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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영화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은 90년대 고졸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차별적 노동현실을 보여주며 기업이 저지른 사회 문제를 히어로처럼 해결해낸다. 이렇게 여성, 고졸이라는 새로운 면을 보여주면서도 영화는 이들이 '능력'을 가지고 기존 구조에 그대로 적응해가는 식으로 봉합한다.
 영화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은 90년대 고졸 여성노동자들이 처한 차별적 노동현실을 보여주며 기업이 저지른 사회 문제를 히어로처럼 해결해낸다. 이렇게 여성, 고졸이라는 새로운 면을 보여주면서도 영화는 이들이 "능력"을 가지고 기존 구조에 그대로 적응해가는 식으로 봉합한다.
ⓒ 더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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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0월에 개봉한 영화 <삼진그룹영어토익반>(이하 <삼진토>)은 삼진그룹이라는 대기업 "말단사원"인 여성 노동자들을 다룬 영화다. 영화 속 주인공 이자영은 생산3부 소속인데, 공장 점검을 나갔다가 소각 처리되지 않은 페놀이 주변 강에 그대로 유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말단사원"인 이자영은 직입 시기로는 후배지만 고졸과 대졸의 분리직군제 내에서 먼저 대리가 된 최 대리의 입을 빌려 이 사실을 부장에게 보고한다.

하지만 삼진그룹은 페놀이 유출된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조작된 수질 검사 기록을 통해 합의서를 받아 이 일을 무마한다. 그러나 검사 결과에 의구심을 가진 이자영은 동료 "말단사원"들과 함께 우여곡절 끝에 페놀을 유출한 범인을 찾아내고 사건의 은폐가 대표이사의 지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리는데 성공한다.

요약하자면, 회사 내에서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여성 노동자들이 뭉쳐 좌충우돌 끝에 회사의 비리를 파헤치는데 성공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삼진토>는 그동안 주로 미디어가 재현하지 않았던 90년대의 여성, 상업고등학교 출신의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여성 서사'로써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영화는 이 서사 자체보다는 두 가지 장치들을 통해서 자신의 핵심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번째는 90년대 중반이라는 시대적 배경, 두 번째는 이 영웅서사의 주인공이 대기업의 분리직군제 속의 고졸사원으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이라는 점이다.
     
<삼진토>가 그리는 90년대의 얼굴들

영화의 주요 소재인 페놀 유출사건은 실제 있었던 1991년 두산그룹의 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을 재구성한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사건을 소재로 활용할 뿐 그것을 고증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연대와 집단적 힘에 대한 서사를 쓰기 위해 왜 90년대를 빌려왔을까?

특히 감독이 주인공 이자영의 캐릭터를 2017년 노조 결성을 주도한 파리바게트지회 임종린 지회장을 모델로 구성했다고 밝힌 인터뷰를 보며 이 시대적 배경이라는 장치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영화는 최근 다시 부흥하는 '추억소환' 류의 90년대 콘텐츠와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진다. 극 중에서 고졸사원들이 모여 담당 부서원들의 취향에 맞춰 믹스커피를 타는 장면에서, 한국사회가 줄곧 강제해온 전통적인 여성상에 국한되지 않는 인물이자 주류적인 시각에 도전적인 이야기를 자주 하는 인물로 그려지는 정유나(이솜)에게, 주인공 자영은 "X세대다, X세대"라고 말한다.

그러자 옆에서 커피를 젓고 있던 보람은 "대학 안가도 x세대 할 수 있어?"라고 반문한다. 이 반문은 '대중문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90년대에, 문화 콘텐츠의 소비를 주도하던 x세대가 과연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그것을 대표하는 얼굴은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보이지 않는 차별과 낙인

'일반'의 편에 속하는 이들은 '가시화되지 않을 특권'을 누린다. 언제나 '이름'이 붙여지고 '특정한 방식으로 가시화'되는 쪽은 소수자이다(기시 마사히코, <단편적인 것의 사회학> 참조). 법은 아니지만 법만큼이나, 혹은 법보다 더 강력하게 우리 삶에 무엇을 허용하고/금기할지 결정할 힘을 가진 문화와 관습속에서 그러한 소수자에게만 집중되는 조명은, 그들의 권한과 행동양식,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받는 대우의 방식을 일반인들의 그것과는 다르게 만든다.

영화에서 "고졸사원"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들은, "일반사원"과는 다르게 붉은 투피스 유니폼을 입는다. 업무내용 역시, 주요한 업무를 하는 이들을 보조하는 데 그친다. 오전 사무실 청소·담배 심부름·커피 타기 등 업무라기에는 애매한 성격의 일들을 수행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학력을 매개로 한 직급은 회사 내의 뿌리 깊은 위계를 구성하는데, 극중에서 자영에게 끝없이 업무적 도움을 받는 최 대리는 "선배님"이라는 호칭으로 자영을 불렀다는 이유로 부장에게 큰소리를 듣는다. 위아래가 있어야 한다며, 고졸 사원인 선배 이자영을 아랫사람으로 대할 것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회사 안에서의 직접적인 차별과 배제, 그러면서도 상대적으로 일정 안정된 고용 환경은 영화를 구성하는 중요한 특징들이다. "전교 1~2등씩 했던" 상고 출신의 능력 있는 젊은 여성노동자들은 이 구조 속에서 한계와 안정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극 초반부에는 '토익 점수'를 통해서 '사원' 이상으로 승급할 수 없는 고졸사원들도 '대리'까지는 진급할 수 있도록 한다는 중요한 설정이 있는데, 이로 인해 출근 전 새벽시간에 이들 고졸사원들은 회사에 나와 다 같이 토익 수업을 듣게 된다. 차별적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한 일종의 (집단적) 자기계발 전략인 셈이다.

'고졸'에 대한 낙인, 그리고 그것을 통해 보여주는 노동의 위계는 90년대라는 영화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하는 지점이다. <삼진토>의 주인공들을 2020년인 현재 우리는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그들이 수행하던 업무는 IMF를 기점으로 노동시장의 재편을 통해 대부분 회사 밖으로 외주화된 노동이 되거나 계약을 통해 매번 서로 다른 사람들이 채우는 노동이 되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싫어하던 회사 소속의 유니폼 역시 더 이상 입지 않는다. 대신에 변화한 구조 안에서 정규직과 계약직, 또는 파견직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는 더욱 보이지 않게 된다. 단순히 고용 구조만의 일은 아니다. 외주화라는 형식의 고용구조 속에서는 일 자체도 파편화된다. 그리고 그 일을 하는 노동자들의 교류와 집단적인 힘 역시 약화될 수밖에 없다.

능력주의는 어떻게 되돌아오는가

그러나 영화는 이들을 보조적인 인력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인상적인 장면들은 회사에서 어떤 사건이 터질 때, 상무에서 과장으로, 과장에서 부장으로, 부장에서 대리로, 대리에서 "말단사원"으로 이어지는 카메라의 시선이다. 영화는 이 시선의 방향을 통해서 일에 대한 책임의 구조가 어떻게 권한이나 직책과 정반대 방향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드러낸다.

한편 이자영의 캐릭터는 휴일이면 삐삐로 쉴 새 없이 업무 연락이 오고, 스스로 회사의 비리를 파헤친다. 이는 마케팅 기획 능력이 탁월한 정유나(이솜)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가지고도 발언권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원에게 아이디어를 뺏기는 장면이나, "룸살롱 영수증 메꾸는" 일을 하는 보람이 사실은 "전국 올림피아드 출신 수학천재"라는 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오히려 직책만 있고 능력은 없는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이들의 상사인 일반사원들이다.

영화는 내내 이 차이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세 주인공의 능력을 드러낸다. 어찌 보면 회사 내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학력이 실제 업무능력과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일면 통쾌하게 사회가 기준으로 삼는 조건들의 허구성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세 인물의 능력을 강조하는 장면, 그리고 '토익 공부'를 통해 결국 이들이 대리 진급에 성공하고 유니폼을 벗어던지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이들이 차별적 구조 자체에 맞서기보다는, '토익 공부'로 학력에 가려진 개인의 재능과 능력을 발휘해 구조에 성공적으로 적응해가는 방식으로 문제를 봉합한다.

영화는 이렇게 90년대, 그리고 X세대라는 문화적 흐름의 대표성에서 배제된 고졸, 여성, 노동자들을 불러오면서 90년대에 새로운 얼굴을 덧씌우는 한편, 다시 능력주의 서사를 불러온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지안님이 작성하셨습니다. 또한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1월호에도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삼진그룹영어토익반, #고졸_여성노동자, #고졸_노동차별, #능력주의, #페놀유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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