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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참석해 판소리 공연을 한 백금렬 교사.
 2019년 검찰개혁 촛불집회에 참석해 판소리 공연을 한 백금렬 교사.
ⓒ 오마이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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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백금렬.  

그는 나를 모르지만, 나는 그를 너무도 잘 안다. 지난해 대검찰청 앞에서 열렸던 이른바 '검찰 개혁 집회'에서 사회자로서 혹은 판소리 공연으로 백만 시민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한 인물이다. 아마도 그는, 몇몇 정치인과 연예인을 제외하면, 남도 사람 중 서울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일 것이다.

그는 현직 중학교 한문 교사다. 요즘 아이들이 영어나 수학보다 백 배는 더 어려워하고 싫어한다는 한문 교과. 그래도 듣자니까 그 학교에선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교사이고 과목이란다. 기실 아이들이 특정 과목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건 십중팔구 교사에게 달려 있다.

처음엔 그가 연예인인 줄 알았다. 그는 이곳 광주의 토박이 여성 연극배우와 함께 광주MBC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지금은 종방되었지만, 구수한 입담으로 우리 국악과 판소리를 맛깔나게 소개하던 지역을 대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름까지도 신명 나는 '얼씨구학당'.

그에게 매료된 사람들은 그를 광장으로 불러냈다. 공연 무대든, 시위나 집회의 현장이든, 그는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어디든 버선발로 달려갔다. 만날 때마다 그의 손엔 항상 마이크가 들려 있었으니, 그가 현직 교사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사회자면서 공연자이고 무대를 총괄하는 연출자로서 1인 다역을 소화해낸다. 좌중을 휘어잡는 진행 능력뿐만 아니라, 그의 판소리와 풍물을 다루는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광장의 열기를 구슬을 꿰듯 하나로 묶어내는 데 그만한 재능을 가진 이를 여태껏 본 적이 없다.

제자들에게 보낸 SNS 메시지가 발단... 1심 자격정지 1년

그런 그를 대한민국 검찰과 법원은 끊임없이 '위험인물'로 낙인찍어왔다. 급기야 지난 18일, 광주지방법원은 그에게 국가공무원법 위반 혐의로 자격 정지 1년을 선고했다. 1심 판결이지만, 이대로 형이 확정되면 그는 교사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지난 4.15 총선 즈음, 만 18세가 되어 처음으로 선거권을 갖게 된 제자들에게 SNS를 통해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메시지를 보낸 게 화근이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저버렸다는 거다. 대한민국 교사가 '정치적 금치산자'인 현실을 방증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다.

고작 이게 교사직을 박탈할 정도로 큰 범죄인가. 고래 심줄보다 질기다는 공무원 신분 보장 규정이 이토록 허약한 것인지, 선고를 내린 판사에게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이를 항소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낯부끄러운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일까.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 규정은, 말 그대로 '이현령비현령'이다. 이는 교사의 머리를 무디게 하고, 가슴을 식히며, 입을 틀어막는 서슬 퍼런 수단이 되고 있다. 학교 교육이 여전히 미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낡은 지식만 욱여넣고 있는 것도 여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본다.

기실 교사의 정치적 중립 의무가 법에 규정될 만큼 중요해진 건 과거 학교 교육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악용된 사례가 많아서다. 교사가 일제강점기 말 민족말살정책의 주구였던 시절까지 갈 것도 없다. 엄혹했던 유신 시절, 국민투표 찬성 여론을 부추기는 데에 전국의 교사들이 동원됐다는 건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정치 권력으로부터 교육의 중립성과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한 장치가, 언제부턴가 교사의 자발적인 교육 행위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변질이 됐다. 논란거리는 애초 배제하고, 심지어 토론수업 때도 정치적인 소재는 피하는 게 불문율이다. 이른바 '자기검열'이 일상화된 것이다.

법에 저촉되지 않으려면, 수업은 '무색무취'해야 한다. 교사 지침서에 나오는 대로 가르쳐야 하며, 몇몇 아이들이 정치적으로 민감한 질문을 하거든, 나무라거나 무시하는 게 상책이다. 혹여 아이들이 SNS에 수업 중 교사의 발언 내용을 문제 삼게 되면 난감해질 수 있다.

이러한 현실을 모르지 않을 교사 백금렬은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늘 당당하다. 현실에 순응하기보다 차라리 저항하겠다는 결기가 느껴진다. 나아가 정치적 중립 의무가 법제화된 역사적인 연원을 찾아 입법의 취지를 되찾겠다며 주먹을 불끈 쥐는 모습이다.

사실 그에게 이번 판결이 새삼스럽지도, 낯설지도 않다. 지난 2013년에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 600만 원을 선고받은 경험이 있다. 당시 한 집회 현장에서 여당의 유력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보수단체로부터 고소를 당한 것이다.

그의 올곧은 성정을 보여주는 예화 하나. 선고가 나자 한 동료 교사가 탄원서를 준비하며 그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자칫 학교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데 두렵지 않으냐고. 그는 오히려 호탕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질문한 사람은 순식간에 머쓱해지고 말았다.

"나야 잘라주면 고맙지. 아이들과 못 만난다는 게 서운하기는 해도, 좋아하는 판소리 마음껏 하고, 공연장과 집회 현장에 사회를 보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게 될 텐데 뭐가 걱정이야."

교사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의 1심 판결 소식에 종일 착잡해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았다. 같은 교사이기 전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이번 판결이 교사의 자격을 문제 삼았다는 것보다 시민의 기본권을 부정하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교사가 입에 재갈을 문 채로 아이들을 성숙한 시민으로 길러낼 수 있을까.

고백하건대, 그가 죄라면, 나 역시 무사할 수 없다. 지난 4.15 총선은 선거 연령이 만 18세로 하향된 뒤 치러진 첫 번째 선거였다. 현재 고3 아이들 중 상당수가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고, 그들을 대상으로 선거 교육을 실시하라는 공문이 숱하게 내려왔다.

고작 선거의 의의와 방법, 주의사항을 알려주는 것이 선거 교육의 전부일까. 그럴 거면, 초등학생들에게 선거권을 준다 해도 문제 될 게 없다. 선거는 자신과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고도의 정치적 판단을 내리는 행위다.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으로 불리는 이유다.

선거는 결국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대변할 인물과 정당을 선택하는 일이다. 그러자면, 인물의 됨됨이와 정당이 내건 공약에 대한 활발한 토론이 전제되어야 한다. 토론은 각자의 주관을 객관화하는 과정이다. 교사가 정치적 주관을 발설하는 게 죄라면, 대체 뭘 가르치란 것인가.

코로나로 인해 선거 교육은 원격수업으로 이루어졌다. 선거 방법과 주의사항에 대해선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은 SNS를 통해 내게 누굴 찍을 건지, 어느 정당이 좋은지 등 짓궂은 질문들을 쏟아냈다. 이번 판결로 미루어, 아슬아슬하고 아찔한 줄타기였던 셈이다.

교사 백금렬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당당히 밝힘으로써 시민의 귀감으로 거듭났다. 한 동료 교사의 모난 지적처럼, 그에게 교사라는 신분은 그의 재능을 마음껏 펼치는 데 '족쇄'일지도 모른다. 국가공무원법이 교사를 옥죌 수 있을지언정 시민으로서 정치 참여를 막을 순 없다.

낭중지추. 이곳 광주의 '시민 MC'였던 그가 '서초 대첩'의 사회자로 차출되었을 때, 순간 떠올랐던 사자성어다.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며, 늘 사회적 약자와 함께하려는 그에게, 교사의 자격을 정지시킨 1심 판결은 오히려 그의 송곳 같은 명성을 더욱 벼리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나아가 교사를 비롯한 공무원의 정치 참여를 원천 봉쇄해온 국가공무원법과 선거법에 대해 공론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나저나, SNS에 한 줄 남긴 정치적 메시지로 교사를 기소하는 검찰이, 대놓고 정치 행위를 일삼는 검찰총장 앞에선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태그:#정치적 중립 의무, #백금렬 교사, #국가공무원법, #검찰개혁, #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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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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