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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 뉴스를 비집고, 급격히 떨어지는 출산율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론이 이 문제가 심각하다고 아무리 외쳐도 '애를 낳겠다'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왜 그런지 혹은 아이가 꼭 있어야 하는지 등 출산에 대한 각계각층 시민기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편집자말]
'아이가 넷'이라고 하면 다들 놀란다. 그 놀람은 힘들지 않냐는 걱정과 대단하다는 경외와 진심이 의심되는 부러움으로 이어진다. 대략의 레퍼토리를 가지는 이 같은 반응은 현실적 걱정과 상상 속 이상향을 거쳐 다시 눈앞의 현실로 돌아오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현실이라는 삶의 중력은 이렇게, 상상력보다 힘이 세다.

이는 꼭 다자녀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가 넷'이란 임팩트에 반응의 굴곡이 뚜렷할 뿐, 출산은 누구에게나 거대한 변화의 갈림길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변화 앞에 선 사람들이 어느 길을 택하는지는 통계청에서 발표한 저조한 출산율로 쉽게 알 수 있다.

결혼과 출산,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시대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하고 있는지 보인다.
▲ 출산율 통계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하고 있는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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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떨어지는 출산율. 이러한 통계가 나올 때면 여기저기서 큰일이라는 말들이 들린다. 다들 나라의 앞날에 걱정을 보태고 있다. 노인 인구 비율의 증가로 사회적 비용이 늘어난다는 걱정, 생산 가능 인구가 줄어 나라 경쟁력이 약해진다는 걱정 등.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임에도 여러 통계와 예측을 빌려와 걱정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래서인지 시대를 잘 만난(?) 나는 사람들에게 '애국자'로 불리고 있다. 나랏일을 걱정하긴 하지만, 촛불 행렬에 응원을 보내고 투표장에 발걸음을 옮긴 것 말고는 대단한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애국자라니. 역시 모든 것은 해석하기 나름이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고 외치던 시대에 이랬다면, 과연 나는 어떻게 불리고 있을까. 

아이 넷을 키우는 일은 적잖이 힘이 든다. 사실이다. 의무감 때문에 과한 힘을 쏟기도 한다. 시작하면 누구나 책임감을 느끼고 어쩔 수 없이 짊어지는 것들이 생긴다. 나야 계획이나 앞선 걱정을 하지 못해 이리 되었지만, 요즘 같은 때에 결혼은 물론이고 출산은 제법 큰 결단을 요구한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다고 하는데, 출산과 육아는 이 분야에서 단연 톱클래스에 든다. 천사 같은 아이는 잠과 여유 시간을 줄이는 흑마술을 부리고, 아이를 잠 재우기 위한 긴 시간 동안 내 안에 싹트는 답답함을 잠재울 줄도 알아야 한다. 다행히 아이의 존재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찬란했지만, 그럼에도 현실이라는 중력은 힘이 세고 지속적이었다. 아이를 바라보는 행복 가득한 눈에 순간순간 걱정이 내비치는 이유다.

재정적인 부침도 빼놓을 수 없다. 애국자라 그런지 풍족하지도 않다. 그리고 아이가 생기면서 느는 것은 입뿐만이 아니었다. 사람 하나를 들이면 입 하나 늘었다는 건 옛말이다. 먹는 양만으로 한 사람의 무게를 규정짓기엔 시대가 너무 많이 변했다. 20년 가량 무게감을 더해가는 추. 그게 바로 일반적인 자식이다.

아이 한 명을 키우는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맞벌이가 당연한 시대이니 더 강화되었다고 보는 게 맞겠다. 그리고 여기에도 당연히 돈이 든다. 돈을 벌기 위해 돈을 써야 하고 아이를 위해 아이와 떨어져야 하는 이 아이러니를 보면서, 누가 출산에 대해 쉬이 가타부타 말할 수 있을까.

결혼하고 애 낳으면 '얻는 것'과 '포기할 것'이 생기는데, '포기할 것'도 준비하지 못한 사람에게 왜 '얻는 것'을 포기 하냐고 누구도 감히 물을 수 없다. 남의 일은 그리 쉽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결혼과 출산이라는 큰 변화에 책임감 있게 신중히 대하는 그들에게, 어서 결혼해서 애 낳으란 무책임한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자연스런 흐름
 
사실은 아주 큰 바람
▲ 작은 바람 사실은 아주 큰 바람
ⓒ 남희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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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결혼 생각이 없었던 절대 품절되지 않을 남자였다. 많은 인연이 좋았고 나의 시간을 효율적으로 낭비하는 것을 기꺼이 즐겼다. 새해를 뜬 눈으로 맞이하지 않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고 경험해 보기 위해 작심삼일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 내가 결혼을 하고 생각만으로도 부담스러웠던 자식을 넷이나 가진 것은, 순전히 그 당시의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시대와 환경의 탓이란 얘기다.

어떠한 회유도 누구의 겁박도 없었다. 논리적인 판단이나 산술적 계산이 우선하지도 않았다. 그저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뿐이다. 지방에서 직장을 구했고 부동산이 저렴했다. 당시의 상황이 내게 아이가 좀 많아도 될 빌미(?)를 제공한 셈이다. 시대가 영웅을 만든다고 나도 그렇게 타칭 애국자가 됐다.

결혼 생각도 없었던 내게 네 아이가 생겨난 것은 오롯이 그런 흐름의 연속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당시엔 출산 장려 정책이라 할 만한 것도 미미했고 지금처럼 알짜 정보를 얻기도 요원했지만, 아이를 낳는 것이 자연스러운 분위기였다. 지금처럼 엄청난 결단을 요구하는 일까지는 아니었다.

누군가는 걱정이나 이상향 때문에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고, 누군가는 결이 다른 걱정이나 이상향 때문에 출산을 결심하고 육아를 이어 나간다. 그리고 이 상반된 이유는 어느 순간 180도로 뒤바뀌기도 하고, 다짐과 계획이 있었던들 애초에 뜻대로 되지도 않는다.

출산과 육아가 특별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사회가 되길 바란다. 그러고 보면 누구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해 출산하면 이것저것 지원하겠다는, 그간 큰 효과를 보지 못한 정책만 내는지도 모르겠다.

보상보다 더 깊이 고민해야 할 일
 
'아이가 넷'이라고 하면 다들 놀란다. 그 놀람은 힘들지 않냐는 걱정과 대단하다는 경외와 부럽다는 진심이 의심되는 부러움으로 이어진다.
 "아이가 넷"이라고 하면 다들 놀란다. 그 놀람은 힘들지 않냐는 걱정과 대단하다는 경외와 부럽다는 진심이 의심되는 부러움으로 이어진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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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산율이 떨어진다 걱정하고 출산을 장려하겠다고 대책을 내놓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출산이 결코 결심으로 다가서거나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공감하는 게 아닐까 싶다. 결심에 대한 보상이 아닌 자연스레 출산의 욕구가 차오르게 하는 환경이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아직 안정을 찾지 못한, 길게 보아도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 감당할 자신이 없는 누군가에게 결단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 아닌, 자연스럽게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마음이 생기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비록 방법은 묘연하지만 기막힌 묘책이나 큰 변화를 이끌 작은 변화가 많이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미소 짓고 "너 때문에 산다"는 말을 하게 되는 경험. 사뭇 이상하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이 경험을 원하는 누구나 고민하고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다.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를 받아 들고 고민하는 일 없이 모든 선택이 오롯이 한 개인의 몫이 될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개인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그림에세이, #출산율, #걱정보단이해를, #대책보단공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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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렀지만 넌 또 모르잖아"라는 생각으로 내일의 나에게 글을 남깁니다. 풍족하지 않아도 우아하게 살아가 보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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