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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와 일제강점기 군산에는 경포(서래포구), 죽성포(째보선창), 옹기전, 공설시장(구시장), 역전새벽시장(도깨비시장), 팔마재쌀시장, 감독(감도가), 약전골목, 농방골목, 모시전 거리, 싸전거리, 객주거리, 주막거리 등이 있었다. 그러나 격동의 세월을 지나면서 대부분 사라졌다. 지역 주민의 삶과 문화, 역사가 오롯이 느껴지는 흔적들을 기록으로 남겨본다.[기자말]
 군산 서래포구(경포천) 입구
 군산 서래포구(경포천) 입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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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군산에는 지방의 세곡을 모아 경창(京倉)으로 올려보내는 진성창(고려시대), 군산창(조선시대) 그리고 해상방어 업무와 군산창 관리를 겸하는 군산진(조선시대)이 설치돼 있었다. 조선시대 이전부터 조운·조창은 물론 군사 거점으로 활용됐던 것. 이러한 군사적·지리적·경제적 여건은 장시(場市)와 포구들이 성장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개항(1899) 전후에는 뱃길을 이용한 '선상무역' 또한 활발했다. 보부상이 '육로행상'이라면 선상(船商)은 '수로행상'이었다. 금강, 만경강 연안 포구들을 내왕하며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중 군산의 경포(서래장터)는 충남 서천, 한산, 전북 전주, 태인, 만경 등 국내 각지와 교역이 이뤄지는 등 넓은 상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조선 3대 시장 중 하나이자 국내 상업의 중심지였던 강경(江景)의 문턱에 위치해서 금강을 통한 무역이 활발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군산에서 강경까지 수운 거리는 약 50km. 따라서 군산-강경은 일일생활권에 속했다. 객선으로 왕복 6시간쯤 소요됐으니 오전에 왔다가 몇 시간 볼일 보고 오후에 돌아갈 수 있었을 법하다.

보부상과 나그네 휴식처였던 주막
 
 김홍도의 ‘풍속도 화첩’ 주막 모습(출처 이뮤지엄)
 김홍도의 ‘풍속도 화첩’ 주막 모습(출처 이뮤지엄)
ⓒ 이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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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와 장터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주막(酒幕)이다. 도심 변두리나 시골 길가에서 나그네에게 술과 밥을 팔면서 잠자리를 제공하는 집을 말한다. 주로 시골 장터, 삼거리 길목, 고개 언저리, 나루터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있었다. 음식과 숙소를 함께 제공하지만, 식대만 받고 숙박은 무료였다는 점에서 요즘의 여관·여인숙과 구별된다.

주막은 마을과 마을 사이에 자리해서 길손의 휴식처 역할을 했다. 간판은 없었으나 위치나 주인의 특징을 따서 오동나무집·혹부리집·둑 아랫집·내(개) 건넛집, OO길갓집 등으로 불렸다. 온돌로 된 넓은 봉놋방에 여러 명이 묵었으며, 도착 순서에 따라 아랫목·윗목·마루를 차지했다. 그러나 지위가 낮으면 도착순서와 상관없이 마루로 밀려나야 했단다.

사진 자료와 옛 노인들 구술을 참고하면 규모와 구조가 다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모가 큰 주막에는 마구간, 곳간, 대청마루 등이 딸려 있고, 땔나무 장작을 쌓아놓는 나뭇간도 있었으며, 마당에는 널찍한 평상이 놓여 있었다. 반면 도심 변두리나 고개 언저리에 자리한 작은 주막들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바닥을 자기 집 마당처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주막마다 독특한 술맛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각 지방 환경은 물론 주모 취향에 맞게 술을 빚어냈기 때문. 술(가양주) 종류가 700여 종에 달했다는 기록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1909년 주세법 공포 후 집에서 술을 담그지 못하게 된다. 주막들도 주조장에서 받아 판매해야 했다. 그러니 저마다의 독특한 맛이 사라질 수밖에.

걸어서 이동하는 게 대중교통이던 시절, 장날에 맞춰 다니는 보부상과 길손들이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은 필수였을 터.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용했던 주막은 만남의 장소가 되기도 했고, 의병과 동학혁명군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또한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는 공간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장터, 포구, 고개 언저리 등에 많아
 
 1905년 군산 장날 풍경
 1905년 군산 장날 풍경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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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지역은 옥구, 임피, 지경(대야), 경포 등에 농어민과 상인, 수공업자들이 각자 상품을 교역하는 장시(場市)가 있었다. 또한 나포, 서포, 궁포(구암리), 경포, 죽성포 등 장삿배가 드나드는 포구에 2~4곳의 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발행한 <한국 지명 유래집>(2010)에 소개된 군산의 대표적인 옛 고개는 100여 개. 그중 콩나물고개, 팔마재, 창암재(도암치), 칠거리 고개, 다리실재(월곡치), 수레재(車嶺) 등에 주막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은파호수공원 주변(방아동, 사창골, 벌이마당 등)과 나룻리(나운동), 독점재(군경묘지 근처) 등에도 있었다고 전한다.

다리실재는 성산면에 위치하며 조선 시대 세곡을 운반하던 중요한 길목으로 알려진다. 벌이 마당(보리마당)은 등짐장수와 봇짐장수까지 모여들어 물건을 사고팔던 마당이란 뜻의 지명이다. 방아동은 벼를 찧는 방앗간이 있었던 자리이고, 사창골은 고려·조선시대 이곳에 사창(社倉)을 두고 방아를 찧어가곤 했던 마을로 전해진다.

나룻리는 지금의 나운동 지역으로 은파호수공원(미제방죽)이 생기기 전까지 만경강 줄기를 따라 올라온 배들이 물화를 실어 날랐다고 한다. 미제방죽 주변에 마을이 들어선 후에도 배가 드나드는 나루터여서 붙여진 지명이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한자로 표기되면서 '나운리(羅雲里)'로 바뀌었고 광복 후 군산시로 편입되면서 '나운동'으로 개칭됐다.

경포에 있었던 '주막거리', 그 위치는
 
 50~60년대 서래포구(경포)
 50~60년대 서래포구(경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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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주막 이야기는 창성동 '콩나물고개'가 등장하는 소설 <탁류> 등 여러 문헌에서 발견된다. 그중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94년 봄 전라도 답사여행을 떠난 서양 선교사들이 군산에 도착, 현감이 있는 임피에 들렀다가 그곳 주막에서 하룻밤 묵어갔다는 대목이다.

선교사들은 본부로 보내는 보고서에 '장터 사람들은 목을 축이고 쉬어가라고 하는 등 친절했으며, 이상한 여자들을 보려는 사람들이 방문에 구멍을 내는 바람에 종이로 막는 일을 계속했다'고 적었다. 선교사들은 주로 조랑말과 가마를 이용했는데, 논두렁이나 진흙길에 미끄러져 빠지기도 하고, 동학혁명군들과 함께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아래는 1896년 초여름 당시 옥구군 지경리(군산시 대야면) '만자산마을' 주민 여럿이 지금의 군산 수덕산으로 서양선교사들을 만나러 갈 때 서래장터(경포) 주막에 들러 탕반(湯飯) 주문해 먹었다는 내용이다.
 
"서래장터에 이르러 일행은 조 선달의 뒤를 따라 그가 단골로 드나드는 주막으로 들어갔습니다. (줄임) 일행은 서래장터 주막집 우물에서 서로 퍼주는 물로 얼굴과 팔, 다리도 깨끗이 씻고 몸매도 말끔히 가다듬었습니다. 아침 일찍 나오느라 조반도 제대로 못 했기에 시간은 좀 일렀지만, 점심을 먼저 들기로 하였습니다."- <호남 최초 교회설립자, 전킨 선교사>(전병호 지음)에서
 
책에는 "일행 모두 탕반을 시켰는데, 한 그릇에 5전짜리였고, 시장하던 참이라 맛있게들 들었다"는 대목도 나온다. 탕반은 설렁탕, 곰탕, 육개장 등의 총칭으로 푹 고아낸 사골국물에 밥을 말아먹는 음식을 탕반(국밥) 또는 장국밥이라 했다. 다른 음식과 달리 깍두기나 김치 한 가지만 있으면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게 특징이라 하겠다.

서래장터에는 외지 봇짐장수와 등짐장수들이 단골집을 정해놓고 이용할 정도로 주막이 많았다고 전한다. 1960년대 초 경포천 물길과 물문다리(경포교) 위치, 당시 노인들의 구술 그리고 옛 지도 등을 참고하면 지금의 중동 사거리와 공설시장을 잇는 구도로 건너편(물문1길~서래1길)에 '주막거리'가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참고문헌: 군산문화 13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중동사거리-공설시장 잇는 구도로(2010년 촬영. 배경은 서래산 자투리다)
 중동사거리-공설시장 잇는 구도로(2010년 촬영. 배경은 서래산 자투리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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