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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북한으로 탈출하려 했다는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군인이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박상은. 20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출소한 박씨는 아직도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출소한 지 30년이 지난 2019년, 그는 시민단체 '지금여기에'와 원곡법률사무소의 도움으로 재심을 신청했으나 1심 법원은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증인의 증언으로 2019년 5월 26일 2심 법원인 서울고등법원에서 재심이 받아들여졌고 2020년 1월 10일 대법원으로부터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한다는 결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50여 년 만에 재심이 시작되었습니다.[편집자말]
재심 선고공판이 열린 서부지원 303호 법정
 재심 선고공판이 열린 서부지원 303호 법정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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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심 신청합니다 - 박상은 스토리]
① "난 북으로 탈출하려 하지 않았다"(http://omn.kr/1grbi)
② "암스트롱이 달 착륙할 때 난 고문 받고 있었다"(http://omn.kr/1gz5u)
③ 어느 날 걸려온 전화 "간첩 딱지 좀 떼주세요"(http://omn.kr/1gz5v)
④ 집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 남자다!(http://omn.kr/1gzko)
⑤ 아슬아슬한 재판... 50년 만에 증인이 입을 열다(http://omn.kr/1jrfj)
⑥ 범죄자 만들 땐 온 세상이 떠들썩하더니...(http://omn.kr/1l3c9)
⑦ 검찰이 불복한 재심, 50년 만에 드디어 열린다(http://omn.kr/1ma6p)
⑧ 검찰, 보안대 수사관부터 찾아라(http://omn.kr/1nnbg)
"선임병 구타 피하려다 억울한 옥살이"... 또 20년 구형한 검찰(http://omn.kr/1qv5g)

16일 오후 2시 30분 서울 서부지원 303호에서 재판장(문병찬 부장판사)이 담담히 판결문을 읽어내려갔다.

"이 사건은 1969.5. 강원도 화천 속칭 600고지에서 북한으로 탈출하기 위해 북상을 하다 검거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피고인은 1심 법원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항소, 상고 기각되었고 재심을 신청하였으나 이마저도 기각되었다가 항고하여 서울고등법원에서 인용되어 재심이 시작되었다."  

판사가 공소사실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박상은씨는 눈을 감은 채 얼굴을 들지 않았다.

재판부는 먼저 자백의 임의성에 대해 판단했다. 1969년 5월 부대로 복귀하고자 했으나 길을 잃고 헤매던 박상은씨를 발견한 최아무개 병사는 즉시 부대에 연락했고, 박씨는 사단 보안대를 거쳐 102 보안대로 인계되었다. 인계된 후 102 보안대 조사 당시 박씨는 불법 구금 상태에서 조사를 받았고, 잠을 잘 때도 수갑을 찬 채 잤다고 재판부는 판단했다.

특히 재판부는 '1969년 당시 육군교도소에서 함께 복역중이던 이현우가 박상은의 무릎 상처, 멍 자국 등을 보았고 보안대 조사에서 구타를 당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진술을 가혹 행위의 근거로 삼았다. 또 박씨가 수일간 조사받았던 102보안대에는 구치 장소가 없으며, 이렇게 적절한 구치장소도 없는 곳에서 박씨가 불법 구금 상태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판단했다.

더욱이 기존 공소사실에 따르면 박상은씨가 북한의 적진으로 도주하기 위해 600고지를 출발해 12시간 만에 637고지에 도착했다고 했으나 재심 과정에서 국방부로부터 받은 사실조회답변서에 따르면 600고지와 637고지는 바로 근처에 있어 12시간 거리가 아닌 만큼 재판부는 공소사실이 의심스럽다고 봤다.

재판부는 결국 이러한 판단을 종합해 박상은씨의 재심은 '범죄의 증명이 없을 때에 해당된다'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다시 태어난 기분"
  
선고직후 법원 앞에서 취재에 응하고 있는 박상은 씨
 선고직후 법원 앞에서 취재에 응하고 있는 박상은 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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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의 무죄 선고에 방청석에 앉아 있던 박상은씨는 울음을 터뜨렸다. 한참을 흐느끼던 박씨는 변호인에 의지해 피고인석에서 내려왔고 가족의 손을 잡고는 다시 울었다.

고문으로 무릎이 망가지고 이가 빠지는 등 후유증을 안고 평생을 살아왔지만 박씨는 이날 무죄를 통해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며 기뻐했다.

박상은씨가 무죄 선고를 받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재심신청으로부터 3년, 재심 개시로부터 2년, 아니 사건이 조작된 1969년으로부터 51년 긴 세월을 돌아 재판부로 받은 무죄 선고였다.

지난 2011년 박씨는 국가폭력피해자 지원단체인 '지금여기에'를 만나 억울함을 토로했다. 박씨와 '지금여기에'는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던 증인 최아무개씨, 문아무개씨, 최두경씨 등을 함께 찾아 나섰고 그때마다 어렵게 증인을 설득해 진실의 조각을 찾아냈다.

그렇게 준비해 시작한 재심. 그러나 서울서부지원에 신청했던 재심은 기각, 재항고, 또다시 재심 결정의 과정을 거쳤고 재판만도 열 차례나 했다. 이 기간 재심 과정의 고통과 불안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 서너 시간밖에 잠을 자지 못했다는 박상은씨는 재심 전보다 10kg 이상 몸무게가 줄었다고 한다.

어딘가에 살고 있을 책임자들
  
법원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박상은 씨
 법원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토로하고 있는 박상은 씨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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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재심을 하려 했던 이유는 가족 앞에 떳떳해지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전과자 낙인은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 모두에게 큰 고통이었다. 이날 법원의 무죄 선고에 박씨가 "가족 앞에 떳떳한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말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박씨는 전과자로 반 백 년을 살아야 했지만 이 피해에 대해 수사기관, 검찰, 법원 어느 곳도 사과하지 않았다. 51년 전 그를 고문했던 수사관들, 그의 무죄를 외면했던 군 검찰관 그리고 판사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그의 망가진 인생 앞에 사과하지 않았다.

박씨는 이날의 재심 무죄가 절반의 진실을 밝혀냈을 뿐이라고 말한다. 국가와 책임자의 사과와 처벌이 수반되어야 온전한 진실이 규명되었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란 대로 온전한 진실이 밝혀질 수 있을까.

태그:#수상한집, #평화박물관, #원곡법률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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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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