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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단위를 운행하는 버스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주로 이용한다. 코로나19로 장이 서는 날이 아니면, 빈자리가  많은 채로 운행된다.
 면 단위를 운행하는 버스는 나이 드신 어르신들이 주로 이용한다. 코로나19로 장이 서는 날이 아니면, 빈자리가 많은 채로 운행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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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면 단위를 운행하는 시내버스에 올랐다. 코로나19로 운행 횟수가 줄고, 승객도 적어진 데다, 버스에 오르는 승객들이 단말기에 버스카드를 대는 족족 "행복 충남입니다"라는 멘트뿐이다. 이 지역에 사는 만 75세 이상의 노인 승객이 많더라는 얘기다.

여느 시골 버스에서 보듯 버스 기사와 안면을 튼 승객이 여럿이다. 이날도 첫 손님은 가방에서 사탕과 초콜릿을 한 줌 꺼내 기사분께 건넨다. 기사 양반은 두 번째 승객인 할머니 한 분이 보자기 꾸러미를 들고 버스에 오르자 대뜸 묻는다.

"오늘은 보자기에 뭣 들었슈?"
"들깨랑 병 몇 개 들었어."


고의는 아닌데, 둘의 대화가 귀에 꽂혔다. 아마도 할머님은 농사지은 들깨를 볶아 기름을 짜시려나 보다. 사시는 동리에는 방앗간이 없는지 그 연세에 짐을 잔뜩 짊어지고 시내까지 나가신다. 

"전에 할머니한테 찹쌀 산 적도 있는데, 요즘은 집 근처 마트에서도 찹쌀을 파니까 거기서 사유."

다음 정류장에 버스가 설 때까지 둘 사이에는 이런저런 이야기가 계속 오갔다.
     
떡집에서 만든 떡을 사 먹는 소비자도 있지만, 여전히 방앗간에 쌀을 맡기고 떡을 찌는 사람들도 많다.
 떡집에서 만든 떡을 사 먹는 소비자도 있지만, 여전히 방앗간에 쌀을 맡기고 떡을 찌는 사람들도 많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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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할머니나 어머니와 시장 방앗간에 다니던 기억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비교적 생생하다. 명절마다 쌀가루를 빻거나 떡가래를 빼러 시장에 가실 때면, 안 된다고 막아서는 날에도 기어코 따라나서겠다고 졸라댔다. 혼자 집에 있느니 사람 많고 구경거리 많은 방앗간이 훨씬 재미있었을 테니 똥고집을 부린 게다.

하지만, 기름을 짜는 날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어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것에게 "기름병, 잘 지키거라." 신신당부한 후, 어물전이나 채소전으로 장을 보러 내빼곤 하셨다. 혼자 방앗간에 앉아 있으면 안면 있는 주인아주머니가 아무리 친절하게 이것저것 챙겨줘도 다정히 말을 걸어와도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이제나 저제나 어른들이 빨리 오셨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이제 그 옛날 자주 다니던 뽀글머리 아주머니네 방앗간도, 사람들 다니는 길목 가까이 수도가 있던 방앗간도, 자취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농사지은 참깨, 들깨를 방앗간에 들고 와 기름을 짜 달라는 손님도 있고, 방앗간에서 파는 깨로 기름을 짜기도 하고, 이미 짜 놓은 기름을 사가는 손님도 있다. 중국산이나 인도산 깨가 판치다 보니 자식들에게 좋은 기름을 먹이고 싶은 어르신들은 직접 깨를 팔아 오고, 장시간 지키고 앉아 기름 짜는 걸 구경하다 들고 가신다.
 농사지은 참깨, 들깨를 방앗간에 들고 와 기름을 짜 달라는 손님도 있고, 방앗간에서 파는 깨로 기름을 짜기도 하고, 이미 짜 놓은 기름을 사가는 손님도 있다. 중국산이나 인도산 깨가 판치다 보니 자식들에게 좋은 기름을 먹이고 싶은 어르신들은 직접 깨를 팔아 오고, 장시간 지키고 앉아 기름 짜는 걸 구경하다 들고 가신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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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앗간 앞을 지나다  멥쌀, 보리, 현미, 대두, 옥수수 등의 곡물을 볶아서 식히는 광경을 보게 됐다. 미숫가루를 낸다는데, 잘 식혀서 빻아야 한단다. 볶은 곡물을 골고루 펴서 식히는 데 쓰이는 빗자루가 닳고 닳아 자루만 남아 있다.
 방앗간 앞을 지나다 멥쌀, 보리, 현미, 대두, 옥수수 등의 곡물을 볶아서 식히는 광경을 보게 됐다. 미숫가루를 낸다는데, 잘 식혀서 빻아야 한단다. 볶은 곡물을 골고루 펴서 식히는 데 쓰이는 빗자루가 닳고 닳아 자루만 남아 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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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래시장에 나가 보면 경기가 안 좋아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상인들이 많다. 그에 비해 한 곳에서 20~30년씩 장사를 이어오는 방앗간은 제법 손님이 차 있다. 버스 안에서 뵀던 할머님처럼 기름을 짜러 오는 분도 있고, 자식들 찾아오면 먹이려고 미숫가루 주문차 걸음 하는 분도 계시다. 워낙 수입 곡물이 많고, 심지어 먹는 것으로 장난치는 못된 인사들이 있다 보니, 번거로워도 믿을 수 있는 먹거리를 찾아 나선 이들도 한몫 거들었을 게다.
   
우리 전통 곡차 중 가장 대중적인  '보리차'는 겉보리를 볶아 끓인다.
 우리 전통 곡차 중 가장 대중적인 "보리차"는 겉보리를 볶아 끓인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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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를 바싹 말려서 볶은 후 끓는 물에 우려 마시는 '옥수수차'는 '강냉이차'라고도 부른다. 볶은 옥수수는 가루 내 물에 직접 타 먹기도 한다. 이뇨 작용을 하는 옥수수수염을 말려 차로 이용할 수도 있다.
 옥수수를 바싹 말려서 볶은 후 끓는 물에 우려 마시는 "옥수수차"는 "강냉이차"라고도 부른다. 볶은 옥수수는 가루 내 물에 직접 타 먹기도 한다. 이뇨 작용을 하는 옥수수수염을 말려 차로 이용할 수도 있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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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지나다 보니, 시장 방앗간 매대에는 볶은 겉보리와 옥수수가 팔리고 있었다. 보리차나 옥수수차는 마트나 인터넷쇼핑몰에서 티백이나 페트병 형태로 제품 구매가 가능하다. 차 종류도 다양하여 허브차, 마테차, 보이차, 캐모마일 등 미용, 건강을 챙기는 사람들이 늘면서 차 종류가 얼마나 많아졌는지 모른다. 그래도 보리차와 옥수수차처럼 저렴하면서 구수하니 물리지 않는 음료는 드문 것 같다.

나 어릴 적 풍족하지 않던 시절에도 수돗물을 직접 음용하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학교에서도 잔심부름하시던 '소사(小使)' 아저씨가 늘 보리차나 결명자차를 큰 솥에 끓여 놓았었다. 주번은 청소를 대충 마치면, 큰 주전자에 그걸 퍼다 급우들 마시라고 교실 뒤편에 갖다 놓았다.

일반 음식점이며 찻집에서도 으레 손님이 들면 보리차를 내놓았다. 물론 집에서도 큰 솥 가득 보리차를 끓여 차갑게 하거나 따뜻하게 마셨는데, 지금처럼 정수기를 갖춰 놓거나 생수를 배달해 먹지는 않았어도 먹는 물에 있어서만큼은 호사를 누렸지 싶다.

어느 해 여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의 어린 사촌동생이 집에 놀러 온 날이다. 쏴!' 사촌동생이 수돗가 쪽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오줌을 누어댔다.

"그놈 참, 시원하게도 싼다."

어른들 칭찬에 오줌발은 이리저리 춤을 추었다. 아버지께서 헐레벌떡 뛰어와 사촌동생을 가로막기 전까지 그 누구도 뒷수습이 힘든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날 사촌동생이 정조준하여 오줌을 갈긴 곳은 삼대가 먹을 보리차를 한 솥단지 끓여서 식히던 커다란 고무대야였다. 끓이는 데도, 식히는 데도, 긴 시간이 걸렸던 보리차는 결국 하수구로 직행했다. 어느덧 세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는 사촌동생은 자신은 그런 거사를 벌인 적이 없다며 모르쇠로 일관한다.

방앗간은 나이 드신 어르신들과 착한 먹거리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이 이용하여 그나마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착유한 기름, 팩에 싸인 떡, 가공된 음료에 익숙해지는 사이 방앗간 수는 줄어가고 있고, 방앗간을 둘러싼 추억 또한 향미 잃은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빈들에 홀로 서 있는 허수아비 된 양 헛헛하고 서글프다.

태그:#공주산성시장, #방앗간, #들기름, #참기름, #떡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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