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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조선시대 객주집 모습을 그린 풍속도(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조선시대 객주집 모습을 그린 풍속도(출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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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은 예로부터 농작물과 어족자원이 풍부했다. 따라서 개항(1899) 전부터 포구는 활기를 띠었고, 장시도 발달하였다. 대표적인 포구로 경포(서래장터), 죽성포(째보선창), 궁포(구암포), 서포(서시포), 나포(나리포) 등을 꼽는다. 이곳의 객주들은 여각을 운영하며 해산물과 곡물을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하였고, 보부상들은 각 지역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구한말 군산의 민간 무역은 경포(경장시와 서래장터) 중심으로 이뤄졌다. 장시에 나오는 각종 농산물과 해산물도 금강·만경강 수운을 통해 집하됐다. 그러나 전군도로(1908)와 군산선(1912) 개통으로 활기를 잃는다. 이후 일제가 1918년 장재시장을 개장하고 죽성포를 근대식 어항으로 조성하면서 경포는 장시와 포구 기능을 째보선창으로 넘겨주게 된다.

째보선창은 군산 지역에서 객주가 가장 많은 포구로 발돋움한다. 선창으로 흘러드는 샛강 중심으로 객주 거리도 조성된다. 물류 유통이 '해상운송'에서 기차와 자동차를 병행하는 '육상운송'으로 쏠리면서 객주들 활동 거점도 다양해진다. 포구 중심으로 활동하던 객주들이 기차역, 버스터미널, 대로변 등에 사무실을 마련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아일보’ 창간 및 속간 축하해준 군산 객주들
 ‘동아일보’ 창간 및 속간 축하해준 군산 객주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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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상호, 강인묵, 김도수, 김백용, 김병문, 김병선, 김병수, 김영민, 김용배, 김의숙, 김정태, 김형기, 김홍두, 나병선, 문평중, 박병태, 박화신, 방순용, 변구호, 변정호, 손세환, 송수환, 송태희, 양석주, 윤영식, 윤석두, 윤 용, 이기영, 이성서, 이원형, 이춘성, 임희준, 조중환, 편무송, 편원순, 차덕노, 채규현, 천병섭, 최익, 한순태..."

일제강점기(1920~1928) 신문 기사와 광고에서 만난 군산 객주들이다. 모두 40명으로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객주를 만났다. 신흥호(信興號), 영창호(永昌號), 덕창호(德昌號) 등의 상호와 취급 품목까지 친절히 안내하고 있다. 명함과 간판이 익숙하지 않은 시대여서 그런지 아니면 광고료 부담 때문인지 대부분 객주가 자기 이름만 소개하였다.

천일상회, 동일상회, 보성상회 등 '상회(商會)'를 사용하는 객주도 많았다. 해산물, 곡물, 어염(魚鹽) 등 취급 품목을 조목조목 나열하면서 자신을 무역상(貿易商)으로 소개하는 객주도 있어 눈길을 끌었다. 물산객주(物産客主)와 물상객주(物商客主)는 객주의 원래 유형으로 '물산객주'는 북쪽 지방에서, '물상객주'는 남쪽 지방에서 주로 사용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객주들 사회 활동에서 민족의식 느껴져
 
군산 영정 거리(1920년대로 추정)
 군산 영정 거리(1920년대로 추정)
ⓒ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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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객주들은 주로 째보선창에서 가까운 조선인 거리(지금의 개복동, 영동, 중앙로2가, 장재동, 죽성동, 신영동 등)에 점포와 사무실을 소유하고 있었다. 기차역 부근과 일본인 거리(본정, 명치정, 빈정 등)에 주소를 둔 업소도 종종 눈에 띄었다.

군산부협의회 의원과 교육위원 중 객주 출신도 있었으며,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 초대 군산지국장 변정호(邊鼎鎬)도 객주 출신이어서 놀라웠다. 그래서 그런지 많은 객주가 창간 축하 광고를 냈다. 일제에 의해 '정간'당했다가 속간됐을 때도, '1천 호 발행' 때도 축하 광고를 게재하는 등 시사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다.

객주들은 야학 설립에도 앞장서 동참한다. 미선조합 조합원 주도로 1921년 설립한 적성야학교와 무산아동교육에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이 1922년 설립한 영신여학원 교사 신축을 앞두고 객주 수십 명이 의연금을 냈다. 건축후원회 발기인 총회를 객주조합 사무실에서 열고 김백용, 편무송, 김병수 등이 위원으로 참여한 것에서도 그들의 성의가 엿보였다.

1922년 일제가 내선공학(內鮮共學)을 내세우며 관립제국대학을 설립하자 조선교육회는 민립대학(民立大學) 설립 운동을 전국적으로 펼친다. 군산에도 지방부가 설치된다. 1923년 4월 25일 군산객주조합 사무실에서 민립대학 군산 지방부 기성회가 열렸다. 이날 선출된 임원 26명 중 객주 김홍두, 이원형, 나병선, 조중환 등이 발기인 및 집행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일제 당국의 불합리한 정책을 하나하나 지적하며 저항해온 군산의 물상객주들. 그들의 사회 활동은 가난한 조선인 아동교육을 위한 야학교 설립 기부금, 다양한 불우이웃 돕기 행사 동정금, 해외동포 위문금 등이 주를 이룬다. 3·1운동 열기가 가시지 않았을 때여서 그런지 그들의 활동에서 교육에 대한 열기와 집념, 민족의식이 느껴졌다.

일제의 '객주제 폐지' 공작.. 1937년 마각 드러내

삼일운동(1919) 이후 객주들은 영업권을 지키기 위해 구한말 '상회사'와 비슷한 성격의 객주조합을 설립하였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와 방해 공작에도 일본인 자본과 결합하지 않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결과가 미비하긴 했으나 지역 노동자 일자리 제공과 일제 정책에 반대 의사를 행동으로 보여주면서 사회주의 단체를 지원하는 등 나름의 활동을 펼쳤다.
 
군산 어업조합 공판장(군산 부영 수산시장 1935)
 군산 어업조합 공판장(군산 부영 수산시장 1935)
ⓒ 군산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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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주제를 철폐코 문옥조합을 창립’ 제하의 1933년 11월 21일 치 '동아일보' 기사
 ‘객주제를 철폐코 문옥조합을 창립’ 제하의 1933년 11월 21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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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군산 어업조합이 설립된다. 그러나 조합장을 부윤(시장)이 맡는 등 운영권은 일본인들이 거머쥐고 있었다. 일제는 '객주제(客主制) 폐지'를 위한 첫 작업으로 객주조합을 일본식 명칭인 문옥조합(問屋組合)으로 바꾸고, 조선인 객주 위탁 판매권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 두 번째는 '조선인 어상권(漁商權) 어업조합으로 이거(移居)' 작업이었다.

1932년 군산 근해 어획고는 200만 원을 돌파한다. 개항 이후 최고 기록이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동빈정(째보선창) 일대에 있는 해산물 문옥업(問屋業:객주업)자들의 노력 결과로 얻어진 공로의 결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라고 평했다. 이어 "총독부 방침에 기준으로 한 수산업 통제라는 이름하에 군산 어업조합으로 그네들(객주들)의 위탁 판매권은 영영 옮겨가게 된 결정적 운명에 봉착되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하였다.

일본인 조합장 주도로 군산어업 조합이 해산물 위탁 판매권을 통제하고 '수산업 통제' 명목으로 조선인 어상권이 어업조합으로 넘어가자 객주들은 도(道) 당국에 진정서를 제출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였다. 급기야 객주들이 충남 장항으로 옮겨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하였다.

신문은 '객주들이 군산을 떠난 이후 선창가는 졸지에 실업자의 홍수로 죽네 사네! 하는 비난의 소리가 날로 높아가는 현상'이라고 당시 부둣가 분위기를 전했다. 이어 '일반 노동자와 매일 집산하는 다수 선원을 상대하는 각종 음식 영업자들까지 막대한 타격을 받고 있다. 이것이 어업조합 출현으로 미치는 다대한 영향'이라고 에둘러 불만을 표출하였다.

객주들은 '우리 요구에 불응하면 부민대회(시민대회)를 개최하겠다'며 강경하게 맞선다. 그런데도 일제의 객주 폐지 공작은 지속해서 이뤄졌다. 군산 어업조합은 객주들의 해산물 위탁판매 통제 영역을 바다로 확대한다. 쾌속 정찰선으로 연안 어장을 살피고 다니며 어류 위탁판매를 감시하는 등 어로작업 통제를 강화한다.

온갖 음모를 꾸며오던 일제는 결국 마각을 드러낸다. 1937년 6월 해산물 객주제 폐지 결정이 전라북도 도령(道令)으로 고시된 것. 당시 군산에서 영업하고 있던 객주와 객주상회는 강인묵(姜仁默), 김명신(金明信), 박무경(朴茂景), 이용환(李容煥), 김은태(金殷泰), 합명상회(合名商會), 대원상회(大元商會), 대동상회(大東商會) 등 20여 곳이었다.

한때 상업문화를 꽃피웠던 이 땅의 객주들. 군산 지역 객주들은 언론과 주변 사람들로부터 개항 이후 38년 동안 군산을 '바다의 군산'으로 발전시킨 숨은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었다. 그러나 일제의 '객주제 폐지' 결정이 고시된 이후 객주업은 급격히 쇠락하였고, 그 주역인 객주들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참고문헌 및 책자: 군산디지털문화대전, 동아일보, 조선일보, <금강 그 물길 따라 100년>(조종안 지음)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태그:#객주, #째보선창, #객주제 폐지, #객주조합, #문옥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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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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