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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 한림읍에는 대중가요 <찔레꽃> 노래비가 있다. 또 제천시 박달재 고개에는 <울고 넘는 박달재> 노래비, 태안군 만리포 해수욕장에는 <만리포 사랑> 노래비도 있다. 아마 지금도 어디선가 기획이나 제작이 진행되고 있을 만큼 이제 흔하고 흔한 것이 노래비이지만, 세 군데 노래비에는 그래도 주목할 만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서 있는 지역이나 노래를 부른 가수는 다 달라도, 곡을 쓴 작곡가는 모두 같다. 그가 바로 김교성이다.

일본 대중음악계에 이름을 알린 첫 한국 작곡가
 
작곡가 김교성
 작곡가 김교성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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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서울에서 태어난 김교성은 한국 대중가요 역사를 개척한 인물이었다. 이력이 알려진 대중음악 작곡가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그는, 1932년부터 음반을 통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에 이미 극단에서 무대 음악을 담당하고 라디오방송에 출연한 것이 확인되며, 무성영화 상영에 연주자로 참여했다고도 알려져 있다. 앞서 1925년에는 음악회에서 독창을 한 기록도 확인되는데, 이후 1934년에 그가 노래한 음반이 실제 발매되기도 했으므로, 김교성의 음악 활동은 스무 살 전후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빅타, 포리돌, 태평 등 여러 음반회사에서 광복 전까지 발표된 김교성의 작품은 현재 약 150곡 정도 확인된다. 그 중에는 앞서 본 <찔레꽃>처럼 트로트로 분류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민요 스타일로 만들어진 작품 비중이 전체적으로 상당히 높은 편이다. 또 김교성이 만든 노래 가운데 <영객>, <수줍은 나도 웁니다> 같은 곡은 1932~33년 일본에서 번안곡으로 발표되기도 했다. 동료 전수린와 함께 일본 대중음악계에 이름을 알린 첫 번째 한국 작곡가가 김교성이었다.
 
1932년 일본에서 발매된 김교성 작곡 <영객> 번안곡 음반
 1932년 일본에서 발매된 김교성 작곡 <영객> 번안곡 음반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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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에도 김교성의 활동은 여전히 이어진다. 노래비에 새겨진 <울고 넘는 박달재>, <만리포 사랑>을 비롯해 약 120곡 정도가 김교성 작품으로 확인되며, 자료가 더 발굴되면 작품 수도 그만큼 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김교성은 또 서울레코드, 고려레코드 등 음반회사에서 문예부장을 맡기도 했고, 신인 선발 콩쿠르에서 최고의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50대에 접어든 1950년대 후반 이후에는 대한레코드작가협회 이사장, 4·19혁명의노래전국보급추진위원회 위원장 등 공적 조직의 대표를 맡기도 했는데, 이는 당시 그가 대중음악계 최고 원로로 인정받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많은 히트작과 원만한 리더십으로 대중음악계를 이끌었던 김교성은, 그러나 1961년 2월 2일 너무나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병원에서 그의 마지막 순간을 지킨 가수 겸 작사가 반야월은, 급체와 고혈압으로 인한 출혈(아마도 뇌)이 돌연한 죽음의 원인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틀 뒤 치러진 김교성 장례식은 한국 대중음악가들이 거의 모두 참석한 보기 드문 자리였고, 식장에서는 김교성의 대표작 <능수버들>을 피리 명인 이병우가 연주해 애도 분위기를 더했다.

<능수버들>부터 <궁초댕기>까지... 김교성이 남긴 음악들 
 
1936년 일간지에 실린 <능수버들> 광고
 1936년 일간지에 실린 <능수버들> 광고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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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김교성 작품 중 민요 스타일로 만들어진 경우, 즉 신민요가 많았음을 언급했는데, <능수버들>은 그를 떠나보내는 장례식 조가로도 연주되었을 만큼 단연 첫손에 꼽히는 작품이다. <천안삼거리>로도 알려진 <흥타령> 곡조를 바탕으로 김교성이 만든 <능수버들>은, 1936년 발표 이래 많은 사랑을 받았고, 국악계에서도 수용한 레퍼토리가 되었다.

특히 분단 이후 북한에서도 민요 고전으로 인정되어, 여러 차례 음반이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민요 자체가 북한에서 우호적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1936년에 처음 녹음한 가수 선우일선이 북한에서 계속 활동을 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하튼 <능수버들>의 전통적 선율미가 남북 모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음은 분명하다.
 
분단 이후 북한에서 발매된 <능수버들> 음반
 분단 이후 북한에서 발매된 <능수버들> 음반
ⓒ 한국음반아카이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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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수버들> 외에 주목할 만한 김교성의 신민요를 하나 더 들자면 <궁초댕기>를 또한 빠뜨릴 수 없다. 1941년에 발표된 <궁초댕기>는 함경도 민요 <신고산타령>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오늘날에는 아예 전래민요로 간주되는 경우도 많다. 작곡자가 명확히 있는 신민요를 전래민요라 하는 것이 분명 오류이기는 하지만, 그런 오해가 생길 만큼 <궁초댕기> 역시 국악계에서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는 곡조였음을 또 알 수 있다.

<궁초댕기> 음반 발표 이후 10년도 안 되어 그 가사가 <조선의 민요>(1949년 간행)에 이미 실렸고, 다시 10년쯤 뒤에는 경기민요 명창 김옥심이 녹음한 <궁초댕기> 음반도 발매되었다. 김옥심의 노래는 1941년 초판과는 곡조나 사설에서 모두 차이가 좀 있고, 음반에 작가 이름도 명기되어 있지 않다. <궁초댕기>가 전래민요인 것처럼 자리를 잡은 데에는 이 김옥심 음반의 내용과 표기가 상당한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궁초댕기> 초판과 김옥심 녹음반
 <궁초댕기> 초판과 김옥심 녹음반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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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이제 김교성의 저작권 시효도 끝났고, 그 이름 자체가 대중의 기억에서 조금씩 흐려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간단히 정리해 본 이력과 대표적인 작품, 특히 민요화된 작품들을 보면, 타계 60년을 맞는 김교성의 의미를 되짚어 볼 이유는 충분하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인생을 짧아도 예술은 길다고들 하니 말이다.

태그:#김교성, #능수버들, #궁초댕기, #찔레꽃, #울고 넘는 박달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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