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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13일 오후 2시 44분]

부산을 대표하는 대중가요로는 어떤 노래를 들 수 있을까? 무엇보다 조용필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1순위에 들 것이고, 야구 팬이라면 <부산 갈매기>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고전 작품을 선호하는 이들에게는 남인수의 <울며 헤진 부산항>이나 <이별의 부산정거장>도 빠질 수 없는 곡이다. 서울 다음으로 많은 대중가요의 배경이 된 부산이므로, 그 대표 노래를 고르는 일이 이처럼 쉽지는 않다.

그러면 그 많은 부산 관련 대중가요 가운데 최초 작품은 또 어떤 노래일까? 2015년에 간행된 <부산의 대중음악>에서는 1933년 발표곡 <낙동강>을 가장 앞서는 부산 노래로 꼽은 바 있다. 제목과 가사에 낙동강, 구포 등이 실제 등장하므로 <낙동강>이 부산과 관련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부산'이 제목이나 가사에 직접 등장하지 않은 것은 아쉬운 점이다. 더구나 1933년 당시 구포는 행정구역상 아직 부산에 속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제목에 부산이 직접 표기된 경우는 사실 <낙동강>보다 앞서 확인되는 곡이 있다. 1929년 간행 <이팔청춘창가집>에 수록된 <부산의 심중(心中)>이라는 노래인데, 가사가 무려 열두 절로 구성되어 있다. <부산의 심중> 가사는 1919년 부산에서 순남과 복순, 두 남녀가 동반 자살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심중'이라는 말도 '마음속'이 아니라 정사(情死)를 뜻하는 일본식 한자어이다.

가사 내용이 실화인지 허구인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부산의 심중>이 음반으로 제작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따라서 그 곡조가 어떠했는지는 현재 확인할 길이 없다.
 
일간지에 게재된 <부산 노래> 광고
 일간지에 게재된 <부산 노래> 광고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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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아쉬움과 미비함을 고려한다면, 부산 대중가요의 첫 자리는 아무래도 1935년 발표작 <부산 노래>에 돌아가는 것이 보다 타당할 듯하다. 제목에서부터 부산이 주요 소재임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가사에서도 당시 부산의 경관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곡이기 때문이다. <부산의 대중음악>에서도 <부산 노래>를 간단히 언급하기는 했으나, 당시엔 자료가 확보되지 않아 더 이상 자세한 소개를 하지 못했다.

현해탄 안개 속에 ○○○ ○고/ 오륙도 물결 따라 갈매기 난다/ 에헤요 에헤요 데헤야/ 조선의 문호 부산이로구나
용두산 봉우리에 ○○이 쌍쌍/ 꽃피는 시절이면 원앙도 쌍쌍/ 에헤요 에헤요 데헤야/ 청춘의 도시 부산이로구나
○○○ 흘러가는 ○○○○○/ 흘러서 ○○○○ ○○○○○/ 에헤요 에헤요 데헤야/ 문명의 항구 부산이로구나
해운대 온천에서 ○○도 많고/ ○○○ ○○○○ ○○○○○/ 에헤요 에헤요 데헤야/ 삼도의 자랑 부산이로구나


다행히 최근에는 <부산 노래> 음반과 가사지 등이 공개되어 보다 구체적인 노래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오륙도, 용두산, 해운대 등 부산 명소들이 가사에 등장하는 것을 알 수 있고, 부산에 대한 예찬이 '조선의 문호', '청춘의 도시', '문명의 항구', '삼도의 자랑'으로 이어지는 것도 볼 수 있다.

울산에서 태어났지만 부산에서 성장기를 보낸 가수 고복수가 기생가수 이은파와 함께 녹음한 <부산 노래>는 1935년 8월 신보로 한국인 이철이 운영하던 오케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작곡자 손목인은 <타향(타향살이)> 등을 만든 당대 유명 작가였고, 가사를 쓴 염일화는 1935년 당시 부산에 거주하고 있었던 일반 시민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부산 노래>가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한 가사 공모를 통해서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이다.
 
<부산 노래> 가사지
 <부산 노래> 가사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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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1월 오케레코드는 '조선 10대 도시 찬가' 가사 현상모집을 알리는 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했다. 2월 말까지 진행된 공모 결과 10대 도시 중 부산, 목포, 평양 관련 작품이 당선되었고, 실제 노래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8월 <부산 노래>에 이어, 9월 <목포의 눈물>, 10월 <평양 행진곡> 음반이 차례로 발매되었다. <목포의 눈물>은 목포 출신 가수 이난영의 대표작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노래이다.

그런데, 다른 때도 아닌 1935년 연초에 대대적인 가사 공모가 있었던 데에는 지금껏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나름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로 전 해인 1934년에 한국 지역을 소재로 해 일본인들이 만든 노래가 대거 발표된 바를 의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부산의 경우 1934년 여름에 <부산 고우타(小唄)>, <부산 온도(音頭)> 음반이 발매되었고, 목포나 평양도 사정은 비슷했다.

1934년 봄 한국 거주 일본인들이 참여한 가사 공모를 거쳐 만들어진 이들 일본 대중가요는, 1939년 12월 아키히토 왕자(2019년에 퇴위한 아키히토 일왕) 출생을 축하하는 의미를 담고 있기도 했다.
 
<부산 온도> 음반 딱지
 <부산 온도> 음반 딱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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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 보자면, 1934년 봄부터 1935년 가을까지 지역을 소재로 한 가사 공모 대결, 노래 발매 대결이 한일 간에 펼쳐졌던 셈이다. 80여 년이 지난 지금은 <부산 노래>도, <부산 고우타>나 <부산 온도>도 모두 잊힌 노래가 되었지만, 그 무렵에는 상당한 민족적 긴장감 속에 그런 곡들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노래 대결의 결과는 음반 판매 기록 같은 것이 남아 있지 않으므로 확실하게 알기는 어렵다. 다만 부산이 아닌 목포에서는 분명한 승자가 나왔으니, 바로 앞서 본 <목포의 눈물>이다.

부산 대중가요에는 이처럼 첫 작품부터 많은 사연이 얽혀 있었다. 식민지 개항장, 전시 임시수도, 대한민국 제1의 항도 등 부산 근현대사의 궤적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부산은 또 많은 관련 작품이 만들어진 데에 그치지 않고, 1948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대중가요 생산지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부산 관련 대중가요와 지역 음반회사의 역사적 전개는 향후 깊이 있게 조명되어야 할 내용이다.

태그:#부산 노래, #고복수, #문호월, #오케레코드, #이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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