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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친구는 말했다. 다른 애들 가방을 좀 보라고.
 어느날 친구는 말했다. 다른 애들 가방을 좀 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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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주변머리도, 눈치도 없는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 쓰기 시작한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가방을 6학년 때까지 메고 다닐 정도. 가로가 긴 직사각형, 초인종처럼 꾹 누르면 위로 툭 튀어 올라가는 버클이 정면에 달린 그것을 말이다. 실내화 가방은 한술 더 떠 유치원 이름이 크게 적혀 있었다. 

동네 어른들이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어린이라며 입 모아 칭찬할 때 뭔가 눈치를 챘어야 하건만, 그저 좋은 말이겠거니 하고 흘려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짝꿍이 머뭇거리면서도 매우 진지하게 내게 물어왔을 때, 나는 세상이 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저기... 너는 왜 아직도 그 가방을 메고 다니는 거야? 난 네가 이상한 아이이거나 집이 많이 어려운 줄 알았어. 그런데 너 그렇지 않잖아. 왜 그런 거야?"

나는 그저 가방이 구멍 나거나 망가지지 않았고 어제도 멨으니 오늘 또 멘 것뿐,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 가방에 남다른 애착이나 사연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이게 그렇게 이상한 거냐고 소심하게 반문하자, 친구는 말했다. 다른 애들 가방을 좀 보라고. 너와 같은 건 하나도 없다고.

나만 '이상한 사람'이었던 걸까 

그날부터 며칠간 전교생의 가방만 보고 다녔는데, 정말이었다. 꾹 누르면 툭 튀어 나가는 버클에, 만화 캐릭터가 그려진 네모반듯한 가방을 메는 고학년 아이는 한 명도 없었다.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다 비슷한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어느새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스포츠 브랜드의 말랑한 배낭들이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우리 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는 것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언니는 이미 가방 여러 개를 두고 기분에 따라 바꿔 쓰고 있었는데, 그중 직각의 캐릭터 가방 같은 건 없었다. 심지어 두 살 어린 남동생마저도.

내가 아는 엄마는 늘 알뜰했고 아무리 저렴한 것이라 해도 허투루 돈을 내주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이상, 나도 더이상 네모난 가방을 멜 수는 없었다. 혼날 각오를 하고 용기를 한껏 모아 쭈뼛쭈뼛 가방을 사 달라고 말했을 때, 즉각 튀어나온 엄마의 답에 나는 한 번 더 충격을 받았다.

"신발 신어. 지금 바로 사러 나가자."

그날, 평범한 백팩을 손에 쥐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펑펑 울었다. 엄마는 사달라기에 사줬는데 대체 왜 이러는 거냐고 물었지만 뭐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왜 평소처럼 멀쩡한 물건이니 더 쓰라 하지 않느냐고, 설마 엄마가 보기에도 저 가방을 메고 다니는 내가 이상했던 거냐고 따질 수도 없고 말이다.

언니도 우는 내게 다가와 새로 산 가방이 혹시 마음에 안 드는 거냐고, 원한다면 자기 것과 바꿔주겠다며 통 큰 제안을 했지만 나는 더 서럽기만 했다. 캐릭터 가방이었다면 내가 아무리 울고불고 매달려도 안 바꿔 줄 거면서. 새 가방이니 바꿔 준다는 게 분명했다.

지금 다시 생각하면 폭소가 터져 나오지만 그때는 웃음기 하나 없이 심각했다. 뭐랄까. 누구도 대놓고 놀린 적은 없지만 나 혼자서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어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한 것 같았다고 해야 하나. 꽤나 부끄럽고 서러웠던 기억이다. 

흥분이 가라앉은 뒤에는 중학교 입학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는 것에 크게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중학교에도, 아니 어쩌면 대학교에도 그 가방을 메고 갔을지 모른다. 당시의 나는 내가 더이상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게 된 것에 만족했다. 

하지만 나이 들수록 느끼는 것은 내가 과연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나는 어떤 부분에서 분명 이상하다. 그런 점은 한둘이 아니지만 예상할 수 있듯, 특히 패션에서 그렇다. 파자마를 입고 학교에 간 적도 있는데, 튀려고 그런 게 아니라 몰라서 그랬다.

모두가 이상해서, 한없이 재밌는 세상 
 
타인의 다름 앞에서, 오히려 우리가 닮은 꼴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싶다.
 타인의 다름 앞에서, 오히려 우리가 닮은 꼴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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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하면 이상한 건 나뿐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모두 조금씩 이상하다. 손톱깎이가 무섭다며 가위로 손발톱을 깎는 A(난 그게 더 무섭다), 이불 속에 다 먹은 커피 캔이 굴러다닐 정도로 청소에 관심 없지만 욕실 하수구의 머리카락 몇 올에 경악하는 B(이불 속 깡통이 더 놀랍지 않나).

향이 강한 음식은 질색이라며 오이도, 버섯도 거부하지만 깻잎 앞에서 사족을 못 쓰는 C(깻잎은 한국의 허브 아닌가!), 횡단보도만 보면 그 방향이 아니어도 건너고 싶어진다는 D도 내 사랑스러운 벗이다(대체 왜…). 우리는 이렇게 다 이상하다.

내 지인들이 행여 기인으로 보일까 싶지만 천만의 말씀. 몇십 년씩 곁에 두고 본 덕분에 알게 된 개성일 뿐이다. 살아가면서 다들 몇 번쯤은 누군가에게 이상하단 소리를 들어보지 않던가. 특히 커플의 경우 파트너의 이상한 점에 대해서 몇 가지쯤은 쉼 없이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러고 보면 조금도 이상하지 않은, 한없이 평범한 사람이 존재하기는 할까. 따지고 보면 평범하다는 규정 자체가 너무나 모호하다. 외적인 것이든, 내적인 것이든 내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구분이다. 그저 나와 다르거나, 다수에 속하지 않을 뿐. 

비건을 지향하며 채식에 대한 공개적인 글을 쓰고 나면 종종 '이상한 채식인' 때문에 겪어야 했던 불편을 성토하는 댓글이 달린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융통성 있게 좀 넘어갈 것이지, 그렇지 않고 까다롭게 굴었던 채식인들에 대한 불만이다. 

그 상황이 안타까우면서도, 나는 살짝 반가운 마음이 든다. '이상한 채식인'들 때문에 누군가는 채식에 대해 아주 잠시라도 생각을 해봤을 테고, 나는 그 덕분에 조금 더 편해질지도 모른다. 고백하건대 내가 '융통성 있게' 구는 것은 용기가 없어서지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다.

뭐가 됐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는 단서는 너무 당연하지만 모호할 때도 있다. 식당에서 재료를 자세히 물어보는 것, 잘못 나온 음식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민폐인가, 아닌가. 상황에 따라 민폐일 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상대의 다름을 얼마나 진지하게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지와 관련된 문제는 아닐까.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주 상기하려고 한다. 타인의 다름 앞에서, 오히려 우리가 닮은 꼴이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싶다. 이상한 부분은 다르지만 어딘가 이상하다는 사실로 닮았다. 얼마나 다행인가. 덕분에 세상이 한없이 재미있는 곳이 되었다. 

태그:#이상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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