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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적성정밀검사라는 걸 봤다. 운전을 업으로 삼으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라 했다. 사전에 특별한 정보가 없이, 그냥 그래야 한다는 것만 알고 무작정 교통안전공단을 찾아갔다. 미리 예약을 하지 않아 결시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검사 시간이 임박해 다행히 한 자리가 났다. 미처 오지 못한 응시자는 25번이었다. 형형색색의 버튼과 조이스틱, 페달까지 달린 큼직한 모니터가 나를 맞아주었다.

모두 30여 명쯤 돼 보였다. 이게 오후반이니 오전에도 이만큼 보고 갔다는 거다. 신년을 맞아 운전기사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았다. 혼자가 아니어서 위로는 됐으나, 이들이 앞으로 도로 위의 경쟁자가 될 것이라 생각하니 은근 승부욕도 생겼다. 그런데 뭔가를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답지 않게 예비 경쟁자들의 낯빛은 대부분 어두웠다. 안내하는 직원의 농담 멘트에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하긴, 그 마음이 오죽할까.

검사는 생각보다 복잡했고 오래 걸렸다. '지각운동능력', '지적능력', '적응능력' 등 크게 3개 요인에 대한 검사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각운동검사는 자동차의 속도나 정지거리를 예측하고, 주의전환이나 상황반응, 변화탐지능력 따위를 본다. 버튼과 페달 등을 이용한 단순한 게임 같았다. 문제는 내가 그런 게임에 영 젬병이라는 사실이다. 게다가 기계치이기까지 하다. 너무 일찍 브레이크를 밟거나 지나치기 일쑤였다. 저조한 점수가 예상됐다.

지적능력검사는 돌발상황 대처, 판단력 등을 알아보는 인지능력검사와 전경과 배경의 구분, 대상 식별능력 등을 측정하는 지각성향검사가 있었다. 미세하게 바뀌는 도형의 모양을 찾아내거나 복잡한 도형 안의 작은 도형, 혹은 작은 도형을 포함하는 복잡한 도형을 찾아내는 식으로 진행된다. 제한된 시간은 각각 7분, 10분인데 그 안에 다 맞추기가 꽤 어렵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넋 놓고 앉았다가 미처 다 풀지 못했다. 점점 더 불안해졌다.

적응능력검사는 '인성검사'다. 운전자로서의 현실판단력, 행동 및 정서 안정성, 정신적 민첩성, 따위를 광범위하게 따져 묻는다. 문항은 총 141문항이나 된다. '매우 그렇다', '약간 그렇다', '아니다'로 대답한다. 전반부와 후반부에 유사한 문제를 배치해 일관성 여부까지 가려낸다. '나는 술을 먹어야만 잠을 잘 수 있다'처럼 답이 뻔한 질문이 대부분이었지만 '나는 착실하게 저축을 한다'처럼 잠깐 고민하게 만드는 질문도 꽤 있었다.

복잡한 검사, 놀라운 결과
 
운전적성정밀검사는 컴퓨터로 본다. 조이스틱, 버튼, 페달등을 조작하면서 진행된다
▲ 운전적성정밀검사 모니터 운전적성정밀검사는 컴퓨터로 본다. 조이스틱, 버튼, 페달등을 조작하면서 진행된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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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는 3시간 넘게 진행됐다. 하지만 지루함을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은 금세 지났다. 검사는 오래 걸렸지만 판정은 바로 나왔다. 검사 결과는 놀라웠다. 나의 모든 약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운전능력에 대한 주최 측의 총평은 이랬다.

"주변인식 및 주의 배분 능력이 부족하며, 차로변경, 이면도로 운전 등에 취약하다. 운전 시 발생하는 상황을 잘 살펴 적절히 반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주변인식과 주의배분능력이 취약하다는 건 불필요한 자극에 민감하고 정작 필요한 것엔 둔감하다는 말이다. 하긴 그렇긴 하다. 운전하면서도 오가는 사람들이며, 가게 간판이나 현수막들, 길가에 핀 꽃 따위에도 한눈을 팔곤 한다.

남들 눈엔 산만하게 보일 수도 있을 터다. 이면도로운전에 취약하다는 평가엔 그야말로 '헉~' 했다. 학교 앞이나 골목길은 정말 싫어한다. 무섭기까지 하다. 어떻게 그런 것까지 짚어냈을까, 과연 IT강국의 최첨단 테스트 시스템은 달랐다.

반응조절검사는 4등급을 받았다. 아무래도 이게 혹평의 근거였던 것 같았다. 나머지는 대부분 2등급이었다. 그래도 인지능력만큼은 1등급을 받았다. 인지능력검사는 말이 조금 어렵지만 운전상황에 대한 판단 및 적응, 대처능력을 본다. 일정한 규칙에 따른 도형의 변화를 예측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관찰력과 추리력 등을 보는 거다. 1등급을 받았으니 눈썰미는 좋은 편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만 나는 결코 베스트 드라이버는 아니었다.

인성검사결과는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지만 그걸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어려웠다. 검사 내내 솔직하지 못해서다. 예를 들자면 '술을 마신 다음 날도 운전하는 데는 지장이없다고 생각 한다', '다른 운전자가 느리게 운전하면 화가 난다' 같은 질문은 솔직히 멈칫했다. 어느 정도는 그에 동의했지만 자칫 술에 대해 관대하다거나, 분노조절장애가 있는 사람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있었다. 잠시 고민 끝에 '(절대)아니다'라 대답했다.

'잠을 쉽게 자기 힘들다'라거나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따위의 질문에도 고민해야 했다. 잠 설치는 버릇이야 이미 고질병이고, 언젠가부터 이명 기마저 있다. 하지만 난 침착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런 상황은 정상적인 운전에 지장을 초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어떠한 질문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앞의 질문을 잘 기억했다가 뒤의 유사질문에 같은 대답을 했다. 교활하고 영악하게 함정을 피해나갔다.

하지만 '살면서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나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는 항목은 아니었다. 그게 진짜 거짓말 아닌가.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는가.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거나 '앞으로의 내 인생에도 희망은 있다' 같은 질문에도 도저히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성공한 인생이라면 운전기사 되겠다고 하지 않았을 터며, 그거 한다고 인생이 하루아침에 확 피리라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 그렇다'를 눌렀어야 했는데 양심상 그럴 수 없었다.

나도 몰랐던 고질적 문제들

그 결과는 평가에 정확히 반영되었다. 정서안정 부문에서 3등급을 받았다. 소견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우울, 불안 등 심리적 어려움을 다소 높게 경험하고 있어 이에 따른 사소한 실수나 사고의 경향성이 있음'이라 했다. 아, 그건 전혀 몰랐다. 가끔 신문지상에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늘어 사회문제로 비화한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약간이나마 나에게도 그런 기미가 있는지는 전혀 몰랐다. 병원에 가 봐야 하나, 고민이 하나 더 늘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적합' 판정을 받았다. 운전으로 먹고 살아도 될 정도는 된다는 거였다. 검사가 끝나고 공단 측에 문의해 보니 부적합은 5% 내외 정도라 한다. 웬만하면 통과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말이다. 물론 인성검사를 있는 그대로 봤다면 어찌 될지 모르는 일이었지만 그랬어도 부적합까지는 받지 않을 성싶었다. 실제로 나중에 아는 의사 분께 여쭤봤더니 그 정도면 병원치료까지는 필요 없는 수준이라 하셨다.

결론적으로 운전정밀적성검사는 대단히 유익했다. 무엇보다 운전상황에서의 취약점을 분명하게 짚어준다. 운전은 습관이다. 습관은 설령 그게 잘못된 것일지라도 무의식적으로 반복하게 마련이다. 이 검사는 그걸 일깨워 준다. 매우 기초적 수준이긴 하지만 정신과적 진단도 그렇다. 평소 방치하다시피 한 정신건강상태를 대강이나마 알게 해 준다. 그렇게 새삼 자각한 문제점들은 앞으로 의식적으로라도 주의를 기울이고 조심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어떤 시험이건 통과한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게다가 이 검사는 그 결과를 국가가 공인까지 해 준다. 나는 새해를 그렇게 시작했다. 아직 사회를 위해 일 할 능력이 있다는 판정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올 한 해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예감마저 든다.

시간과 돈(검사비 25,000원)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 차제에 모두에게 한 번쯤 받아보시라 권하고 싶다. 아, 이리 얘기한다고 나를 공단 관계자이거나 뒷돈이나 받아 챙기는 어설픈 인플루언서 쯤으로 오해하진 마시길.

태그:#운전적성정밀검사, #인성검사, #운전능력검사, #정신건강, #운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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