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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 한가람미술관서 열리고 있는 <로즈 와일리전>을 보고 왔다. '영국을 넘어 전세계를 사로잡은 86세 할머니 화가'로 부제를 단 이 전시의 출구에 적혀 있던 글은 역설적이다. 로즈는 말하길(적혀있기를) "나는 나이보다 그림으로 알려지고 싶어요." 혹은 "유명해지고 싶어요!"라고 했으니까. 

"I want to be known for my paintings _ not because I'm old."
 
(86세의) 나이가 아니라 그림으로 알려지고 싶다는 문구가 출구 앞에 쓰여져 있다.
▲ 로즈 와일리의 대규모 전시가 예술의 전당서 열리고 있다 (86세의) 나이가 아니라 그림으로 알려지고 싶다는 문구가 출구 앞에 쓰여져 있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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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밧모섬>을 쓴 논픽션 작가 제인스 레스턴이 말했다.

"19세기는 소설가의 시대이고, 20세기는 저널리스트의 시대였으며, 21세기는 독자의 시대가 될 것이다."

픽션의 시대에서 논픽션의 시대로, 그리고 온 세계는 이 모든 것들을 수용하고 즐기는 일반 대중의 시대로 옮겨온다는 이야기! 언론도 어느새 대중들이 스스로 열고 전문화 돼 가는 측면을 보자면 충분히 타당한 이야기로 이해된다.

비록 그녀가 젊어서는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이었고, 결혼을 하고 세 명의 자녀를 키우고 주부로 살다가, 마흔 다섯에 다시 영국왕립예술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한 '전문가'라고 해도, 그는 한편에서는 '그저 주부'였다가 다시 옛 업계로 돌아온 한 사람일 뿐이다(이런 이들은 우리의 옆에도 얼마나 많은가! 초등학교 이후로 처음 붓과 연필을 잡은 할머니들처럼).

그의 그림들과 그녀가 말하는 그림에 대한 이야기들은 모두 '편안'하다. 예를 들어 그녀는 대작을 그리기도 한다. 높이가 5미터쯤이나 되는 그림도 있고, 거기엔 높게 성이 솟아있는데, 그 안의 성을 그린 이유는 그저 높이 그리는 데 필요해서일 뿐이란 거다.

그림 안에 특별한 의미를 담고자 하지도 않는다. 그냥 그림은 그림일 뿐이라는 것. 평론가들이나 고급 관객은 고상한 의미를 찾고자 하겠지만, 로즈 와일리는 그런 일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영화속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 그녀의 그림 소재는 그녀의 일상이다 영화속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 로즈 와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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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소재로 삼아 그리는 것은 일상에서 보는 것들이다. 영화에선 '멋진 장면'에 자극 받는다. 주변에서 자신의 고양이, 시골 집 어디에나 있는 거미, 개구리, 새나 개들을 소재로 삼는다. 별로 재미없는 영화였지만, 사막에서 핑크빛 식탁보를 깔고 식사를 하는 장면은, 내가 봐도 멋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그걸 고스란히 그림으로 남겼을 뿐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거친 녀석들>도 있다. (타란티노는 영화를 멋있게 찍는 사람이다) 거기엔 독일군 장교가 나오고, 그들의 제복은 위압적이고 번쩍거리고, 잘 각이 잡혀 있다. 그 본새가 인상 깊어 다시 그걸 그린 것뿐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캔버스를 잘라 다시 덧붙여 그린단다. 소품중엔 그래서 타카도 있다.
▲ 권순학 작가의 작품으로 재현한 로즈 와일리의 아틀리에 마음에 들지 않으면 캔버스를 잘라 다시 덧붙여 그린단다. 소품중엔 그래서 타카도 있다.
ⓒ 권순학, 로즈 와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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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로즈 와일리가 시사주간지 <옵저버>에 미술평론가가 실었던 로버트 피크의 그림에서 영향을 받았던 그 사건의 연장이다. 한껏 부풀리고 과장되었던 여왕 엘리자베스와 왕 헨리의 옷들에서 받았던 깊은 인상. 그녀의 그림이 거기서 시작했다고 안내에는 적혀있다.

2013년. 손흥민과의 대화를 카톡 대화창으로 재구성해 놓은 건, 그녀 로즈 와일리가 토트넘의 왕팬이고, 축구 경기와 그 선수들도 그렸기 때문이다. 그림들은 축구선수를 흠모하는 초등학교 어린애들 솜씨로 그려져 있다(다른 그림도 다 그렇다). 그런 점에서도 그녀의 그림은 전문가의 그것과는 거리를 둔다. 잘 그리는 것도 그의 관심이 아니다. 
 
미술 평론가가 시사주간지에 소개한 옛 화가의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제는 관객의 시대다.
▲ 엘리자베스 & 헨리와 새들, 2013 미술 평론가가 시사주간지에 소개한 옛 화가의그림에서 영감을 얻었다. 이제는 관객의 시대다.
ⓒ 로즈 와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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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고 나와보니, 바깥은 로즈 와일리의 작품으로 만든 '굿즈들' 천지였다. 로즈 와일리의 그림을 보고 온 많은 이들의 관전평과 블로그는 '굿즈에 대한 애증-사랑과 갈증'으로 채워져있다. 브로치로 엽서로 문진으로 달력으로 컵으로… 무수히 많은 아이템들은 곧바로 관객들의 일상에서 소비될 것들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그녀의 그림은 '관객의 그것'이었다.

신도 왕도 귀족도 영웅도, 대단한 사건을 그리지도 않은 그림들. 의식의 과잉을 보여주거나 추상의 세계로 작가의 내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닌 그림. 그저 주변의 일상을 별다른 의식적 노력 없이 그려낸 그 그림들이 왜 저렇게 멋지고 핫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온전하게 빼앗을까? 이전과는 다른 시대가 왔다는 증거. 내가 오늘 본 것은 바로 그것 같았다.
 
수많은 이들이 관람 후기에는 굿즈 앓이의 흔적이 있었다. 관객들의 일상에 그림이 가닿을 것이다
▲ 로즈 와일리의 작품으로 만든 굿즈들 수많은 이들이 관람 후기에는 굿즈 앓이의 흔적이 있었다. 관객들의 일상에 그림이 가닿을 것이다
ⓒ 원동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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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로즈 와일러, #예술의 전당, #할머니화가, #관객의 시대, #일상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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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읽고 글 쓰고, 그림 그리고 사진 찍고, 흙길을 걷는다. 글자 없는 책을 읽고, 모양 없는 형상을 보는 꿈을 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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