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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코로나로 조금 늦어지긴 했지만 이제 수능도 끝나고 수시 모집 결과도 발표가 끝나가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을 맡으면 해마다 이맘 때는 조금 한가롭다. 미뤄두었던 공부를 하기 좋은 때다. 수학 공부도 좋지만 이런저런 잡다한 공부를 좋아한다. 글자에 관한 이야기를 몇 자 적으려 한다. 요즘 블로그 스킨에 관한 글을 적을 때가 많아서 로마자를 써야 할 때가 많다. CSS, HTML로 적다가 국어 기본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시에스에스와 '에이치엠엘'로 쓰기 시작했다. 컴퓨터는 색은 RGB 숫자로 나타낸다. 호기심은 바로 아르지비에서 시작되었다.

호기심의 시작

뭔가 어색함을 느꼈을 것이다. 알지비가 아니라 아르지비로 적었기 때문이다. 수학 시간에 등비수열을 배운다. 등비 수열엔 공비가 있는데 주로 r로 표기한다. 당연히 비율(rate 또는 ratio)에서 따온 문자이다. 그런데 몇 해 전부터 이것을 '얼'로 읽는 학생이 많아졌다. 나는 주로 '알'로 읽는데 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읽는가? 얼도 알도 모두 틀렸다. 정답은 '아르'로 읽어야 한다. 조사를 달 때 'r이' 아니라 'r가'로 적는 이유다.

지난해 "왜 'r은'이 아니고 'r는'일까?"라는 글을 쓰면서 로마자를 읽는 방법을 상황에 따라 바꿔야 한다고 적었다. 나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닐 터인데 왜 로마자 r는 '아르'로 읽어야 한다는 규정이 바뀌지 않는 것일까 궁금해졌다. 비슷하게 z는 제트로 읽어야 한다. z-점수를 알고 있는가? 흔히 통계에서 표준 정규분포를 따르는 변수를 z로 쓰는 것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걸 요즘 많은 이들이 지-점수로 읽는다. 제트-점수가 익숙한 내 귀엔 영 어색하게 들려서 꼬박꼬박 아 제트-점수로 정정하지만 어떤 학생들에겐 오히려 촌스런 사람이 되고 마는 느낌이라 가끔은 지-점수로 말하기도 한다. 지난 며칠간 검색한 기록을 남겨두려고 한다.

알파벳이란 무엇인가?

어떤 이들은 영문자와 로마자를 구별하지 않고 쓰는데 이는 잘못이다. 따라서 알파벳을 '에이비씨'라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다. 그리스인이 썼던 첫 두 글자 alpha와 beta를 따서 로마인들이 alphabetum으로 부르던 이름이 16세기초부터 알파벳(alphabet)이 되었다. 참고로 로마인들은 그리스 글자를 바꿔서 지금 우리가 보는 로마자를 만들고 L,M,N의 소리를 따서 엘레멘트(elements)로 불렀다고 한다.
 
페니키아와 로마 문자/ 위키백과 사진 갈무리
 페니키아와 로마 문자/ 위키백과 사진 갈무리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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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말과 글자는 별개다. 오늘날 글자가 없는 나라에서 로마자를 빌어다 표기를 하는 것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인들도 말을 표기하기 위해 페니키아인이 쓰는 글자를 빌려왔다고 한다. 어쨌든 알파벳은 흔히 생각하듯이 로마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음소 문자 가운데 문자 하나가 닿소리(자음) 또는 홀소리(모음) 하나하나를 나타내는 문자 체계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다. 당연히 우리 한글도 알파벳으로 분류된다.

실제로 로마자를 위키백과에서 찾아보면 분류 알파벳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알파벳이 아닌 문자는 무엇으로 부를까? 페니키아 문자를 찾으면 알파벳이 아닌 아브자드로 분류하고 있다. 아브자드는 닿소리와 홀소리 하나씩을 나타내지 않고 닿소리만 나타내는 문자 체계를 말한다. 우리가 요즘 'ㅇㅈ'으로 적고 '인정'으로 읽는 것과 비슷하다. 아랍어나 이스라엘어가 이와 비슷한 아브기다로 분류된다고 한다.

로마자 읽기

위에서 말했듯이 말만 있고 글자가 없는 민족은 글자를 빌어와 쓰는데 로마자를 쓰는 나라가 아주 많다. 말이 다르니 같은 로마자도 나라마다 읽는 소리가 다르다. 라틴어는 'ABC'를 '에이비씨'가 아니라 '아베쎄'로 읽는다. 독일어로 '아베체'로 읽는 것처럼 글자와 소리는 별개다. 심지어 독일어나 스페인어는 영어에 없는 알파벳을 쓰기도 한다. 독일은 r을 '에르'로 스페인은 '에ㄹ르'로 읽는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굳이 '얼'이나 '알'로 읽을 필요가 없다. 제트도 마찬가지다. 이래서 사람은 계속 공부를 해야 한다. 국립국어원도 다 계획이 있었던 것이다. 이제 공비 'r'는 자신 있게 '아르'는으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오히려 '얼'로 읽는 아이들을 제대로 바로 잡아줄 수 있게 되었다.

자랑스러운 한글

공부하다가 새삼스럽게 '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발명품인가!'를 깨닫는다. 글자를 발명한 사람과 만든 까닭이 정확하게 알려진 글자는 오로지 한글 뿐이다. 발음 기관을 본떴으니 배우기도 쉽다. 사실 우리는 어머니께 배운 말이라 발음 기관을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한글을 배울 수 있지만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소리 내는 혀의 모양을 안다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을 적으면서도 어지간한 소리는 모두 한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다.

중국을 보자. 찬란한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지만 이제 간체자를 쓰면서 따로 공부하지 않으면 옛글을 읽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우리도 한문으로 쓰인 문헌이 많아서 비슷하지만 중국 사람보다는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다. 컴퓨터로 한자를 입력하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한글이 얼마나 우리 삶을 편하게 하고 있는가 잘 느낄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이제 사대주의를 벗어날 때가 되었다. 방탄소년단 덕분에 한글을 배우는 세계인이 많이 늘었다는 즐거운 소식이 있다. 이참에 말만 있고 글자는 없는 민족에게 한글을 수출하는 노력을 하는 것은 어떨까 싶다. 잘 모르지만 중국 사람들은 소리를 로마자로 적고 한자를 고르는 방식을 쓰고 있는 모양이다. 콧대 높은 중국이 한글을 빌어다 쓰지 않겠지만 로마자보다 한글로 입력하면 훨씬 편할 것이다.

아주 우연히 '이날치' 밴드를 알게 되었다. 노래를 듣고 있자면 '우리 것이 참 좋구나'를 느낀다. 정확하게는 '우리 것도 좋은 것이 있네'가 될 것이다. 이제 영국이나 미국을 정답이나 모범으로 여기고 무조건 따르려 하지 말고 더 넓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당연히 우리가 최고라는 이른바 '국뽕'에 취해 있으면 안 되지만 살짝 우리 것에 대한 자긍심을 품는 것이 좋겠다. 그 대상이 한글이라면 아주 큰 자긍심도 문제 없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https://suhak.tistory.com/1251에도 같이 올립니다.


태그:#한글, #로마자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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