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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군산은 광무 3년(1899) 5월 1일 개항했다. 대한제국 정부는 특정 국가의 독점을 막기 위해 각국공동조계지(외국인거류지) 제도를 시행한다. 그러나 일본은 재빠르게 군산을 독차지한다. 일확천금을 노리는 일본인이 대거 몰려오고 상가와 여관, 금융회사, 관공서 건물이 곳곳에 들어선다. 빈손으로 들어온 그들은 이 땅에서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한다.
 
침략 선봉대 역할 했던 ‘군산일본인거류민단’(2011년 군산 3.1운동 기념관에서 찍음)
 침략 선봉대 역할 했던 ‘군산일본인거류민단’(2011년 군산 3.1운동 기념관에서 찍음)
ⓒ 군산 3.1운동 기념관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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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일본민회(거류민단) 등 각종 단체와 기관을 설립, 침략의 기반을 다져나간다. 대한제국 정부는 일본 상인들의 경제 침탈에 대응하기 위해 재정 안정과 산업 발전에 필요한 세부 계획을 세운다. 먼저 군산항 거래 상품에 대한 관세 수입을 늘리고, 객주들에게 세금을 납부케 하는 방식으로 영업권(객주권)을 인정하는 등 상업 활성화에 노력을 기울인다.

객주(客主)는 화주에게 상품을 위탁받아 매매를 주선하고, 그에 부수되는 숙박업, 창고보관업, 운송업, 금융업 등을 겸했던 중간 상인을 말한다. 전국의 주요 포구에는 객주가 상주하였다. 객주들은 국가에 세금(百一稅)을 납부하면서 영업권을 확보하였다. 군산은 각지에서 사람이 모여들어 상업이 발달하였고, 객주도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기록에 따르면 개항 전 군산 지역에는 90여 명의 객주가 상주하였다. 그들은 일본 상인들의 횡포에 대비, 순흥사(順興社) 설립에 나섰으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객주들은 1899년 궁내부 허가를 얻어 영흥사(永興社)를 설립한다. 영흥사는 군산포와 경포(서래장터) 객주들을 관할했으며, 관청과 연락을 취해 업무를 조정하고 수세 상납을 공동으로 대처하였다.

구한말, 군산 객주들의 다양한 활동
 
구한말 군산의 객주들(1907)
 구한말 군산의 객주들(1907)
ⓒ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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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던 구한말. 군산에는 영흥사를 비롯해 어염회사(魚鹽會社), 어상회사(魚商會社), 객주상회사(客主商會社), 군산객주조합(群山客主組合), 호상관상회(湖商館商會) 창성사(昌盛社) 등 객주가 참여하는 상회사(商會社)가 속속 설립된다. 이들 상회사에 소속된 객주 중심으로 상공인이 증가하였고 무역 규모도 확대된다.

창성사는 1903년 9월 창립된다. 이때 50여 명의 객주가 참여하였다. 이후 객주들 상납액은 영흥사에서 납부하던 금액보다 인하되었다. 품목에 따라 세금을 내야 했던 수세 규칙도 폐지되는 등 일제의 경제침탈에 제약을 가하였다. 당시 <황성신문>은 군산 지역 객주들 활동으로 일본 상인들의 경제 침투가 어려웠다고 보도하였다.

군산 객주상회사는 교육 사업에 뛰어든다. 소속 객주들 주도로 1903년 진명의숙(進明義塾)과 금호학교(今湖學校)가 설립된다. 운영비는 객주들이 받는 구문(수수료)에서 충당했고, 학생들은 관·공립학교 교과목을 수학할 수 있었다. 이밖에 군산공립보통학교 운영비를 보조해 줬으며, 호상관상회와 어상회사는 각각 상업강습소와 노동야학을 설립, 운영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초 영남 지역에서 시작, 전국으로 확산된다. 전북 지역은 대부분 전, 현직 관리 주도하에 마을 단위로 군민들이 나선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군산은 객주들이 주도하여 국채보상 의연금을 두 차례에 걸쳐 기탁하였다. 특히 상회사 소속 객주들은 대한협회에 가입, 계몽 운동에 동참하는 등 일제 침략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였다.

객주업 '상회사' 일제 탄압으로 1917년경 소멸
 
군산역 부근 객주업 신문광고 모음(1922~1924년)
 군산역 부근 객주업 신문광고 모음(1922~1924년)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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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탄압으로 기반이 약해진 군산 지역 객주들은 1908년 우리나라 최초 신작로인 전군도로가 완공되고 1912년 군산선 개통으로 타격을 입게 된다. 육로가 뚫리면서 화물 운송의 중요 수단으로 철도가 부각됨에 따라 상권 중심이 기차역 부근으로 이동했던 것. 포구와 장시 중심으로 활동해온 군산 객주들도 역전 부근에 거점을 마련한다.

객주들의 노력에도 상회사(商會社)들은 활동 영역이 축소된다. 국권피탈(1910) 전후 일제가 '조선회사령' '객주영업규칙' '객주취체규칙' 등을 제정하여 상회사 설립을 제한하고, 일본 상인들이 주도하는 기구로 객주들을 끌어들여 활동을 제약했기 때문이었다. 일제의 끊임없는 공작으로 상회사들은 발전 동력을 차단당하게 된다.

일제의 객주업 통제로 호상관상회는 1917년경 소멸된다. 이후 군산에서 조선인 상회사는 찾아볼 수 없게 된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인 객주들의 쇠퇴와 조선총독부 및 일본 금융기관의 제도적, 물질적 지원을 바탕으로 군산 경제를 장악하기에 이른다. 그럼에도 어렵게 살아남은 객주 50여 명은 세를 규합, 조합을 결성하여 명맥을 유지한다.

사업가이자 교육·문화 운동가였던 김홍두
 
 천일상회 광고(1923년)와 1930년 4월 동아일보에 소개된 김홍두
  천일상회 광고(1923년)와 1930년 4월 동아일보에 소개된 김홍두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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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지역 객주 100여 명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김홍두(1878~1933). 그는 구복동에서 천일상회(天一商會)를 운영하며 군산부협의회 의원과 군산상공회의소 평의원을 지냈다. 그 외에 군산노동공제회 회장, 신간회 군산지회장, 군산교육후원회 회장 등 다양한 단체장을 역임한 사회운동가이자 사업가로 지역에서 명망 높았던 인물로 전해진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군산의 객주들은 민족과 자본이라는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영업 활동을 통한 이익 도모에만 그치지 않고 교육, 문화 운동을 병행한다. 그들의 다양한 사회운동 참여는 조선인 의식 함양과 지역 발전에 기여했다. 또한, 명망가로서 위신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홍두다.

김홍두(金洪斗)는 1903년 문헌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20대 중반으로 황실 재정을 담당했던 내정원에 대항할 정도로 자기 원칙에 충실하고 뚝심이 있는 객주였다고 전한다. 그는 금호학교 설립에도 기여한 것으로 알려진다. 영흥사 소속이던 1903년 내정원 상납량을 문제 삼다가 제명됐던 김홍두는 그해 가을 창성사가 창립하자 동료들과 함께 참여한다.

금호학교는 국권 회복을 위한 자강운동의 일환으로 세워진 근대 교육의 전당이었다. 전북 지역의 대표적인 중등교육 기관으로 객주들 상회사인 창성사는 학교 운영 재원을 정기적으로 부담하였다. 1909년 친일 단체인 일진회가 합방 청원서를 제출하자 교사와 학생 29명이 반대 성명을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발표하는 등 인재 양성에 노력하였다.

호남에서 유일한 민족 교육기관이었던 금호학교. 부르주아 민족주의 계열을 대표하는 김성수, 송진우, 백관수가 수학했으며, 조선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김철수도 이 학교 출신으로 알려진다. 금호학교는 대한제국 국권이 일제의 손아귀로 완전히 넘어가는 1910년 폐쇄되고 학교 재산은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에 흡수된다.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던 1907년 3월 당시 군산객주상회사에 소속되어 있던 김홍두는 국채보상 의무사(國債補償 義務社)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하였다. 평소 개인 이익에 집착하기보다 영업과 민족 운동을 병행했던 그는 1908년 5월 옥구·군산항 민단을 매개로 결성된 대한협회(大韓協會) 군산 지회에 평의원으로 가담하여 교육, 문화 운동을 펼친다.

김홍두는 삼일운동(1919) 이후 조선 노동공제회 군산지회 고문, 군산 미선조합 조합장, 군산 청년회 회장, 군산 정미조합 및 군산 제승조합 고문, 적성야학교 고문, 군산 공립보통학교 학부형회 회장 등을 지냈다. 어둡고 가혹했던 일제강점기, 긴장과 갈등을 감내하며 '객주 정신'을 지켜왔던 그는 지역 향토사학자들로부터 객주이자 민족 자본가로 소임을 다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덧붙임: 김홍두는 광복 후 미군정청 재무부장(장관급)을 지낸 김용택 경제학박사 부친이자 '국민 엄마'로 알려진 인기 탤런트 김혜자씨 조부(祖父)로 알려진다.

참고문헌: 군산디지털문화대전, 김태웅 서울대학교 교수의 2012년 심포지엄 발제문(제목: '한말·일제강점기 群山 客主 金洪斗의 경제·사회 활동과 商業界의 변동')

(* '객주' 두번째 기사 계속됩니다.)

태그:#군산 객주, #국채보상운동, #금호학교, #객주 상회사, #김홍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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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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