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한때는 같은 꿈을 바라보던 선후배의 인연이, 끝내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 악연이 되고 말았다. 지난 20일 SBS 보도 등에 따르면 한국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를 지낸 김보름이 동료였던 노선영을 상대로 지난해 11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약 2억 원에 해당하는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전해지며 많은 대중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두 사람의 악연은 3년 전 2018 평창동계올림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 추월(team pursuit)' 종목에 박지우까지 포함하여 한 팀으로 출전했던 두 사람은 이른바 '왕따 주행' 의혹에 휩싸이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준준결승전에서 한국팀은 김보름·박지우가 큰 격차로 먼저 결승선을 통과하고, 노선영은 한참 뒤처져서 따로 들어오는 기묘한 장면이 연출되며 그대로 탈락했다.

팀추월은 400m 레인을 6바퀴(2400m) 돌아 가장 뒤에 있는 선수의 기록을 비교하는 경기 방식이다. 앞선 2명이 빨리 들어온다고 해도 그 기록은 반영되지 않으며 경쟁팀이 상대 주자를 따라잡으면 그대로 경기가 끝난다. 상대적으로 처지는 '약자'를 가장 배려하면서 앞선 동료들이 함께 밀어주고 끌어줘야 하는 종목이기에 그야말로 '이겨도 함께 이기고, 져도 함께 지는' 팀스포츠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순간 한국 여자대표팀에게 '팀'은 없었다. 하필 다른 종목도 아닌 팀추월, 다른 대회도 아닌 전세계인들이 지켜보는 올림픽에서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수 없는 황당한 장면이 벌어진 데 많은 팬들은 충격을 받았다.

특히 선두로 들어온 김보름은 왕따 주동 의혹에 휩싸였다. 김보름은 경기 직후 인터뷰에서 "중간까지 잘 타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뒤(노선영)에서 저희랑 격차가 벌어지면서 기록이 아쉽게 나온 것 같다"고 발언하여 더 큰 후폭풍에 휩싸였다. 김보름은 팀동료이자 선배인 노선영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고, 인터뷰 중간에는 살짝 실소에 가까운 웃음까지 짓기도 했다. 대중들은 김보름의 태도를 두고 자책은 없이 노선영에게만 경기결과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고 조롱까지 했다며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에 노선영은 또다른 언론 인터뷰를 통해 "대회 전부터 대표팀내에서 훈련할 때부터 차별과 따돌림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파문은 일파만파 확대됐다. 노선영은 이미 동생 노진규의 안타까운 사망사건, 그리고 본인도 과거 빙상연맹의 행정 착오로 대표팀에서 제외됐다가 복귀하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으며 대중의 동정을 받고있던 상황이었다.

팀추월 사태는 올림픽과 국가대표팀에 쏟아지던 국민적 기대감, '공정'과 '형평성'에 민감해진 대중의 정서적 금기를 건드린 사건이었다. 이미 올림픽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온 한국 빙상계의 구조적 비리와 파벌 논란 등과 맞물려 여론의 누적된 분노를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됐다. 김보름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과 대한빙상연맹의 적폐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청원이 수십만명이 넘는 동의를 얻는가 하면, 다수의 해외 외신들도 이 사태를 비중있게 보도하며 평창올림픽의 가장 부끄럽고 실망스러운 장면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대표팀은 상황이 심각해지자 대회 도중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김보름과 백철기 감독이 참석하여 사태를 해명했다. 김보름은 "제 인터뷰를 보시고 많은 분이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 같다. 많이 반성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며 고개를 숙였다. 백철기 대표팀 감독은 "경기 전략은 노선영의 의견을 반영하여 수립했고, 대표팀 내 불화는 없었다. 경기중 노선영이 뒤처진 것은 소통상의 실수이고, 이는 선수들이 아니라 지도자들이 챙기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정작 '피해자'로 지목된 노선영이 기자회견에 불참하며 반쪽짜리 해명이 되고 말았다. 노선영은 이후로도 항상 별개의 인터뷰를 통하여 김보름이나 빙상연맹 측의 주장을 반박하며 대립각을 세웠다.

왕따 논란 이후 순위결정전에 모습을 드러낸 노선영은 팬들의 박수와 응원을 받은 반면, 김보름은 야유에 시달려야 했다. 김보름은 마지막으로 출전한 종목이었던 매스스타트에 은메달을 획득한 후 태극기를 들고 트랙을 돌며 관중석을 향해 큰절을 올리는 속죄 세리머니를 펼치며 눈물을 쏟기도 했다. 그렇게 왕따 논란은 올림픽이 끝날 때까지 말끔하게 해결되지 못한 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기고 마무리됐다.

그런데 같은 해 문화체육관광부는 대한빙상경기연맹 특정감사를 통해 팀추월 왕따 논란에 대하여 고의성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반전이 벌어졌다. 문체부는 당시 과도하게 벌어졌던 선수들의 간격을 두고 김보름이나 박지우가 의도적으로 가속을 했거나 노선영이 일부러 속도를 줄였다는 의혹에 대해 모두 사실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팀추월에서 일부 선수가 뒤처진 사례는 다른 국가의 대표팀에서도 다수 확인됐으며, 선수들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던 경기로 판단된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작전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지도자와 선수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과실만 인정됐다.

하지만 김보름과 노선영의 악연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김보름은 2019년 SNS를 통하여 자신이 오히려 노선영으로부터 7년 넘게 폭언과 괴롭힘을 당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같은해 열린 동계체육대회 기간중 인터뷰에서는 눈물의 인터뷰를 통하여 왕따 의혹을 다시 한번 강하게 부정했다.

김보름은 최근 개인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송을 예고한 바 있다. 김보름은 "그동안 무수한 고통을 참고 또 참으며 견뎌왔다. 이제는 진실을 밝히고 싶다. 평창올림픽 당시 수많은 거짓말과 괴롭힘에 대해 노선영 선수의 대답을 듣고 싶다"고 밝혔다. 김보름은 소장을 통해 노선영의 발언때문에 공황장애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고, 광고와 후원이 중단돼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창올림픽이 끝난 지도 어느덧 3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두 선수는 끝내 감정의 골을 풀지 못한 채 법적 공방으로 진실을 가려야 하는 상황까지 직면한 것이다.

한때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이자 팀동료이고 동고동락까지했던 두 사람이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그리고 과연 사태가 이렇게 될 때까지 대표팀과 빙상계 다른 관계자들은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법적 공방을 통하여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 김보름과 노선영의 갈등을 지켜보며 3년 전과 전혀 바뀐 것이 없는 안타까운 현실에 대중들의 마음도 불편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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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름 노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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