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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이전 기사 이동인이 일본 아닌 영국을 표적으로 삼은 이유에서 이어집니다.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기억하세요? 우리는 지난번에 이동인 스님이 어떻게 동경 주재 영국 외교관 사토우(Satow)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지, 그 수수께끼를 처음으로 풀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관점으로 이동인의 정체성과 행적을 바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씌워진 '친일'의 멍에도 벗길 때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1879년 9월 일본에 밀항하여 교토에 몇 개월 머물다가 다음 해 4월에 처음으로 동경을 방문하였습니다. 동경에 도착하자마자 스님은 정부관리 및 일반 유지, 지사, 학자들을 두루 접촉하며 바쁘게 지내는 틈에 일본인 아무도 모르게 사토우 집을 찾아갔습니다. 둘이는 주로 일본어로 대화하였고 한국어도 섞었을 것입니다.

5월 12일 초대면이 이루진 지 사흘만의 만남을 기록한 5월 15일 자 사토우의 일기는 의미심장합니다. 3시간 동안에 걸쳐 흉금을 털어놓은 이동인은 사토우에게, 조선 사람들이 일본인을 싫어하는 까닭은 근본적으로 16세기에 히데요시가 저지른 불의의 침략 때문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원산의 여러 주민이 일본인을 싫어하여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에 들여온 수입품은 거의 전부가 서양 제품이며 그래서 다른 나라가 조선과 통상관계를 맺는다면 일본인의 교역은 소멸할 것이라면서 영국이 조선과 통상을 원하는지를 타진하였습니다. 스님은 또한 조선에는 석탄과 철광뿐 아니라 금이 풍부하고 해안에는 고래도 많다고 하면서 은근히 영국의 자본과 기술에 의한 개발을 유인하기도 하였습니다. 나아가 직접 인삼 샘플을 제시하면서 홍보하였습니다.

이 모습은 19세기 조선 승려의 모습이 아니라 21세기 세일즈 외교관이자 정보통의 모습입니다. 좀 더 이 대목을 음미해봅시다. 이동인은 일본에 있으면서도 이제 막 개방(1880년 4월)된 원산항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원산에 진출한 일본 상인들의 불량한 행태가 크게 반감을 불러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원산 주재 초대 일본 총영사도 이를 심각하게 여겨 "우리 일인들이 조선인들에게 거친 행동을 한다는 말이 들리는데 이는 간과치 못할 일이다. 그러한 일은 양국 교제상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인 바 차후 다시 그런 이야기가 들리면 엄중히 법률로 처단할 것이니 일동은 명심할 것을 지시하는 바이다"라고 경고(1881. 3.22일)할 정도였으니까요(일본의 <元山發達史> p.28).

나도 1882년 6월 원산을 잠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일인 무뢰배들의 행태에 대해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동인이 특히 통상 문제에 관심을 쏟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태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살펴볼 가치가 있습니다. 

이동인은 조선에 들어오는 수입품은 대부분이 서양제품이므로 서양국가가 조선과 직접 통상을 한다면 일본의 중계무역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짚고 있습니다.

이동인은 또한 1879년 봄 하나부사(花房) 초대 일본 공사를 만났을 때에도 
"일본의 조선 무역은 근래 크게 융성하고 있는 듯이 보이나 십중 팔구는 서양상품이다. 그 중에서도 서양의 목면이 가장 인기가 많다. 지금 만약에 서양의 2, 3개국 사람들이 와서 무역을 하면 조선 상인들은 모두 그 상품을 구입할 것이며 일본인이 하는 장사는 당장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그는 "(조선은 서양과 통상을 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지만) 그래도 조선과 일본은 위급할 때 서로 돕는 형제와 같으니 다른 나라 사람에게 조선의 이익을 주기보다는 일본에 이익을 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립 서비스'에 불과합니다. 만일 이게 그의 본심이었다면 밀항을 하면서까지 영국 외교관을 만나 영국을 유인할리가 없었겠지요.   

아무튼 이상의 두 자료는 이동인이 얼마나 통상 문제를 중하게 여겼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줍니다. 시대를 훨씬 앞서간 실사구시적 선각자의 면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시 일본 상인들은 유럽 상품을 주로 홍콩 등지로부터 고베, 나가사키, 오사카, 시노모세키로 수입해다가 한국에 가져와 팔았습니다. 이동인이 지적한 것처럼 수입품의 9할 가까이가 영국제 당목, 여름용 면포를 비롯한 서양제였습니다.

당시 조선에 열풍을 일으킨 인기품목은 영국산 '옥양목玉洋木'이었습니다. '옥처럼 고운 서양 옷감'이라고 해서 이름 붙여진 옥양목은 얄브스름해서 맵시가 났으므로 양반들에게 불티나게 팔렸습니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무명 옷으로 살았습니다. 

양반들이 그런 사치품을 구입하는 돈은 근본적으로 백성들을 착취한 것이으므로 죽어나는 건 백성뿐이었지요. 나는 양반들의 착취에 짓눌린 백성의 무기력한 모습을 1882년 6월 부산에서 얼핏 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러시아 땅에서는 오히려 활기찬 조선인들을 보았습니다. 러시아 땅에는 조선의 양반이 없었기 때문이죠.

또 잊을 수 없는 것은 조선의 물가였습니다. 일본에서 조선에 처음 건너가 보니 생선이며 쌀의 가격이 일본에 비해 터무니없이 낮아서 놀랐습니다. 

조선인들의 주식인 쌀은 개항 전부터 일본과 청나라에 밀수출되고 있었지만 그 양은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이후에는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쌀의 양이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일본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상품 값을 조선인들이 쌀로 치르면서 생긴 현상이었습니다.

조선의 쌀값은 일본의 3분의 1에 불과했습니다. 일본 상인들은 조선 쌀을 일본에서 되팔아 몇 배의 이익을 남겼지요. 그러한 일본의 경제침탈이 계속되면 조선은 망하지 않으래야 않을 수 없었어요. 이동인은 그 점을 꿰뚫어 보았을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수입품의 대부분은 영국제이므로 만일 조선인들이 영국과 통상관계를 맺고 직거래를 한다면 그 가격이 급락할 거고 그러면 일본인의 배를 불려줄 일도 없고 조선의 재부를 탕진할 일도 없었겠지요. 조선이 일본의 경제침탈을 벗어나려면 영국과 호혜적인 통상관계를 맺는 게 최적의 대안이었을 겁니다. 이동인은 표적을 잘 설정한 것이지요. 
 
 돈.
 돈.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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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우를 몰래 만나는 것이 허공에서 외줄을 타듯 위험천만한 모험임을 이동인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조선에 알려지면 밀항범의 국정농단농죄로 처단될 게 뻔합니다. 한편 일본인들에게 노출되면 공든 탑이 무너지고 말 겁니다. 때문에 그는 아무리 친한 일본인에게도 귀뜸을 하지 않은 채 은밀히 사토우를 접촉하였고 사토우에게도 비밀 유지를 신신 당부하였습니다.

사토우가 당시 고베에 주재하고 있던 절친이자 동료 외교관에게 보낸 편지(1880년 7월 1일자)가 증언해줍니다.  
 
친애하는 아스턴

... 이제 나는 조선어를 공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excellent opportunity)를 얻었다오. 그래서 조선어 소설책이 필요하오. 여기에서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는 것으로 보아 필시 그대에게 빌려주었던 것 같소. 지금 그대가 공부하고 있는 것 말고 다른 아무거라도 좋으니 보내주시오. 부디 이 일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누설하지 마시오. 왜냐면 조선어를 가르쳐주고 있는 그 조선인이 비밀 엄수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라오. 특히 그가 나를 계속 방문한다는 사실이 일본인에게 누설되지 않아야 하오.

그대가 여기에 있다면 이 조선인의 지극 정성과 선량한 품성(extreme willingness and good nature)의 덕을 충분히 누릴터인데, 아쉽소. "
 
이 편지에서 알 수 있듯이 사토우는 이동인을 알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겼습니다. 아울러 이동인의 인품을 예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동인이 보안에 신경을 곤두세웠음을 이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위의 편지는 사토우가 이동인을 만난지 거의 두 달 가까이 지난 뒤에야 보낸 것입니다. 절친에게 이렇게 늦게 알려준 것도 사토우가 보안에 얼마나 신경 썼는지를 시사해 줍니다.

이런 이동인의 모습이 친일파 원조의 그것일까요?

7월 중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 왔다고 사토우 일기는 적고 있습니다. 두 사람 관계가 이윽고 운명적인 단계로 진입하였음을 7월 19일 자 일기가 말해줍니다. 
 
"나는 아사노(이동인의 가명)를 데리고 케네디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케네디에게 아사노를 조선 내 영국 에이전트로 인정해 달라고 설득했다. 이 대화는 비밀로 했다. " 

매우 극적인 장면입니다. 케네디(Kennedy)는 당시 공사대리로서 공사관의 제1인자입니다(파크스 공사는 가정사로 일시 귀국). 사토우가 조선의 승려 이동인을 데리고 공관장에게 소개하면서 그를 에이전트(AGENT)로 삼자고 설득하여 성공한 것입니다. 밀항자 이동인이 대영제국의 에이전트로 변환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에이전트란 밀사, 첩보원, 대리인, 대표 등의 의미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겁니다. 당시엔 외교관을 에이전트라 부르기도 했지요.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사토우는 각서(memorandum)를 작성합니다. 이 문서에 의하면, 이동인은 사토우에게 조선인은 프랑스·미국·러시아 등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고, 독일·이탈리아·네덜란드 등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인 반면, 영국은 지금까지 조선에 어떤 통상요구도 한 일이 없으며 조선 문제에 간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이 조선에 수교를 요청하면 성사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동인의 이 발언은 당시 본국을 방문중이던 파크스 공사를 통해 외교부에도 보고되었습니다. 이처럼 이동인은 사토우를 통하여 영국의 조선인식 및 정책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것이죠.

그렇다면 이동인은 도대체 영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뼛속까지 친영주의자였을까요? 영국에 맹목적으로 편향되어 있었을까요?

그는 사실 영국제국주의의 마수성을 누구보다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1880년 4월 흥아회(興亞會)에 익명으로 투고한 글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국인이 아편을 제조한 것은 단지 이익을 거두려는 간계(奸計)에서 나온 것이요, 청국인이 그것을 불태운 것은 실로 사람을 사랑하는 선심(善心)에서 나온 것이니, 양자 간에 사(邪)와 정(正)을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도 저들은 도리어 이 일로 혐오를 조장하여 군대를 연합하여 공격해서, 또 다시 무고한 수만 명의 인명을 창과 화살촉 아래서 살육했다. 그 전에는 또한 아무 이유 없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협박해서 빼앗았다. 그 강함만을 믿고 약한 나라를 업신여긴 죄는 실로 정법(正法)과 공의 앞에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인데, 아시아인들이 굴복하여 그들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동인이 영국을 지향점으로 삼은 것은 그 마수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실로 사이정신(師夷精神: 오랑캐의 장점을 배운다)의 실천이랄 수 있습니다. 당시 조선에 그런 안목과 모험정신을 가진 인물이 출현했다는 사실 자체가 특별한 것이죠. 여태까지 조명되지 않았던 역사의 일단입니다. 

그 후 이동인의 드라마 같은 행적은 광채를 발하다가 갑자기 스러지고 맙니다.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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