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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학기 대학원에서 '한국대외관계사연구'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조공·책봉관계라는 동아시아의 특수한 외교관계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진행했는데, 내가 가장 흥미를 느꼈던 부분은 고대 한일관계였다.

한국과 일본이 고대부터 상호 교류를 통해 발전을 거듭해왔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교류의 구체적인 형태에 대해서는 무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저 양국 간에 사절이 오가며 서로의 문화를 공유했겠거니 하는 막연한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한반도에서 건너간 승려들의 역할이 막중했음을 깨달았다.

한반도의 승려들은 불교를 매개로 대륙의 선진문화로 대표되는 다양한 기술과 정치제도들을 일본에 이식하였다. 따라서 고대 한일관계의 양상을 살펴보고자 할 때, 승려와 불교의 역할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주제에 흥미를 갖고 아예 기말 페이퍼 주제를 '고대 한국 불교가 일본 사회·문화 형성에 끼친 영향'으로 정했다. 그리고 과제 작성을 위해 관련 연구 성과들을 찾아보던 중 때마침 이와 관련한 신간이 최근에 출간된 것을 알았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이윤옥 소장이 쓴 <일본불교를 세운 고대 한국 승려들>이다.
 
<일본불교를 세운 고대 한국 승려들> 표지
 <일본불교를 세운 고대 한국 승려들> 표지
ⓒ 운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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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이윤옥 소장은 <서간도에 들꽃 피다>, <46인의 여성독립운동가 발자취를 찾아서> 등 여성독립운동가 관련 책들을 꾸준히 출간하며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여성독립운동 전문가라고만 생각했던 이윤옥 소장의 전공이 바로 고대 한일 관계사였을 줄 누가 알았으랴. 이번에 나온 신간 역시 2016년에 나온 저자의 박사학위를 읽기 쉽게 풀어서 엮은 단행본이라고 한다.

일본으로 건너간 한국 승려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의 불교 전래는 538년 백제 성왕(聖王)이 불상(佛像)과 불서(佛書)를 보내옴으로써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를 아스카(飛鳥)시대라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아스카시대의 특징을 백제로부터의 불교 수용이 계기가 되어 문화가 발달하기 시작한 시점으로 보고 있다. 고대 일본 문화 형성에 백제에서 건너간 불교가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후로도 일본은 나라(奈良)시대, 헤이안(平安)시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불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백제 성왕이 최초로 불상을 보낸 일본 최초의 사찰, 향원사(向原寺)
 백제 성왕이 최초로 불상을 보낸 일본 최초의 사찰, 향원사(向原寺)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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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일본 불교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나라시대의 '남도 육종(南都 六宗)' 역시 한반도의 승려들이 그 시조라고 주장한다. 삼론종(三論宗)은 625년 고구려의 혜관(慧灌)이 전한 것이고 성실종(成實宗)은 백제의 도장(道藏), 법상종(法相宗)은 백제의 도소(道昭)가, 화엄종(華嚴宗)은 신라 심상(審祥)의 활약으로 그 기반이 다져졌기 때문이다.

불교 사상뿐만이 아니었다. 저자는 이들을 '문화전파자'라 명명하는데 실제로 한반도 승려들은 선진문화를 일본에 이식하는 전달자 역할을 담당했다. 백제 승려 관륵(觀勒)은 역법(曆法), 천문둔갑술(天文遁甲術), 방술(方術)과 같은 특수 기술들을 전했고, 고구려 승려 담징(曇徵)은 채색(彩色)과 지묵(紙墨) 제작기술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최초로 맷돌을 제작했다고 전한다. 나라시대에 번창했던 법륭사(法隆寺)의 금당벽화가 담징의 작품이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1000년에 걸친 방대한 기록을 정리하다

저자는 720년에 간행된 <일본서기>(日本書紀)를 시작으로 1702년의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에 이르기까지 1000년이라는 방대한 시기 동안 일본에서 간행된 사료에서 고구려·백제·신라 승려들의 이야기를 찾아내 그들이 일본 불교 형성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한다.
 
"올해 89살인 데라카와 슌테이(寺河俊禎) 주지스님은 약간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럼에도 절을 찾아간 필자를 응접실에 앉게 하고서는 손수 작은 쟁반에 녹차를 타 가지고 나왔다. 그리고는 전화 통화에서 별로 자료가 없다던 것과는 달리 오래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보였다. 이 두루마리는 절의 역사를 써 놓은, 483여년 된 <금강성사연기>(金剛城寺緣起)였다. 주지스님은 혜관스님 이야기가 적혀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짚어 주었다." - 256쪽
 
금강성사 주지 데라카와 슌테이(寺河俊禎) 스님
 금강성사 주지 데라카와 슌테이(寺河俊禎) 스님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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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고대 한국 승려들의 이야기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렇듯 저자는 잊혀진 승려들의 기록을 찾아 일본까지 건너가는 등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은 끝에 고대 한일관계사의 한 단면을 복원할 수 있었다.

그 많은 고문헌들을 일일이 찾아서 비교·대조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터. 실제로 저자는 "에도기(江戶期)인 1702년에 만겐시반(卍元師蛮)이란 스님이 30년 동안 일본 전역을 발로 뛰어 완성한 <본조고승전>의 경우만 해도 텍스트로 삼을 책 한 권 구하기가 어려운 실정"이었다며 "설사 사료를 구한다 해도 상당수의 일본 사료들은 현대 일본어 완역본이 없는 상태라 이를 독해하는 작업에 적지 않은 공을 들여야 했다"고 고백한다.
 
"승려 의각은 백제 사람이다. (…중략…) 의각법사는 키가 7척이나 되고 널리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항상 반야심경을 외웠다. 당시 같은 절에 혜의라는 승려가 있었는데 밤중에 혼자서 나가 걷고 있었다. 언뜻 의각법사의 방을 보니 밝은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어 이상히 여긴 혜의가 창호문에 몰래 구멍을 내어 들여다보았더니 의각법사가 단정히 앉아 경을 읽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빛이 바로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혜의는 놀라고 무서워서 다음날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이 일을 절 안의 승려들에게 알렸다." - 134~135쪽

"비구니 법명은 백제 사람이다. 사이메이천황 2년(656)에 내신 가마타리 무라지가 병을 앓았는데 온갖 처방에도 낫지 않았다. 이에 법명이 아뢰길, <유마힐경>은 아주 좋은 경전이니 이를 독송해보는 게 좋겠다고 하자 천황이 허락하여 독송하였는데 채 독송이 끝나기도 전에 병이 나았다. 천황과 신하들이 아주 기뻐하였다." - 161쪽

1부 3장 '영험력을 통한 불법 전수' 파트에서 소개되고 있는 백제 승려들의 기행(奇行)이다. 일본에 건너간 승려들이 영험력을 발휘한 기이한 이야기들은 오컬트적이어서 더욱 신비롭고 흥미진진하다.

화룡점정은 2부 답사기가 아닐까 싶다. 2부에서는 고구려 승려 혜관이 세운 금강성사(金剛城寺), 혜편(恵便)을 위해 쇼토쿠 태자(聖德太子)가 세운 학림사(鶴林寺), 담징의 흔적이 남아있는 관세음사(観世音寺)등의 유적지들을 저자가 직접 발로 답사한 기록을 싣고 있다.

바로 이 파트에서 이 책의 특장이 드러난다. 독자들로 하여금 현장의 운치를 느낄 수 있게끔 저자가 직접 현장 구석구석을 촬영한 사진들을 컬러로 싣고 있는 것이다. 또한 독자들이 이 책 한 권 들고서 현장 답사까지 가능하도록 가는 길까지 친절하게 안내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술서가 갖는 딱딱한 이미지를 벗겨내고자 한 저자의 노력이 엿보인다.
 
군마현 수택사(水澤寺)에 모셔진 고구려승 혜관의 목상. 저자가 한국인 최초로 이 목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군마현 수택사(水澤寺)에 모셔진 고구려승 혜관의 목상. 저자가 한국인 최초로 이 목상을 발견했다고 한다.
ⓒ 이윤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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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징과 혜관이 오늘날 한일관계를 보면 뭐라고 할까

무척이나 흥미로운 내용들이 가득하지만 사실 주제가 주제인지라 관련 연구자가 아닌 이상 이 책이 얼마나 읽힐까 회의감이 들기도 한다. 나 역시도 기말 과제가 아니었더라면 이 책을 들여다볼 일이 있었을까 하는 게 솔직한 고백이다.

저자 역시 그러한 점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수익성을 기대하기 힘든, 이 마이너한 주제의 책을 내놓은 까닭.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기에 누군가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이 책을 세상에 내놓기로 한 것은 일본에 불교의 뿌리를 내린 고대 한국스님에 대한 관심이 없는 현실에서 이들에 대한 조명을 한 번쯤 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 6쪽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음으로써, 저자의 눈물겨운 노력을 알아주었으면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히 이 책을 주목했으면 하는 이들이 있다. 바로 한국과 일본, 양국의 외교 담당자들이다.

2019년 여름,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경색된 한일관계가 좀처럼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일본은 우월한 선진기술들을 한국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과거 우월한 선진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한국은 승려들을 통해 적극적으로 일본에 기술을 전파함으로써 우호관계를 다졌다.

그런 점에서 선진기술을 압박 수단으로만 활용하는 오늘날의 한일관계가 안타깝게만 느껴진다. 그 옛날 담징과 혜관이 이 상황을 보면 과연 뭐라고 할까. 오늘날 한·일 양국의 위정자들이 고대의 한일외교관계에서 경색된 한일관계를 풀어가는 해법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 <일본불교를 세운 고대 한국 승려들>, 이윤옥, 운주사, 2020.09.28, 22,000원.


일본불교를 세운 고대 한국 승려들 - 일본 사서에 나타난 고구려, 백제, 신라 승들의 활동을 중심으로

이윤옥 (지은이), 운주사(2020)


태그:#불교, #고대사, #일본, #이윤옥, #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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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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