목재시대(木材時代)'였다. 철도가 놓이자니 엄청난 재목(材木)이 필요했다. 그래서 바람난 난봉꾼은 종중 선산의 나무를 팔아넘기기가 예사요, 그 무렵에 이 핑계 저 핑계로 도끼 맛을 보아가면서 작벌(斫伐)된 산도 부지기수였다. 철도의 침목 경기보다 먼저 찾아온 목재 경기는 대한제국의 전간목(電杆木, 전신주) 바람이었다.

김홍조는 1904년 정3품 통정대부가 되었지만 고사한다. 1906년 김홍조는 박영효와 함께 동경의 아카사카구(赤坂區) 청산남정 오정목 5번지(靑山南町 五丁目 五番地)에 살고 있었다. 당시 김홍조는 조선에 사숙(私塾 사설 교육기관)을 열고자 수년 전 약간의 학생을 데리고 일본에 와서 이 학생들을 감독하고 있었다. 도중 학생과 의견이 달라 많이들 떠나고 4, 5명의 학생을 감독하였다. 김홍조가 후원한 유학생(성명, 학과, 졸업 후 경력)은 김택길(金澤吉, 광산과, 교관, 이시영 평안감사 통역관), 송태관(宋台觀, 상과, 궁내부 부경), 이경선(李敬善, 논과, 함남문천군수), 김창수(金昌洙, 양잠과, 자영), 김우영(金雨英, 일본경도제대법과, 변호사), 안모(安某, 수산, 자영), 김택기(金澤琪, 측량, 기사) 등이었다. 송태관은 울산 언양 상북면 양등마을 출신으로 김홍조 집의 머슴이라는 설이 있으나 정확하지 않다. 그는 부산 개성학교 출신으로 장학금을 받고 일본에 유학하였다. 학비를 지원한 학생은 다음과 같다. 박관수(김홍조 매제, 박정희 대통령 고교 은사), 설두하, 박성진, 김덕원, 박삼덕, 김정규, 김택년, 김일조 등이다.

대한유학생회학보 제1호(1907년 03월 03일)에 따르면, 일본 동경에 있는 한국 유학생을 위한 특별 찬조금으로 김홍조는 가장 많은 금액인 50환을 기부하였다. 당시 그는 "일본인이 한인에게 대하는 행동이 거만하고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모두 위압과 강제로써 한인에게 원하고 있다. 지금 일본은 한국을 보호하고 어디까지나 어루어만지는 마음으로 한인을 감화시켜 일본의 문물제도를 주입함으로써 양국의 융흥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의 일본 집은 항상 조선 망명자가 왕래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이 박영효였다. 그는 일본과 적대적 관계보다는 일본의 근대적 문물을 받아들여 양국의 공존공영을 중시하는 입장에 있었다. 당시 일본정부는 김홍조를 박영효의 배하(配下, 부하, 하수인) 또는 집사(執事)로 여겼다.

박영효는 1907년 오랜 망명 끝에 6월 초순 비공식으로 귀국한다. 당시 김홍조는 박영효의 귀환을 의외의 일이라 놀랐다. 귀국한 부산에서 박영효는 일행 중인 안영중(安泳中)으로 하여금 6월 16일 초량개성학교, 17일 초량일어학교에 금 50원씩을 기증했다. 궁궐은 이완용의 내각이 장악하고 있었다. 김홍조는 1907년 5월 15일 정3품의 비서감승(秘書監丞)에 임명되었지만, 하루 만에 의원면직을 당하고 관료 생활은 끝이 난다. 당시는 국채보상운동과 헤이그 특사 사건으로 광무 황제가 위기의 상황에 있었던 시절이었다. 박영효는 궁내부 특진관으로 활동하다가 광무 황제의 양위를 반대하고 융희(순종) 황제 대리 의식 집행을 거부한다. 군사를 동원하여 반대하는 등의 행동을 하려다 제주도에 1년 유배하러 갔다. 이때 김홍조가 자주 제주도를 방문하였다. 박영효는 1908년 말 유배에서 풀려난다. 유배 살이 중 그는 1908년 7월 한성재목 신탄주식회사에 투자, 대주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경성부로 돌아올 수 없었고 사람을 보내 경성 주변의 정세를 파악한다. 1909년 6월 이준용이 세운 신궁봉경회의 총재로 추대된다. 1910년 비밀리에 육지 상륙을 기획했으나 발각되어 실패한다. 1910년 8월 경상남도 마산에 머물러 있다가 한일강제 병합을 맞았다. 이 시절 그는 김홍조와 같이 부산과 언양 작천정에서 시름을 달랬을 것으로 여겨진다.

김홍조는 1908년 10월 무렵 울산에 돌아온 이래 교육계를 위해 바쁘게 다니며 군내 각 학교에 거액의 기부금을 내어 지방민의 환심을 샀으며 또 다수 지방 인민의 신뢰를 얻었다. 1909년 1월에 울산민의회를 조직하여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김홍조는 지방 인민이 권리가 박약하여 이따금 무고한 양민이 관헌의 억압을 받고 감창(監倉)에서 신음하는 자가 있어도 이를 감쌀 수 없다고 탄식하여 한층 참가자의 감동을 일으켰다. 이에 인민의 권리, 의무를 자위하고 또 국운의 진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국민이 일치 협동하여 그 중요한 임무를 맡지 않으면 안 되며,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질서 있는 단체를 조직하는 것이 급무임을 설파하며 민의회를 조직하였다. 의장은 김홍조, 부의장은 전 기장군수인 손영희(孫永禧), 의사(議事)는 김정국(金正國)·전의관(前議官) 박종묵(朴宗默)·조성희(趙性禧), 회계(會計)는 김좌성(金佐性), 서기(書記)는 박시협(朴時協)이었다. 민의회 설립에 필요로 하는 비용은 1월 29일 울산군아(蔚山郡衙)에서 집회할 때 김홍조 100원, 군수 정해팔(鄭海八) 82원을 필두로 참가자들이 모은 기부금이 150~160원 이상이었다.

1905년에 설립된 사립개진학교가 운영이 어려움을 알고 귀국 후인 1908년 11월 6백 환을 기부하여 학교를 정상화하였다. 또 1909년 3월 사립일신학교의 운영이 어려워 민의회장이었던 김홍조는 군수 정해팔, 내상면 면민회 의장 박민준, 면장 박제영 등과 협력하여 재정을 모아 학생 100여 명의 머리를 깎고 학부에 승인 신청을 하였다. 그리고 1907년 7월 박정동, 정석규 등과 함께 교남교육회를 발기하였다.

김홍조는 교육활동과 함께 의복 개량과 색옷 장려, 반상 차별 폐지, 종(奴)의 폐지와 해방, 적서(嫡庶) 차별의 폐지, 자작농 권장, 교육 권장, 혼례의 간소화 등 다양한 사회 계몽 활동을 펼쳤던 선각자이자, 지주요 자산가로 경남 일대에 덕망이 많던 사람이었다.

김홍조, 경남일보를 창간하다
  
김홍조가 발행한 경남일보는 1909년 10월 15일에 창간된 대한민국 최초이자 가장 역사가 오래된 지방신문이다. 식민지 초기에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외에는 유일한 일간신문이었다.
▲ 경남일보 창간호  김홍조가 발행한 경남일보는 1909년 10월 15일에 창간된 대한민국 최초이자 가장 역사가 오래된 지방신문이다. 식민지 초기에 발행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외에는 유일한 일간신문이었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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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러일전쟁은 군국주의 일본의 침략야욕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일제의 국권침탈이 가속화되자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계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민중의 의식을 개선하고 근대적 가치를 주입하며 계몽운동가들의 주장을 전달하기 위하여 김홍조는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慶南日報)』를 발행하였다. 경남일보는 대한제국 말기 지방에서 조선인에 의해 1909년 10월 창간되어 1915년 1월 경영난으로 폐간(887호)될 때까지 조선인이 경영했던 유일한 지방 민간인 신문이었다.

1909년 2월 신문발행 계획과 함께 "어둡고 어리석은 국민의 지식을 향상시키기 위해 신문 발간에 뜻을 모았고, 장차 경남의 교육과 실업발전을 도모하고자"하는 발기문을 내고, 6월에 제호는 『경남일보(慶南日報)』, 발행인 겸 편집인은 김홍조, 인쇄인은 이준기로 하는 신문발행 허가 청원서를 관찰부에 제출했다. 이 신문은 가장 문명개화가 늦었다고 평가받던 경남지역의 유지들이 출자하여 설립한 것이었다. 그 주도적인 인물은 김홍조·김영진·김기태 등이 있었고, 경남관찰사 황철도 크게 지원하였다. 직접 신문 제작에 관여한 인물들은 주로 하급 관리를 역임한 경남의 지주와 자산가들이었다. 황성신문은 1909년 2월 23일 자 논설을 통해 「경남일보 창립에 충고함」을 실어 경남일보의 태동을 알렸다.

주필로 장지연을 초대하여 1909년 10월 15일 마침내 경상남도 진주에서 창간호를 펴냈다. 경남일보 창간호는 타블로이드판(63㎝×46㎝) 4면, 6단 36행, 1행 13자로 국한문 혼용체제였다. 창간호에 금릉위 박영효의 축사가 실렸다. 창간 목적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용하여 정치적 의미보다 교육 기능에 주안점을 두어 '민지계발(民智啓發), 실업장려(實業獎勵)'였다. 즉 '법률행정에 대한 지식, 실업의 지식, 교육의 발달, 삼강(三剛)의 일사(逸史)'였다. 대한매일신문은 1909년 11월 26일 자 「慶南日報를 祝하노라」 논설에서 "十三道地方에 此慶南日報一個가 始有하니(13도 지방에서 이 경남일보 1개가 비로소 있으니)"하며 '경남일보가 지방신문의 시초'라고 밝히고 신문읽기를 권하였다. 신문 참여자 중에서 김기태(1887~1941)는 발행 임시사무소장을 맡아 신문사 설립 추진을 하고 나중에 부사장을 맡았다. 그는 지방의 계몽과 근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재산가요, 경남지방의 유력자였다. 진주군 학무위원으로 봉양학교와 동명학교 교장을 역임하고 중추원 참의, 경남 평의원, 경상농공은행 취제역을 지낸 그는 1937년 경상남도 총후지성회 부회장이 되어 애국기 '진주호' 헌납운동을 주도하고, 1939년에는 특별지원병 진주후원회 고문이 되어 지원병 지원 유세를 하는 등 친일부왜 활동을 펼친 인물이기도 하다.

경남관찰사로 재임하면서 신문 창간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황철은 이후 경남지역 소속 관청과 사무소에 신문 구독을 권유하거나 면내 신문 구람소를 확보할 것을 지시하는 등 신문을 통한 인민의 계몽에 적극적이었다. 그는 신문의 행정적 조력자이자 후원자였다.

신문사의 주필이었던 장지연(1864~1921)은 강제 병합 이전에는 항일 계몽언론인이었지만, 그 이후는 친일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장지연은 1895년 민비 시해 사건(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궐기 호소 격문을 각처에 발송하였고, 1896년 아관파천 때에는 고종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를 기초 작성하였다. 1897년 7월 독립협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898년 내부주사(內部主事)를 사직한 후 9월 『황성신문(皇城新聞)』이 창간되자 기자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1월 만민공동회의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곧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가 해산되면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1899년 이후 『시사총보(時事叢報)』와 『황성신문』 주필로 활동하다가 1902년 8월 『황성신문 』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장지연은 20일 자 신문에 을사늑약 체결에 서명한 5적(賊)을 '개돼지만도 못하다(豚犬不若)'라고 격하게 비난하는 사설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써 민족의 의분을 만천하에 토로하고, 국민 총궐기를 호소하였다. 이후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65일간 투옥되었으며, 『황성신문』은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1906년 이후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흥사단에 활동하였으며, 1907년 1월 국채보상운동 동참을 호소하는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1908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해조신문(海朝新聞)』 주필로 초빙되었으며, 같은 해 5월 『해조신문』 폐간 후 상하이[上海]·난징[南京]을 거쳐 9월 귀국하였다.

1909년 10월 장지연은 경남일보 주필로 활동했다. 1910년 8월 이후 『대한매일신보』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로 이름을 바꾸고 중앙의 나머지 신문들이 모두 폐간되었지만, 『경남일보』만은 폐간되지 않았다. 대신 사설이 없어지고 사전검열을 계속 받았다. 본래 일간으로 출발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는 격일 간으로 발행되었다. 장지연은 1910년 10월 11일 자(제148호) 「사조(詞藻)」란에 한일강제 병합을 비난하며 8월 30일 자결한 매천 황현의 「유시(遺詩)」를 게재하고 평을 달았다. 이로 인해 치안방해 이유로 발매 반포 금지, 압수당하여 『경남일보』는 「신문지법」 제21조 위반으로 10월 25일까지 10일간 정간되었다. 복간된 『경남일보』는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기념 신문을 발행하는 등 친일적 경향의 보도를 하였다. 그는 1913년 신병을 이유로 『경남일보』 주필을 그만두고 마산으로 이주하였다. 이때 마산에 있었던 통도사 경봉스님과 교류하며 불교와 인연을 맺고 서신 왕래를 하였다. 장지연은 1914년 12월부터 1917년 12월까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객원 주필로 활동하면서 식민정책을 옹호하거나 식민체제의 우월성과 동화정책을 선전하는 등의 친일적인 논설과 작품을 발표하였다. 처음은 항일 저항적 언론이었다가 1910년 이후는 친일 언론인으로 손가락질을 받는 대표적인 언론인이 장지연이다. 그는 1921년 10월 2일 병사하였다.

김홍조는 1904년 경성의 미동(美洞)의 박문사(博文社)의 주주와 1920년 동아일보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그가 신문발행의 목적인 인민 계몽에 관심을 많이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김홍조는 신문 창간 후 1910년 4월 12일 정기주주총회에서 사장직을 강위수(姜渭秀)에게 넘기고 물러났다. 그는 경남 신문 창간에 이바지했지만, 신문발행을 통한 사회 활동은 짧았다.

『경남일보』는 경남지역의 문명개화의 도화선 역할을 하였지만,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개화 자강을 목표로 하는 실력 양성론의 입장에 있었다. 신문 보도의 내용을 보면, 강제 병합 이후에는 저항과 투쟁보다는 '식민지적 인간' 형성에 이바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경남일보도 당시의 시대 상황에 따른 민족주의와 친일주의 양자 간의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위수가 1910년 『경남일보』 사장 재직 중 일본 시찰 후 그는 좌담회·간담회 등을 통하여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널리 홍보하는 데 앞장섰다. 이 목적으로 김기태 등의 일본 감상문을 『경남일보』를 통하여 주민들에게 소개하였다. 1911년 11월 3일 경남일보사의 천장절(일왕 생일) 기념식 주최도 이러한 인식의 발로에서 비롯되었다. 강제 병합 이후인 1910년대는 언론계의 암흑기였다.

"조선이 식민지화한 당시에 조선사람의 사상과 그 취체(取締, 통제와 단속)가 여하(如何)하였는가는 길게 말할 필요도 없다. 보통학교 훈도가 「사벨」을 차고 군청 서기가 사벨을 찾다. 언론, 출판, 집회, 결사는 극도로 제한되었으니 조선에 언론기관이라 할 만 한 것은 전무한 어둠컴컴하고 어마어마한 시대였다. 다만 총독부 기관지로 매일신보가 있었고 민간신문으로는 지방에 김홍조씨와 장지연씨가 한 경남일보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사(時事)와는 전연 관계가 없는 것이었으니 이 시대는 실로 언론계의 암흑시대였다." (『동광』, 제28호, 1931.12.01.)

김홍조는 부친 김규환이 1910년 9월 18일 사망하게 되자 김홍조는 진주에서의 경남일보 일을 그만두고 울산으로 돌아와 삼년상을 치르는 기간에도 울산 학성공원 안에 영호정(永護亭)을 짓고 지역민들의 개화에 힘썼다고 한다. 1911년 5월 김홍조는 제국재향군인회(帝國在鄕軍人會) 울산분회 특별회원에 추천되고, 울산군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가 1913년 5월에 의원 면직되었다. 일제강점기 참사는 조선총독부가 지역의 학식과 명망이 있는 사람 중에 임명한 명예직이었다.

그런데 왜 김홍조는 양산의 만석꾼 경주 김씨 김정훈을 사위로 받아들였을까? 한일강제 병합 이후라 김정훈의 부친과 조부가 일본군과 전투하다가 체포되어 사형당한 사실을 모를 리 없는 상황에서 외동딸과 결혼시킨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김홍조는 당시 선각자이지만 사업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려는 시기였다. 당시 경남지역의 거부는 부산의 윤상은, 양산의 김정훈, 울산의 김홍조, 경주의 최준 집안이었다. 김홍조는 차남 김택진과 부산의 윤상은의 장녀 윤연숙을 결혼시켜 사돈이 되었다. 윤상은은 구포은행과 경남은행과 사업적 동반자이다. 여기에 백산상회를 경영했던 최준과도 연결된다. 김홍조가 만석꾼 김정훈을 사위로 받아들인 명백한 이유는 양쪽 집안에서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당시의 부잣집 사이의 결혼이었다. 다만 김정훈 부친의 사망 이유를 알면서도 혼인을 한 이유는 과거 활빈당과 연관이 있었던 김재복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김재복이 소금 장사로 부를 축적했다고 하는데 이 소금이 김홍조의 부친이 생산한 소금이었을 수도 있다. 선대 시절부터 인연을 맺고 혼사에 대한 약속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김홍조의 사후에 차남 택진(1907~2003, 부산대 건축과 교수)과 윤상은의 장녀 연숙과의 결혼도 부모끼리의 약조 때문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울산작가회의 울산민예총 감사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태그:#의열단원 박재혁, #김홍조, #김정훈, #박영효, #경남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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