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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카오TV에서 방영 중인 웹드라마 <며느라기>의 인기가 심상치 않다. 만만치 않은 시월드와 '남의 편'인 남편과 갈등을 빚는 며느라기 민사린의 삶이 많은 여성의 공감을 얻고 있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가 <82년생 김지영>의 코믹 버전이라면 과언일까. 두 작품이 공통적으로 다루고 있는 건 대한민국에서 며느리로 살아가는 고충, 그리고 페미니즘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여성들의 삶을 더 고단하게 만들었다. 부부가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 가정폭력과 이혼이 증가했다는 통계를 보면 06년생 김지영의 삶도 그리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1993년, '63년생 공지영'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에서 이미 이렇게 지적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나의 딸도 엄마가 될 것이다. 혹은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예전에 그랬듯이 다 같이 공평하게 나이를 들어갈 것이다. 그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행복하기를, 의미로 가득한 생을 살기를, 욕실 앞의 발판처럼 자기 자신을 밟고 가게 하지 말고, 자신을 가꾸고 사랑하기를… 여성임을 만끽하기를, 그리하여 그 귀함을 바탕으로 다른 여성들의 삶과 연대하기를…"

-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공지영
 
'사진보다 미인'이라는 남성 간부의 말, 공지영의 일갈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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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공지영은 신작 에세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펴내며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모든 지영이들의 고된 삶을 고발한다. 지역적으로 보수적인 한 지역에 강사로 초대받아 도착한 공지영은, 지자체의 남성 간부로부터 '사진보다 미인'이라는 말을 듣는다.

불쾌감을 느낀 공지영은 외모에 대한 말을 하지 말라고 요청한다. 그러나 그 간부는 예쁘다고 하는데 왜 그러느냐 되물었다. 공지영은 이렇게 답변했다.
 
"제가 오늘 처음 만난 여러분에게 제 얼굴에 대해 품평을 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얼굴 때문에 여기 강사로 초대받은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곳은 예의가 많은 곳이라 들었습니다. 남녀 사이에 '예쁘다'라는 말이 어떤 뉘앙스로 쓰이는지도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가 쓴 책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외모에 대한 일절 품평을 사양합니다."

다른 곳이라고 달랐을까. 어느 행사에서는 사회자가 공지영 작가를 가리켜 "문단의 미스코리아 진"이라고 불렀단다. 공지영 작가가 그런 표현을 삼가 달라고 요청하자 후속 행사는 취소됐고, 강연을 요청하는 지자체 수가 줄었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불어온 미투의 바람이 이 두 곳은 비껴간 건지, 이 에피소드를 읽으며 남자인 내가 부끄럽고, 반성하게 됐다.
 
섬진강변의 공지영 작가
 섬진강변의 공지영 작가
ⓒ 위즈덤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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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행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언젠가부터 공지영은 작가라기보다 싸움꾼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인터넷 창만 열면 악성 댓글이 주르륵 달렸고, 그중 대부분은 그냥 죽으라는 배설에 가까운 욕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지영 작가는 기죽지 않았다. 그는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앞으로는 섬진강이 흐르고 뒤로는 지리산이 병풍처럼 펼쳐진 경남 하동으로 내려갔다. 이 책은 섬진강을 산책하며 공지영이 날마다 점점 행복해지기 위해 쓴 책이다.

책은,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 나를 사랑하고 행복해지기 위해 끊임없이 껍질을 부수는 작가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그런데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지경에, 인생이 너무 고달파 죽고 싶은 마음뿐인 후배 셋이 차례로 찾아온다. 이 책이 에세이지만 소설처럼 다이내믹하게 읽히는 건 사실 이들 후배가 토로하는 고민의 두께 때문이다.

10대 때부터 동생을 돌보며 겨우 공부해 대기업에 다니는 H는 정말 열심히 일한 끝에 상사에게 칭찬도 받고 동기보다 조금 빠르게 승진한다. 그런데 한 남자 동기가 H를 보며 비꼬는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그렇게 화장하고 짧은 치마 입고 다니면서 승진하니까 좋지?"

남자 동기의 말에 충격을 받은 H는 그때부터 바지만 입고 화장도 하지 않고 외모를 가꾸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J의 사연도 눈물겹기는 마찬가지다. 평생 돈을 벌지 않고 자식에게 의지해온 J의 부모는 이제는 돈을 주지 않으면 자살하겠다는 협박까지 하지만, J는 '나쁜 년' 소리를 듣기가 두려워 또다시 착한 딸 노릇을 하고 있다.

재능과 미모를 갖춘 유학파 후배 S는 우연히 문자메시지를 보고 남편이 바람을 피우는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들어 마음이 지옥이다. 그리고 나이 드는 것이 너무 싫고 받아들이기 힘들다.

H, J, S를 김지영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은 건 나만의 느낌일까.

공지영이 후배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단순하다. 바로 행복해지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내 친구들 부디 행복하길. 부디 오늘 무슨 수를 써서라도 행복해지기를. 너희들의 부모가 어떤 사람이든, 너희들의 형제가 어떤 사람이든 네 과거가 어땠든 네 남편이 무엇을 하든 얼마나 슬펐고 얼마나 많이 울었고 얼마나 외로웠고 얼마나 아팠는지 간에 오늘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행복을 만끽하기를. 우리는 행복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리라."

우리는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각자만의 고민을 한 아름 안고 살고 있다. 그래서 공 작가가 각각의 후배에게 해주는 말(위로가 됐든 핀잔이 됐든 질책이 됐든)도 실은 작가가 본인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들이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을 이 땅의 모든 김지영이 읽는다면 <며느라기>와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눈시울을 붉히며 격한 공감을 할 것이다. 63년생 공지영의 삶과 82년생 김지영의 삶이 별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 같은 82년생 김지영의 남편들이 꼭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공지영의 섬진 산책

공지영 (지은이), 위즈덤하우스(2020)


태그:#공지영, #김지영, #그럼에도불구하고, #에세이, #며느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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