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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지방청년 서울살기'는 청년 미디어 '미디어눈'이 제작한 '서울공화국' 영상 시리즈를 기사화한 것이다. '서울공화국'은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청년들의 생생한 일상과 고민을 청년의 시선에서 제작한 영상 콘텐츠다.[기자말]
 
서울공화국, 서울에서 버티기
ⓒ 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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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영상 - 지방청년 서울살기]
경상도 부모님이 '인 서울' 아들 자취방을 보고 남긴 말(http://omn.kr/1qt9l)

'공부 잘하는 애들은 서울로 가고 그렇지 않은 애들은 부산에 남는다.'

고3 교실 전반적으로 깔려 있는 암묵적인 공식 같은 것이었다. 다행히 나는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수능을 잘 봤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인서울 대학에 합격했다. 당시 정독실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대부분 상경했기 때문에 서울에 가는 게 생애주기의 당연한 일부분인줄 알았다. 부산에 남아 있는 친구들은 우리들을 부러워했고, 나는 사회로 향하는 첫 발걸음을 성공적으로 뗀 느낌에 왠지 우쭐해지기까지 했다.

얼마 전에야 들은 얘기지만, 아빠는 나를 서울에 처음 올려보낸 2015년이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다고 한다.

아르바이트 입문

아쉽게도 기숙사는 떨어졌다. 초반에는 부모님이 월세와 생활비, 공과금 전체를 다 감당해주실 수밖에 없었다. 아르바이트 할 생각 말고 공부에만 집중해서 얼른 취업하라는 말도 잊지 않으셨다. 부모님이 매달 주신 생활비는 30만 원. 하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많은 대학생에겐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조심스레 연락해 봤지만, 아빠는 그 이상은 힘들다고 했다. 부산에 살 때는 우리 집이 잘 산다고 생각했는데,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아빠를 그때 처음 봤다.
 
알바 정신 승리의 순간
 알바 정신 승리의 순간
ⓒ 김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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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데는 돈을 아끼지 말라고 배웠지만, 서울에서 자취를 시작하면서 먹고 싶은 걸 참는 것에 익숙해졌다. 살이 빠졌냐 하면 편의점 음식을 많이 먹어서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간장 계란밥이 슬슬 질린다고 느껴질 때쯤 나는 인생 첫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자 용돈이 끊기기 시작했다. 앗, 이게 아닌가? 지출이 많았던 달에는 단기 알바를 뛰어 생활비를 메꾸면서 그렇게 살아갔다.
  
6년 동안 월세만 4천만 원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몸도 마음도 지쳐 휴학을 결심했다. 그러자 부모님이 말씀하셨다.

"휴학할 거면 알바해서 니 월세는 니가 내라. 우리도 지친다."

위로는 대학생 오빠가 한 명, 밑으로는 한창 입시 중인 고3 동생이 한 명. 부모님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서울 성공 신화만을 주입받았지, 이후에 발생하는 서울 비용은 오롯이 개인 가정의 몫이었다. 월세 55만 원, 생활비 40만 원, 휴대폰 요금 및 각종 공과금 10만 원. 계산을 해보니 매달 최소 100만 원은 있어야 기본적인 의식주가 가능했다.
 
지금 사는 집은 월세 60만 원에 관리비 10만 원이다.
 지금 사는 집은 월세 60만 원에 관리비 10만 원이다.
ⓒ 김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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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내주실 때는 몰랐는데 55만 원은 생각보다 큰 금액이었다. 월세로만 매달 55만 원을 내려니 배가 아프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코딱지만한 방이 55만 원이라니! 조물주 위에 건물주 있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대학교에 입학해서 졸업한 이번 학기까지 총 6년간 월세에 쓴 돈을 계산해보니 무려 4천만 원이었다. 이래서 빨리 졸업을 하라고 하는구나. 학교에 남아 있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월세로 나가는 돈도 커졌다.

'서울 사는 친구들은 알바해서 여행도 가고 쇼핑도 하던데, 나는 알바해서 월세 내고 생활비 쓰네.'

알바를 세 개나 하느라 새벽에 시험 과목을 처음 펼친 날에는 비참한 기분에 갑자기 눈물이 찔끔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를 원망하지. 누가 등 떠민 일이 아니었다. 탓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게 선생님이 부산대 추천하실 때 한 번만 더 고민해 볼 걸. 하지만 서울에 왔기에 경험할 수 있는 일도 많았다며 나를 위로했다.

햇빛이 들지 않는 집, 문득 찾아온 우울

동생까지 서울로 대학을 오게 되어 함께 살 집을 구해야 했다. 보증금 1000, 월세 60만 원이 우리가 정한 마지노선이었다. 투룸을 먼저 알아보긴 했지만 예산 초과. 이상하게 저렴하다 싶으면 높은 확률로 반지하였다. 지대가 기울어져서 그렇지 원래는 1층이라는 반지하 방도 있었다. 부동산 아저씨는 이 정도면 햇빛 들어오는 데 문제가 없다고 했지만, 모서리 곳곳에 옅게 피어 있는 곰팡이 자국은 숨기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타협에 타협을 거듭해 두 명이 잘 수 있을 만한 원룸을 구하는 걸로 만족했다.
 
부동산에서 추천했던 넓고 저렴한 반지하. 고민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부동산에서 추천했던 넓고 저렴한 반지하. 고민했지만 결국 가지 않았다.
ⓒ 김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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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과 같이 이사한 원룸은 1.5층이었는데 유일하게 하나 붙어 있는 창문 맞은편에는 팔 하나도 다 못 뻗을 가까운 거리에 높은 건물이 있었다. 덕분에 불을 켜지 않으면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살아야 했다. 해질녘쯤 집을 보러 가서 미처 체크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원체 긍정적이고 밝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오던 나였는데 그 집에 살면서 이상하게 처지고 우울해져 갔다.
 
이전에 살았던 원룸. 바로 앞에 건물이 있어서 햇빛이 들지 않는다.
 이전에 살았던 원룸. 바로 앞에 건물이 있어서 햇빛이 들지 않는다.
ⓒ 김소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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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오래 있으면 답답함을 느꼈다. 덕분에 공부는 무조건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시험 기간이면 아르바이트가 끝난 11시에도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도서관에 갔다. 동생 역시 비슷한 답답함과 우울감을 호소했고 우리는 마치 집을 피하려는 사람들처럼 행동했다. 집은 밤늦게 들어와서 잠만 자는 공간이었다.

결국 나와 동생은 계약 기간이 끝나자마자 도망치듯 다른 집으로 이사했다. 만약 이 집에 살고 있을 때 코로나19가 닥쳤다면 어땠을까. 나는 코로나 시국에 카페에서 공부 좀 하지 말라는 댓글에 섣불리 공감을 누르지 못한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게 힘든 사람들도 있다.

내가 원해서 간 서울

나를 서울로 보내는 게 너무 힘들었다는 우리 아빠는 그래도 사람은 출세하려면 서울에 가야 한다고 말한다. 나와 동생을 서울에 보낸 걸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지난 명절 '졸업하고 부산 내려와서 취직할까?'라고 떠본 질문에 부모님은 정색하며 말씀하셨다. 

"그럴 거면 니를 처음부터 서울에 안 보냈지. 무슨 소리 하노?"

사실 부산에서 취직하고 싶어도 내가 원하는 일자리는 그곳에 없었다. 제2의 도시라고 불리는 부산이 이 정도면 다른 도시는 어떨지, 너도나도 서울로 몰려오는 이유가 이해됐다.
 
서울의 멋진 야경을 상상했지만 나는 이곳에 없다.
 서울의 멋진 야경을 상상했지만 나는 이곳에 없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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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고등학생이 상상했던 서울 풍경 속에는 내 자리가 없다. 운 좋게 서울에서 직장을 구해 일을 시작했지만 맥이 빠질 정도로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학자금 대출은 남아 있고 매달 월세도 내야 한다. 사는 곳을 바꾸면 실감이 날까 싶다가도 2년마다 이사하는 게 진절머리가 나서 잠시 보류하기로 했다.

지방 출신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대학생 때와는 다르게 직장 선배 중에는 서울 토박이가 많다. 매달 월세로 내야 하는 돈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선배들이 부럽다. 주택 청약 저축을 꾸준히 넣고 있다는 나에게 한 선배가 말했다.

"난 엄마 아빠 집이 내 집이라 괜찮아." 

아... 부럽다.
       

덧붙이는 글 | 미디어눈은 '모든 목소리에 가치를'이라는 비전으로 활동하는 청년미디어입니다. 유튜브에서 미디어눈을 검색하거나 아래 주소를 통해 '서울공화국' 영상 전 편을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com/c/medianoon


태그:#서울공화국, #서울, #월세,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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