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주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 '원더우먼 1984'의 한 장면.

영화 '원더우먼 1984'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1984년 워싱턴,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다이애나 프린스(갤 가돗)'는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에 대한 마음을 간직한 채 고고학자와 원더우먼으로 활동하며 지낸다. 그런 그녀 앞에 거짓말처럼 죽었던 스티브가 살아 돌아온다. 다이애나는 감격적인 재회를 하면서도 직장 동료 '바바라 미네르바(크리스틴 위그)'와 함께 연구하던 드림 스톤이 진짜로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맥스웰 로드(페드로 파스칼)'가 드림 스톤을 악용해 세상이 혼란스럽게 하는 것을 목격한 그녀는 스티브와 함께 다시 한번 인류를 구할 여정에 나선다. 

DC 유니버스의 신작 <원더 우먼 1984>에서 가장 먼저 눈길이 닿은 곳은 제목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목에 연도가 포함된 흔치 않은 히어로 영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차 세계 대전을 다룬 <퍼스트 어벤져>나 쿠바 사건을 배경으로 한 <엑스맨: 퍼스트 클래스>만 하더라도 제목에 연도가 들어가지는 않았다. 이는 역으로 원더우먼의 두 번째 이야기가 과거의 시점을 배경으로 해야만 하는 이유와 지향점이 분명한 영화라는 의미였다. 1984년이 미국의 경제적 호황기를 상징한다는 점, 또 조지 오웰의 동명 소설의 영향을 받아 마냥 긍정적인 의미만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제목의 중요성은 충분히 짐작 가능한 대목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짐작은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틀리지 않았다.  
 
 원더우먼 1984

원더우먼 1984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원더 우먼 1984>는 직선적인 영화다.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눈 돌리지 않고 하나의 키워드와 메시지 위에서 나아간다. 이때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진실이다. 어린 다이애나가 장애물 경주에서 '진실 없이 어떠한 성취도 얻을 수 없다'는 교훈을 배우는 오프닝은 물론, 소망을 이루어 주는 드림 스톤을 둘러싼 세 주인공의 서사도 마찬가지다. 작중 드림 스톤은 소원을 이루어주는 대신 사람들의 현실, 곧 진실된 것을 파괴한다.

다이애나가 스티브와 재회하는 대신 능력을 잃고, 바바라가 능력을 얻는 대가로 인간성을 빼앗기며, 맥스웰 로드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지만 가족과의 관계가 어긋나는 이유다. 이처럼 다이애나의 로맨스와 빌런의 각성이 진실과 거짓, 현실과 허상이라는 키워드 안에서 펼쳐지다 보니 영화의 드라마는 긴 분량에 비해 응집력 있게 전개된다. 액션씬이 전작과 달리 팔찌, 검, 방패가 아닌 진실의 올가미라는 무기를 중점으로 구성된 것도 영화의 짜임새를 보강한다.  

특히 진실이라는 키워드는 1984년의 시대적 환경을 만나 더욱 빛을 발한다. 1984년은 미국 경제가 침체를 딛고 인플레이션이나 실업률 등의 지표를 회복했던 시기로, 소비자들의 소비가 급등하고 레이건 대통령이 미국의 아침이 왔다고 선언할 정도의 낙관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던 호황기였다. 그러나 빈부격차와 경제위기의 씨앗도 이 당시에 심어졌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1984년은 화려함 이면의 현실, 진실을 외면했던 시절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1984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사람들이 각자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진실이 아닌 허상을 맹목적으로 믿을 때 인류에 위기가 닥친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적절히 강조하는 도구로 활용된다.
 
 원더우먼 1984

원더우먼 1984 ⓒ 워너브라더스 코리아

 
맥스웰이 TV 생중계로 진실을 숨긴 채 전 세계 사람들의 소원을 이루어 주는 장면, 원더우먼이 TV로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장면도 1984년과 관련이 있다. 이를 조지 오웰의 < 1984 >와 애플의 맥킨토시 광고를 활용해 1984년이 함의하는 부정적 미래를 바꾸는 전개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매스 미디어를 장악해 사람들의 건강을 뺏고 세계를 통제하는 맥스웰은 소설 속 빅 브라더를, 맥스웰이 보여주는 허상 뒤에 숨은 진실을 보통 사람이 직시할 수 있다고 믿는 원더우먼은 광고 속 망치를 던지는 여성을 대신한다.

더 나아가 이는 가짜 뉴스의 범람으로 인해 진실을 알기 어려운 현재 시점의 관객들에게 각자 거짓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전달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처럼 원더우먼과 1984년의 만남은 영화가 소재와 주제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다. 

한편 과거로 돌아간 <원더 우먼 1984>는 한층 고전적인 히어로 영화로 완성되었다. 실제로 다이애나의 탄생, 성장, 각성을 충실히 따라간다는 평을 들은 전작보다도 한 발 더 나아간 대목을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새롭게 선보인 투명 비행기를 비롯해 티아라 던지기, 황금 독수리 갑옷 등은 원더우먼 원작 코믹스에서 상징적인 능력이나 물건으로 등장한 바 있다. 이러한 오마주의 향연은 70년대에 드라마에서 원더우먼을 연기했던 린다 카터의 카메오 등장으로 절정에 달한다. 

지엽적인 소품 외에 영화에서 묘사된 원더우먼의 특징 역시 최근의 흐름에서는 다소 벗어나 있다. 근래 히어로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이중 자아를 굳이 유지하지 않거나, 자신의 능력을 상징하는 슈트, 방패, 망치 등이 파괴될 정도로 심각한 고난과 정체성의 갈등을 경험하며 계속해서 성장해 나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 박물관 큐레이터인 다이애나와 여전사인 원더우먼은 모두 완벽한 인물로 묘사된다. 뛰어난 능력과 경력을 지닌 커리어우먼이자, 누구보다도 빠르게 맥스웰의 음모를 파악한 후 문제를 해결하며 민간인의 피해까지도 최소화하며 빌런을 무찌르는 히어로인 것이다. 그래서 이번 원더우먼은 과거 80년대 슈퍼맨처럼 관객들이 환상 속에서 선망하고 꿈꾸는 완전무결한 고전적 히어로처럼 보인다. 자존심 낮은 바바라가 여러모로 완벽한 다이애나를 선망하지 않을 수 없는 것과 같다.  
 
 영화 '원더우먼 1984'의 한 장면.

영화 '원더우먼 1984'의 한 장면. ⓒ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하지만 과거로의 회귀가 좋은 방향으로만 작동하지는 않는다. 스토리텔링과 연출 등도 과거로 되돌아갔기 때문이다. 우선 영화의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이 다소 안일하다. 1984년이라는 시대적 배경을 활용한 메시지 자체의 깊이와 의미는 훌륭하지만, 이를 보여주는 방식은 효과적이지 않다. 영화 후반부에 맥스웰과 전면으로 배치되는 원더우먼의 사상을 오로지 대사로만 전달하는 연출이 대표적이다. 마치 연설이나 훈계처럼 느껴지다 보니 메시지 내용과는 별개로 전달력에는 문제가 발생한다. 맥스웰이 원더우먼의 대사 몇 마디에 마음을 고쳐 먹는 것 역시 그의 심정이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게 느껴진다. 고전적인 히어로상을 제시하며 캐릭터의 서사를 쌓는데 집중하는 것도 완벽한 주인공의 입장에 이입하기가 어려워지는 역효과를 낳는다. 

또한 액션씬의 비중이나 묘사가 전작들에 미치지 못한 채 더 과거로 돌아간 듯 보이는 것도 문제다. 작중 액션 시퀀스는 크게 5개 등장하는데 그중 2개는 오프닝, 하나는 결말 즈음에 위치한다. 따라서 그 중간 2시간 분량에는 2개의 액션 시퀀스만이 할당되며, <원더 우먼 1984>가 엄연히 히어로 영화이자 액션 영화임을 고려하면 이처럼 빈약한 액션 비중은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 액션의 연출에서도 부족함이 엿보이는데, 대부분의 장면 전환이 느린 데다가 슬로 모션이 많이 사용되어서 템포가 자주 끊어진다. 심지어 올가미를 사용한 액션이 다수 등장하기에 전작들에서 보여준, 초인적인 힘과 속도감을 부각하는 박력 넘치는 장면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원더우먼의 과거로의 회귀는 작품의 구조를 강화하고 원작의 오마주를 통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명과 메시지를 전달하고 액션을 보여주는 방식에서의 암이 공존하는 선택이 된다. 

<원더 우먼 1984>는 제작부터 개봉까지 여러모로 큰 기대를 받았다. 우선 이 작품은 코로나 사태로 마블의 <블랙 위도우>가 개봉을 연기한 가운데 2020년 마지막을 장식할 히어로 영화이자 블록버스터였다. 전편인 <원더 우먼>이 단단한 드라마와 화려한 액션을 보여주었던 만큼, <버즈 오브 프레이>의 애매한 평가와 흥행으로 인해 흔들리던 DC 유니버스의 구세주로 여겨지기도 했다. 미국의 80년대 정취를 물씬 풍기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토르: 라그나로크> 등의 연이는 성공은 일련의 기대를 믿음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간 원더우먼은 명암이 분명히 갈린 모습으로 나타났고, 그렇게 뉴트로 열풍에 탑승하지 못한 <원더 우먼 1984>는 그저 체면치레를 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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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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