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1.10 11:45최종 업데이트 21.01.10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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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있었다. 그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 생존과 꿈의 경계에 섰다. 같은 경계선을 무난히 혹은 우여곡절을 거쳐 넘은, 같은 시대에 던져진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그는 경계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의 폭력에 의해서든, 피하고 싶었지만 피하지 못한 불운에 의해서든 그의 죽음은 역사의 기록이자 시대의 고발이다. 

해방을 앞두고 이역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부터 2020년의 어느 청년에 이르기까지, 지속가능바람 저널리스트들은 청죽통한사(청년의 죽음으로 통찰하는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 된 청년의 죽음을 취재했다. 청년의 시각에서 새롭게 작성한 '청년의 죽음'은, 그 죽음의 애도이자 더 나은 세상의 모색이다.[편집자말]

버스에서 일을 하는 버스 안내양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1961년 시내버스에 버스 안내양이 등장했다. 1920년대 버스의 도입과 함께 당시 시청 버스였던 '서울 부영버스'에 '버스걸'이란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가 광복이 되면서 자취를 감춘 버스 안내양이 되돌아왔다.

1961년 6월 17일 김광옥 교통부 장관은 시내버스 안내원을 모두 여자로 바꾸는 내용의 여 차장제 도입 방침을 발표했다. 5·16 군사 쿠데타 이후 사회 기강을 확립하려고 한 정부 시책의 하나였다. 이에 따라 1961년 8월 1일 시내버스의 안내원이 남자 안내원에서 여자 안내원으로 교체되었다. 교체의 근거로 네 가지가 제시되었다.


첫째 선진국에서도 여객 안내는 서비스업이므로 모두 여성이 담당하고 있다. 둘째 거친 남자보다는 상냥하고 친절한 여자들에게 승객을 안내하도록 함으로써 명랑한 시민 교통을 이룩하여야 한다. 셋째 남자 안내원들이 기름 묻은 작업복으로 안내를 하는 거친 태도를 일소케 하여 서울의 품위를 높여야 한다. 넷째 여성들의 유휴노동력을 개발하여 산업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한다.

여자 안내원으로의 교체는 1961년 서울·부산·대구 등 대도시를 시작으로 점차 중소도시로 확대되었다.

상경하는 여성들

송안숙은 버스 안내양이 도입된 해에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남동생 둘과 함께 농사를 지었다. 국민학교 6학년 어느 날 아버지가 노름으로 논 열두 마지기를 하룻밤에 탕진했다. 가족은 바닷가 마을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걸핏하면 술주정을 하며 "딸년들 필요 없다"라고 말했다. 오기가 생긴 안숙은 '열 아들 안 부러운 딸이 되겠다'라고 결심하며 자기 손으로 두 남동생을 공부시키리라 다짐했다.

중학교는 가지 못했다. 공장에 취직해 돈을 벌었고 서울에 올라와 식모 생활을 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다가 결국 택한 직업이 버스 안내양이었다. 직장은 경기도 김포에 있는 김포교통이었다. 면접 날 김포교통 사람이 문제를 냈다. "35 곱하기 7은?" 그때 성인 요금이 35원이었다. 질문 여섯 개에 바로 정답을 맞힌 안숙은 취직이 됐다. 안숙은 130번과 41번 버스를 탔다. 김포에서 서울을 오가는 버스였다.

1960년대 이촌 현상은 도시화와 산업화의 과정이자 그 결과였다. 선 성장 후 분배에 입각한 경제성장 논리는 저임금과 저곡가 정책으로 나타났으며 공업화 정책은 도시를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촌 노동력의 이농‧탈농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실제로 1960년과 1966년 사이와 1966년과 1970년 사이 총인구 증가율이 각각 2.6%, 1.9%이었던 데 비해 도시 인구의 증가율은 4.1%, 6.1%를 기록했다.

많은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이 없는 어린 여성을 위한 일자리는 많지 않았다. 산업화에 따라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결국 이들은 저임금의 임시직 노동자로 전락했다.

당시 많은 여성이 국민학교와 중학교 졸업 후 도시로 올라와 버스 안내양이 되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61년 1만 2560명이던 안내양은 1971년 3만 3504명, 1970년대 중반에는 약 5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급격한 증가세는 버스 안내양이 학력과 나이 제한이 적은 직종이고 1960년대 초반 남성 안내원이 여성 안내원으로 교체되면서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증명 사진을 붙인 이력서를 제출하고 간단한 산수를 할 수 있으면 누구나 안내양이 될 수 있었다.

개문발차
   

서울시 시영버스 증차 발대식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정경자는 18살의 나이에 버스 안내양으로 취직했다. 새벽 5시에는 출근해 버스에 올라타 있어야 했기에 매일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났다. 당시 버스에는 문이 중간에 하나만 있었다. 문 하나로 사람들이 타고 내렸기 때문에 기사가 올라타는 승객의 차비를 직접 받을 수 없었다. 경자는 다른 안내양처럼 승객의 차비를 받았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추면 내리는 승객들로부터 차비를 받고 버스 옆구리를 탕탕 치며 "오라이"(출발)라고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버스 안내양 제도가 도입된 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1961년 9월 21일 서울 상도동 상도극장 정류장에서 오전 9시에 경자가 추락했다. 문을 제대로 닫지 않고 출발한 버스에서 굴러떨어진 것이었다. 경자는 병원으로 옮긴 지 3시간 만에 죽었다.

버스 안내양의 노동 환경에는 크고 작은 위험이 도사렸다. 발 디딜 틈 없는 만원 버스 시절 개문발차(開門發車)라는 말이 통용되었다. 문을 연 채 버스가 출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승객이 만원이었다는 말이다. 몰려드는 승객들을 차 안으로 간신히 밀어 넣고 안내양은 문을 닫지 못한 채 버스가 주행하는 동안 버스 출입구 손잡이에 의지해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다음 정류장까지 버텨야 했다.

비집고 들어갈 공간이 없어 버스를 타지 못하게 된 승객 중에는 간혹 버스 안내양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타는 사람도 있었다. 승객이 다 탔는데도 버스 정류장에 몇 분이라도 서 있으면 정차 위반으로 단속했기 때문에 운전사는 승객이 탄 것을 확인하면 버스 안내양이 탔는지 못 탔는지 확인할 겨를 없이 바로 출발했다. 이 때문에 버스 안내양이 버스에서 떨어져 크게 다치거나 사망하는 사고가 빈번했다.

운행 중 일어난 사고에 대해 응당 회사가 치료비를 내야 했지만, 버스 안내양의 잘못으로 사고가 일어났다는 명목으로 대부분 안내양 본인이 치료비를 부담했다. 사고로 오랫동안 병원에 있으면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직업 특성상 많은 버스 안내양이 요통에 시달렸다. 앉을 수 있는 곳이 없었기에 일단 버스에 타면 퇴근할 때까지 서 있어야 했다. 1982년 12월부터 1983년 1월에 걸쳐 부산 시내 50개 버스회사 중 5개 회사에서 근무하는 버스 안내양 192명을 조사한 결과 이 가운데 163명이 요통을 경험했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거나 오랫동안 서 있을 때 혹은 허리를 굽힐 때 요통을 느꼈다고 응답했으며 다수가 거의 매일 요통을 느꼈다.

1975년 서울시의 '안내원 1일 근로형태 분석'에 따르면 버스 안내양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8시간 27분이었다. 취침 4~5시간과 식사 30분~1시간 정도를 제외한 모든 시간을 버스에서 보낸 것이다. 보통 이틀 혹은 사흘을 일하고 하루를 쉬었다. 그러나 사람이 모자랄 때는 닷새씩 연달아서 일했다. 어떤 이들은 한 달에 서너 번만 쉴 수 있었다. 항상 잠이 모자라고 시간에 쫓겼다. 이러한 노동의 대가로 버스 안내양이 받은 급료는 간신히 생계를 유지할 정도였다.

버스 안내양이 처음 생겼을 때부터 한동안 그들은 월급제가 아닌 시간제로 급료를 받았다. 1966년에는 일당으로 140~160원 정도를 받았다. 소비자 물가지수 기준으로 1966년의 1원이 2020년의 34원에 해당하므로 현재 물가로 치면 버스 안내양은 하루 18시간 노동의 대가로 약 5164원의 일급을 받은 것이다.

이후 일당이 올라 1974년 버스 안내양의 월급은 최고 1만 5000원이었다. 같은 해 자장면 한 그릇이 200원이었으니 월급을 받아 짜장면 75그릇을 사 먹으면 한 푼도 남지 않았다. 소비자 물가지수를 반영해 계산하면 1974년의 1원은 2020년의 13원에 해당하므로 현재 기준으로 20만 원이 채 되지 않는 돈을 월급으로 받은 것과 같다.

삥땅
 

시내버스 종점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버스 안내양의 적은 보수는 그들 안에서 소위 말하는 '삥땅'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저는 올해 19세인 여차장입니다. 저는 18시간이라는 긴 시간의 노동에 허덕이고 있습니다만 굳세게 살고 있습니다. 그 힘을 저는 일하는 날 얻어지는 300원씩의 부수입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저희들 세계에서는 '삥땅'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매일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습니다만 그 '삥땅'이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 저는 영원히 교회와 등져야 합니까? 저는 정말 죄인입니까?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어느 버스 안내양의 편지 한 통을 계기로 1970년 4월 28일 기독교계와 한국노사문제연구소는 '삥땅에 관한 심포지엄'을 열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은 고작 1만 800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이마저도 식대나 각종 잡부금을 제외하면 겨우 6000원 내외를 실질적인 임금으로 손에 쥘 수 있었다. 이때 쌀 한 가마의 값이 6만 320원이었다. 월급 6개월 치를 한 푼도 쓰지 않고 모두 모아야 겨우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었다.

버스 안내양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서 조금씩 돈을 숨겼고 그 부수입에 의존해 가까스로 그들의 삶을 영위했다. 이날 심포지엄에서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는 "누구나 공정한 보상을 받을 권리가 있으니 이런 상황에서 삥땅은 죄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버스 회사는 '삥땅'을 빌미로 버스 안내양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버스 안내양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열악한 노동환경도, 또래 여학생에게 느끼는 열등감도, 술주정하는 남자 승객의 추근거림도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삥땅'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한 가혹행위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직접 승객에게 버스비를 받는 구조였기 때문에 도둑 취급을 받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날 번 돈을 입금실에 넣고 수입과 지출을 적은 일보를 차주에게 갖다 주는 모든 일은 버스 안내양의 몫이었다. 승차 감시원의 승객 계수와 안내양의 입금액 사이에 차이가 나면 그 차액을 버스 안내양의 월급에서 차감하는 것을 당연시했고 심지어는 돈을 숨겼다며 알몸 수색을 하기도 했다.

1966년 10월 19일 동화여객 소속 버스 안내양 권희진은 합숙소 사감으로부터 몸을 수색당했다. 이때 현금 200원이 나왔고 회사는 이를 희진이 훔친 돈으로 여겨 심한 욕설과 매질을 했다. 이튿날 오후 3시 희진은 승객을 태워 시청으로 가던 중 노량진 버스 정류장에서 도망쳐 나와 한강에 투신했다. 그의 나이 열여덟이었다.

1978년 10월 13일 삼화상운 버스 안내양 강미숙은 오전 8시경 버스를 타고 근무하던 중 서울시경(서울지방경찰청) 앞 정류장에서 음독 자살을 시도했다. 미숙이 자살시도 전에 가족에게 남긴 쪽지에는 회사 측으로부터 여러 차례 입금액이 적다며 부당한 대우를 받았고 이에 견딜 수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미숙은 자살을 시도하기 이틀 전에도 회사 측으로부터 입금액이 적다며 꾸중을 듣고 몸수색을 당했다.

미숙의 동료 안내양들에 따르면 삼화상운은 매일 일과가 끝난 뒤 안내양을 몸수색해왔으며 심지어 운행 도중에도 입금액이 예상보다 적으면 여사감이 방으로 데려가 옷을 벗기고 몸수색을 했다. 자살 기도 6일 만인 10월 19일 미숙은 스물네 살의 나이에 끝내 죽음을 맞이했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일상적 몸수색은 당시 사회 문제로까지 번질 만큼 심각한 인권침해이자 폭력이었다. 전체 버스 안내양 중 한 명이라도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오면 모든 버스 안내양이 도둑 취급을 당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회사는 도둑을 잡는다는 명목으로 형사를 동원하기도 했다. 1966년 8월 1일 버스 요금이 회수권 제도로 바뀌자 버스 회사들은 버스 안내양의 호주머니를 찢어 주머니에 아무것도 넣지 못하게 만들었다.

1977년 1월 부산 연산동 대창운수 버스 안내양 기숙사에서 화재가 일어났다. 2평짜리 방에 9명이 모여 살았는데 입구 쪽 난로에 붙은 불이 번졌다. 뒤쪽에 큰 창문이 있었지만 쇠창살이 박혀 있어 탈출할 수 없었다. 기숙사의 창문을 '삥땅'의 통로로 여겨 철책으로 막아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이 화재로 버스 안내양 5명이 숨졌다.

저항
 

서울시 시내버스 운송사업조합에서 실시한 버스 안내양 교육 ⓒ 서울기록원 서울사진아카이브

 
이러한 노동 환경 탓에 버스 안내양들은 다른 직종의 여성 노동자들보다 일찍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1964년 1월 16일 새벽 2시 서울 영등포구 신대방동에 있는 삼양여객 소속 버스 안내양 74명이 합숙소를 집단으로 탈출했다. 이들은 ▲ 매질을 일삼는 감독을 해고할 것 ▲ 하루 18시간 노동에 일급 50원을 인상할 것 ▲ 급식을 충분히 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회사는 이러한 요구에 폭력으로 응수했다.

1966년 7월 5일에는 서울승합 오류지점 소속 버스 안내양 27명이 임금 인상과 합숙소 여건 개선을 요구하는 등 자신들의 권리를 위해 싸웠다.

홍성원의 소설 <흔들리는 땅>에서는 부당한 몸수색과 인권유린에 맞서 투신한 버스 안내양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걔가 왜 지붕에서 뛰었지? 독해설까, 얼간이였기 때문일까? (…) 남숙이 내건 요구 사항이라는 것들도 그녀가 처음으로 내건 것은 아니다. 몸 뒤짐이 있고, 임금이 낮고, 일이 고되다는 것은 이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 그러나 그것이 시정되지 않을 것도 백번 뻔한 일인 것이다.

처음 버스 안내양이 도입되면서 사람들은 버스가 이전보다 훨씬 명랑하고 밝은 분위기가 될 것이며 유니폼을 깔끔하게 입은 안내원 때문에 청결함마저 느낄 것이라고 기대했다. 1961년 이 제도를 시행할 때 고분고분하고 얌전한 어린 여성을 버스 안내양으로 두어 사회 분위기를 쇄신하려는 공공연한 의도가 들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사회가 버스 안내양에게 '여성으로서' 고정된 성 역할을 기대하고 투영한 것을 의미한다.

1974년 YWCA가 공모한 근로 여성 생활수기에서 특등을 수상한 이명화 버스 안내양의 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야! 너거 차 몇 호고? 니 이름 뭐꼬, 건방지구나야. (중략) 손님이라 친절하게 그 손님 시키는 대로 운전수의 담배를 하나 얻어서 성냥과 같이 갖다 드렸습니다. (…) 손님, 요금 주이소. 이 가시나가 뭐라카노. 아까 전에 차비 안 주더나. 눈깔이 빠짓나? (…) 순간 나의 뺨에서 찰싹하는 소리가 나며 화끈 달아올랐습니다.

1966년 7월 6일 자 조선일보에서는 버스 안내양이 처우 개선을 위해 파업한 사건을 두고 '여차장들 태업소동'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발행했다. 기사에는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합숙소를 뛰쳐나오는 등 4시간 동안 법석을 떨었다"라고 적혀 있다. 버스 안내양이 정당한 노동자가 아니라는 당시 인식의 반영이다. 이러한 인식은 편견으로 이어진다.

버스 안내양에 대한 사회적 편견에서 비롯된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버스 안내양은 오랜 시간 서서 일하는 고된 노동을 하기에 임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한 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의사로부터 이것이 근거 없는 소문임을 확인받기까지 일반 시민뿐 아니라 버스 안내양 자신도 믿었던 소문이었다.

또한 운전사가 버스 안내양을 '하나씩 데리고 산다'는 소문과 버스 안내양은 성매매 현장으로 가기 쉽다는 낭설이 퍼졌고, 몸수색이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면서 피해자인 버스 안내양을 오히려 성적으로 타락한 대상으로 보기도 했다. 승객의 추행은 일상이었으며 운전수가 버스 안내양을 따로 호텔로 불러 성폭행한 사건도 일어났다.

1981년에 시민자율 버스가 도입되어 시범 운행되고 1983년부터 점차적으로 운행이 확대되면서 버스 안내양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하차 지점 안내방송이 시작되고 버스벨이 생기면서 버스 안내양의 필요성이 없어진 것이다. 안내원을 두도록 한 자동차운수사업법 33조의 해당 조항이 1990년 4월 삭제되면서 버스 안내양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젊은 세대는 버스 안내양이란 직업 자체를 모른다. 현대사에 20여 년 존재한 버스 안내양이란 직업은 어떤 흔적을 남겼고 어떤 의미로 기록될까. 그들의 가여운 존재가 기억될 수나 있을까.



- 황경서 : 고려대학교 철학과 3학년 재학.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하며 눈물과 정이 많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 안치용 : 청년협동조합지속가능바람 이사장. 사회책임과 지속가능성 의제화와 영화·문학·신학 공부가 관심사다. 바람저널리스트들과 '청죽통한사'를 함께 진행한다.
- 노수빈 :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4학년 재학. 영화와 소설을 좋아하며 무엇이든 읽고 보고 쓰는 것에 열심이다. 요즘은 늦은 밤 홀로 걷는 것에 빠져 있다.
- 박서윤 : 이화여자대학교 커뮤니케이션 미디어학부 3학년. 연극과 뮤지컬에 빠져 살았지만, 코로나 덕분에 새로운 취미를 찾아 나서고 있다. 지나치게 감성적인 탓에 이성적인 사람을 동경하지만, 정작 팍팍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아 이도 저도 못하는 중이다.
덧붙이는 글 <참고문헌>

1) 권경미, 「1970년대 버스 안내양의 재현 방식 연구 – 소설, 영화, 수기를 중심으로」, 『어문론집』, 제53집, 중앙어문학회, 2013, 281-307
2) 김정화, 「[특집] 1960년대 여성노동 – 식모와 버스안내양을 중심으로」, 『역사연구』, 제11호, 역사학연구소, 2002, 81-107
3) 손귀례, 김희용, 「일부 대도시 버스 안내양들의 요통 발생에 관한 조사 연구」, 『군진간호연구』, 제4권, 국군간호사관학교 군건강정책연구소, 1983, 113-132
4) 이명화, 「YWCA 근로여성 생활수기 특등-희롱의 굴욕도 참으며」, 『여성동아』, 2월호, 1975
5) 홍성원, 『흔들리는 땅』, 문학과지성사, 1978.
6) 김이정민, “사라진 “버스안내양””, <일다>, 2005.04.05.
7) 박종인, “[박종인의 논픽션 스토리 '大韓國人, 우리들의 이야기'] 하루 18시간, 승강구서 졸며 "오라이~" 그렇게 산업화시대 滿員버스를 굴렸다”, <조선일보>, 2015.03.27.
8) 유승훈, “부산 사람도 모르는 부산 생활사 <17> 오라이, 부산 버스와 안내양”, <국제신문>, 2014.05.07.
9) 유인경, “[100년을 엿보다](19) 버스 차장”, <경향신문>, 2010.03.07.
10) 임미리, “버스안내양, 가혹한 노동과 외로운 저항”, <에큐메니안>, 2015.07.07.
11) 정일선, “[여성칼럼] 버스 안내양의 귀환”, <영남일보>, 2018.12.20.
12) “여차장들 새벽시위”, <조선일보>, 1964.01.17.
13) “여차장들 태업 소동”, <조선일보>, 1966.07.06.
14) “여차장 투신자살”, <중앙일보>, 1966.10.22.
15) “몸수색 비관 안내양 자살”, <중앙일보>, 1978.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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