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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계단 앞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8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로텐더홀 계단 앞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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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각형 만들기'라는 활동이 있다. 각각의 참여자들이 자신과 함께 정삼각형을 만들 두 사람을 마음속으로 정하고, 그 두 사람과 나의 위치가 정삼각형이 되면 그 자리에 멈추는 활동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피스모모에서 깊이 애정하는 이 활동은, 언뜻 듣기에 간단해 보이지만 제법 긴 인내와 체력을 요한다. 나는 내가 정한 두 꼭짓점을 알지만, 나의 두 꼭짓점은 내가 그들을 꼭짓점 삼은 것을 모른 채 각각 자신들의 꼭짓점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는 나의 꼭짓점들 때문에, 다 만들어졌다고 생각했던 정삼각형은 번번이 어그러진다. 정삼각형이 영원히 만들어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질 때 외마디 탄식이 터져 나온다. "아, 쫌!" 어떤 분은 이 활동에 참여하시고 나서 이런 소회를 남겼다.

"저 민주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이 활동을 하고 보니 아니네요. 저 꼭짓점 잡아 앉히고 싶어 죽을 뻔했어요."

국회 공수처법 표결 결과를 알리는 게시판에 홀로 켜진 노란 불빛이 있었다. 정의당 소속 장혜영 의원이었다. 장 의원은 표결을 마친 후 "공수처의 독립성과 중립성 보장의 핵심으로 여겨졌던 야당의 비토권을 무력화하는 공수처법 개정안은, 최초의 준법자는 입법자인 국회여야 한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훼손"하기 때문에 반대를 누르고 싶었으나, 당론을 존중하여 기권표를 던졌다는 뜻을 밝혔다.

장혜영의 기권표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자기 소신대로 표결한 것에 대한 지지, 당론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 공수처 설립이라는 숙원 사업에 찬성하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이 한데 엉켰다. 누군가는 장혜영 때문에 정의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겠다고 했고,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장혜영을 지지하겠다고 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삼각형 활동을 떠올렸다. 그 참여자 말마따나 삼각형 활동은 민주주의의 지난함을 여실히 담고 있다. 다 맞추어졌나 싶으면 어그러지고, 좀처럼 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나의 꼭짓점들을 마주하며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아니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왜 대체 내 마음 같지 않은 것일까.

민주주의의 묘미는 바로 여기, 내 마음 같지 않음, 에 있다.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 이견을 마주하는 것은 예견된 일이며 필연적인 사건이다. 공수처법이 찬성 187명, 반대 99명, 기권 1명으로 가결된 상황에서 한 명의 기권이 몸서리치게 놀랄 일인가. 노란불 말고, 아예 불을 켜지 않았던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은 당의 징계도 감수하겠다고 했다. 당론에 따르지 않으면 징계를 받아야 하는가. 과연 그런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전체주의가 순간순간 유령 같은 낯빛을 비춘다. 비단 국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다수와 소수는 상대적이어서 소수의 사람들 안에서도 다수와 소수로 나뉘어 순수성의 이름으로, 정당성의 이름으로 소수의 목소리를 변절·배신·이탈로 낙인찍고는 한다.

의무교육을 받는 과정에서 나는 "다수결이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배웠다. 시험문제에 "다수결은 □□□□의 □"이라는 빈칸 주관식 문제가 나왔던 것을 기억하며 연필로 '민주주의', '꽃'이라고 적어 내려가던 순간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꽃은 시들지만, 건강한 뿌리는 또 새로운 꽃을 피워 낸다. 그러니까, 민주주의의 핵심은 뿌리, 미세하고 가녀린 모세혈관 같은 그 풀뿌리들에 있다.

식물들이 뿌리를 통해 소통한다는 연구 결과를 흥미롭게 읽었다. 내가 뿌리를 이쪽으로 이만큼 뻗었으니 너는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 양분을 취하라는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살린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식물이 하나의 꽃을 피워 올리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생명들이 뒤얽혀 살아가는 생태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겨울을 나고 또 봄을 맞이하는 이 모든 과정이 민주주의이며, 서로서로 각자의 꽃을 조화롭게 피우고 또 시들어 갈 수 있는 사회가 민주 사회여야 하지 않을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전쟁을 결정하고,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파병을 결정한다.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의 죽음을 방치하고 소수의 고통을 묵인한다. 각각의 집단이 경쟁적으로 자기 집단의 꽃만 피우기에 몰두할 때, 경쟁적으로 그 양분을 빨아들일 때, 땅은 서서히 상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다다르지 않는가. 지금 우리가 그런 지구에서 살고 있지 않은가.

신호등의 노란불은 약 3초간 지속된다. 빨간불과 파란불 사이에서 멈추어 정비할 수 있는 시간, 숨을 고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노란불. 나는 장혜영의 노란불이 고맙다. 빨간불과 파란불 사이에서 홀로 노란 불빛, 흔들리듯 명멸하는 그 불빛은 다수결의 바다에서 아득하게 비추어 오는 등대의 불빛 같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필자가 진행하고 있는 뉴스앤조이 연재 칼럼 "모두를 위한 평화"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태그:#장혜영, #민주주의, #다수결, #기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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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스모모 대표, 평화와 교육에 관련한 활동을 하고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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