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포스터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포스터 ⓒ 오드 AUD

 
누구나 한 번쯤 본 적 있는 노랗고 검은 점박이 '호박(PUMPKIN 1994)'. 마치 우주 한복판에 있는 듯한 '무한 거울 방(INFINITY MIRROR ROOM 2013)'은 수많은 패러디와 위작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여성 아티스트 중 역대 경매가 1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관객을 보유한 작가, 2016년 타임지 선정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선정'이라는 타이틀이 익숙하다. 독특한 예술가의 작품은 시쳇말로 '인스타용 인생샷'이라 불리며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 인스타그램에 올릴만한 것)의 성지로 알려져 있다. 매회 전시장을 입장하려는 긴 줄의 장본인이기도 한 작가는 다름 아닌 '쿠사마 야요이'다.

강박 트라우마가 만든 무한의 세계
 
쿠사마 야요이는 1929년 일본 마쓰모토 시에서 태어났다. 대대로 종자 사업을 하던 외갓집은 언제나 꽃이 넘쳐났다. 어느 날 가족 농장에 걸어 들어간 적 있는데, 그날 받은 충격은 삶의 방향을 180도 바꾸어 놓았다.

환청은 환영이 되었다. 쿠사마 야요이는 끝없이 펼쳐지는 꽃밭을 보고 자연과 우주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릴 뻔했다고 털어놨다. 그때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를 그물 패턴, 폴카 도트(dot)의 향연은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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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 오드 AUD

 
그는 남근을 소재로 한 작품도 선보였는데 이는 데릴사위였던 아버지의 잦은 외도와 이를 감시하라는 어머니의 종용이 만들어낸 결과다. 유복한 집안이었지만 사이가 좋지 않은 부모를 보고 자란 탓에 쿠사마 야요이는 정신적 트라우마를 겪는다. 어릴 때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보는 순간 빠르고 맹렬하게 그리는 작업 방식을 터득했다. 밑그림도 없이 떠오르는 순간 그리다 보면 마르지 않는 샘처럼 연속적인 아이디어가 솟아났다고 한다.
 
하지만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여성 화가로 입지를 다지기는 어려웠다. 1952년 마츠모토에서 첫 개인전을 열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1957년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의 도움을 받아 일본 예술가 중 최초로 뉴욕에 진출했다. 동양에서 온 여성 화가라는 이색적인 타이틀로 큰 회화, 부드러운 조각, 환경 조각품 등을 작업하며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미국 예술 시장은 남성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여성 미술상조차 여성 작가의 작품을 꺼릴 만큼 완고한 진입장벽이 있었다. 신인 작가이자, 여성, 이방인이었던 쿠사마 야요이는 그 틈에서 어렵사리 남성 예술가와 그룹전을 열지만 이내 상처를 입고야 만다. 이미 주류 작가였던 앤디 워홀과 클래스 올덴버그가 아이디어를 도용했던 것. 어떠한 항변도 할 수 없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게 되고, 첫 번째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미국으로 떠나며 2천여 점의 작품을 불태워 이전 작품보다 더 나은 것을 그리겠다고 결심했던 그녀였기에 그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가난하고 보잘것없었지만,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려야만 했다. 1960년대 후반 들어 그는 미술계의 고루한 행동에 반기를 들기 시작한다. 미국 최초 동성애자 결혼식, 보디 페인팅 축제, 반전 시위를 펼치며 전위예술을 선보인다. 미국에서 미술사를 다시 쓰고 싶다는 일념으로 후원자를 직접 찾아다녔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나갔다.

이후 체제 전복 아이콘으로 떠올랐지만 서양 남성 중심의 예술 시장에 환멸을 느끼고 1973년 고국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녀를 반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 예술계는 가십거리로만 대했고 예술가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가족들마저 등 돌리자 우울증은 심해져 또다시 극단적 선택을 한다. 결국 1976년 악화되는 병세를 자각하고 세이와 정신 병원에 자진 입원해 치료를 병행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갔다.
 
꾸준한 치료와 창작활동이 결국 빛을 보기 시작한 걸까. 그는 1989년 미국을 떠난 지 16년 만에 재평가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뉴욕 국제현대미술센터에서 '쿠사마 야요이: 회고전'을 개최하며 모든 작품을 전시하기에 이른다. 이후 그동안의 시련을 보상받기라도 하듯 오늘날까지 승승장구한다. 1993년 국가 대표로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받아 개인전을 개최한 뒤 1994년 야외 조각품을 만들기에 열중하는 등 쿠사마 야요이는 20세기를 화려하게 마무리한다.

그녀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사랑받고 있다. 또한 루이비통, 조르지오 아르마니, 아우디, 랑콤, 코카콜라, 뵈브 클리코 등 브랜드와 꾸준한 협업으로 대중적 인기도 얻고 있다.

살아있는 현대 예술의 거장
  
 영화 <쿠사마 야요이> 스틸컷

영화 <쿠사마 야요이> 스틸컷 ⓒ 오드 AUD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보적인 스타일은 쿠사마 야요이의 불안했던 정신세계를 들여다보는 창(窓)이라 할 수 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던 패턴, 환(環), 정신병력, 건강 집착, 트라우마, 성(性) 공포는 창작으로 승화되며 숨어있던 자아까지 발견할 수 있게 했다. 또한 관객이 주인공인 기존 미술 사조를 뒤엎으며 작가가 주인공인 작품의 탄생이란 전환점을 만들기도 했다. 그는 독특한 패션 센스로 사람의 관심을 끄는 방법, 대중 예술의 수요를 일찍 알아낸 뛰어난 나르시시스트다.
 
그는 전쟁을 겪은 세대로서 평화와 반전을 부르짖으며 사랑의 메시지도 전파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명성과 부를 이루었으나, 오늘도 병원을 걸어 나와 작업실로 출근하는 생활을 하며 치열하게 산다. 한때 죽을 각오를 했지만 죽지 않고 끝까지 살아가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그녀는 트라우마를 생산적으로 관리하는 데 도가 텄다.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는 마치 그녀의 창작 노트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92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왕성한 창작욕구를 보인다. 더불어 그의 무한 창작 세계는 전 세계인의 영감이 되고 있다.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스틸컷

영화 <쿠사마 야요이: 무한의 세계> 스틸컷 ⓒ 오드 AUD

쿠사마 야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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