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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의 상징과 같은 막걸리집 '고모집'의 고모(본명 한은예)가 지난 11월 20일 눈을 감았다. 고모는 지난 1993년 고모집을 떠나기 전까지 23년 동안 '눈에 넣어도 안아프다'는 고대생들과 따뜻한 우정을 쌓았다. 그 고모집의 단골이었던 고대 국문과 졸업생인 권무혁씨(85학번)가 고모를 추억하는 글을 썼다. [편집자말]
 고대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의 생전의 모습
 고대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의 생전의 모습
ⓒ 권무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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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가 우리 곁을 떠났다.

2020년의 가을이 깊어가던 날. 그날 고모는 수골된 한 줌의 재가 됐다. 그리고 문산의 어느 농장 하늘 위에 흩뿌려지며 이 세상과 이별했다. 빼곡히 기록했더라면 책 몇 권으로도 턱없이 부족했을, 고대생들과 나눴던 그 수많은 사연들과 기억들을 보듬은 채. 고려대학교 앞 막걸리집 '고모집'에서 23년이라는 긴 시간 격정에 들끓었던 고대생들 가슴에 화인처럼 잊지 못할 추억을 새겨준 그 고모가.

고 한은예 여사. 고모 본명이다. 1929년에 태어나 2020년에 돌아가셨으니 향년 92세가 된다. 그런데 주민등록(호적) 나이가 2년 빨라 실제로는 90세다. 오랫동안 고모 이름이 한정숙 여사로 알려졌었는데 고대생과 관련된 작은 싸움과 관련 있다. 당시 싸움을 말렸던 고모가 어쩌다 경찰서 조사까지 받게 되었는데, 진짜 이름을 밝히면 안 될 사정이 있어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막내여동생 이름인 한정숙이라고 풍(?)을 쳤던 것.
 
 고대의 상징과 같았던 막걸리집 '고모집'. 1대 고모 한은예 여사에 이어 2대 고모가 아직도 운영하고 있다.
 고대의 상징과 같았던 막걸리집 "고모집". 1대 고모 한은예 여사에 이어 2대 고모가 아직도 운영하고 있다.
ⓒ 구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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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사발의 시간들을 묻어두고 세상과 작별하다

고모 아들인 춘근 형 전언에 의하면 고모는 지난 11월 20일 숙환으로 돌아가셨다. 장례는 코로나19가 다시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 치러졌다.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만 모인 조용한 가족장이었다. 이틀 후 '납골당은 답답해서 싫다'는 고인의 뜻에 따라 넓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벌판 위 둔덕 너머로 고모의 유골이 뿌려졌다. 그날 저녁 난 춘근 형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 대번에 느낄 수 있었다. '아, 고모가 세상을 뜨셨구나.'

위패를 모시지도 않은 초라한 장례식, 그보다 더 쓸쓸했을 허허벌판에서의 이별. 그렇게 고모는 떠났다. 단 한 명의 고대 졸업생 배웅도 없이. 아주 오래전 고모와 나누었던 뭉클한 사연을 잊지 않은 채 한걸음에 달려와 뒤늦게나마 그 마음에 보답하고 싶어 할 졸업생들이 적지 않으련만. 쉴새없이 막걸리만 탐하고 주사를 피우던 그 옛날 가난뱅이 대학생의 술잔도 받으시고, 이제는 데모쟁이가 아니라 버젓한 사장님이 되고 교수님이 된 그들의 두툼한 봉투도 받고 가셨으면 좋으련만.

자신을 쫓은 발자국마저 이별할 만큼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뒤 우리의 기억은 희미해지며 또 잊히는 법. 그러다가 가끔씩 소환하는 젊은 날의 아련한 잔상, 또 그 속에서 선명히 떠오르는 가장 뜨거웠던 순간들과 표상. 거기에 언제나 고모집 고모의 얼굴이 있었다, 내 머릿속엔 늘. 아마도 고대생이었고 고모집에서 숱한 밤들이 보낸 사람이라면, 가장 들끓었고 아프고 시린 젊은 날의 취기를 막걸리 사발에 담아 격렬하게 분출했었던 시간들을 묻어둔 사람이라면 마찬가지였으리.

고모 역시 그 소중한 시간을 끌어안고 이 세상과 작별했음이 틀림없다. 돌아가시기 전날, 술고래 고대생 아그(?)들이 그립다며 잘들 지내는지 물어보셨다 했다. 또 고대 앞 고모집 생활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었다 했으니.
 
 고대의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의 생전의 모습
 고대의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의 생전의 모습
ⓒ 권무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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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가장 엄마의 긴 노동이 끝나던 날

고모집은 고대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고 또 고모는 많은 선배들의 '고모 사랑'으로 인해 여러 차례 언론 방송을 타면서 전국적인 명사가 됐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고모 인생은 참으로 고단했다. 1970년 고모집을 연 후 세 남매를 키우기 위해 단 하루도 게으름을 피울 수 없었던 가장(家長) 엄마였다. 밤 11시, 12시가 다 돼서야 끝나는 술고래 고대생들이 술판 뒷자리에 남는 것은 언제나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더미들. 당신의 안방마저 늘 학생들의 술자리로 내어주곤 제대로 쉬지도 못했던 긴 노동. 이른 아침이면 전날의 흔적을 치우고 가게 구석구석을 청소하며 점심 때부터 쳐들어올 술꾼들 맞을 준비를 해야 했던 오랜 시간. 무려 23년 간의 그런 일상.

그러고선 1993년 고대생들의 눈물을 뒤로 한 채 1톤 트럭의 반도 안 되는 짐을 싣고 고대를 떠나간 고모. 후일담으로 들은 얘기지만, 고모는 혹독한 노동의 대가를 호되게 치러야 했다. 은퇴 후 건강이 많이 악화돼 제법 많은 기간 병치레에 시달렸다 한다. 워낙 건강 체질에 호탕한 기질을 가진 고모는 몇 년 만에 건강을 회복했지만, 경제적으로는 퍽 궁핍했었던 모양이다. 고대생들에게 많은 사랑 퍼주고 백 권도 족히 넘었을 학생증 외상장부를 '마음속 적금통장'에만 넣어둔 채 떠났던 그 후과였을지도.

3년 전 나는 고모를 만났다. 국문과 잔당(?)들 50여 명이 고모를 다시 모시고 고모집 옆 풍년집에서 잔치를 벌였던 게 아마 20세기 끝자락인 1998년인지 1999년도쯤이었으니 근 20년 만의 해후인 셈이다. 2000년대 들어서도 가끔씩은 고모집에 들렀어도 진짜 고모가 없는 허전함. 머나먼 곳 제주에 살고 있을 때 고모가 사망했다는 신문기사를 접하며 송구함과 황망함에 미칠 것 같았었는데... 아, 그 기사는 잘못된 것이고 고모는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소식!

주체할 수 없는 흥분감. 연락처를 확인한 다음날 곧바로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고모가 계시는 파주로 향했다. 고모집 안방에서 숱한 밤을 함께 보냈던 과 동기 단짝 친구 구현석이 동행했다. 그는 고모가 가장 이뻐해서 조카사위로 삼으려 했던, 30년 가까이 오롯이 횡성에서 농민운동을 하고 있는 자랑스런 고대인이다.
 
 고대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와 필자 권무혁씨.
 고대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와 필자 권무혁씨.
ⓒ 권무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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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와 고대 국문과 졸업생 구현석씨.
 고대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와 고대 국문과 졸업생 구현석씨.
ⓒ 권무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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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골을 호령하던 여걸의 카리스마

20년 만의 만남. 어찌 극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현관 문을 열고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이게 꿈이 아닐까 하는 확대된 고모의 동공. 이내 눈시울이 불거지도록 껴안고 또 껴안고, 그리고 이어진 쉴새없는 폭풍 수다. 고모는 여전히 해맑았고 장밋빛 구라(?)는 녹슬지 않았다. 구순을 눈앞에 둔 할머니답지 않은 곱디 고운 손이었고 격한 노동의 흔적인 굳은살은 보이질 않았다. 많이 야위었고 보청기를 써야 할 정도로 청력은 많이 떨어졌지만 안암골을 호령하던 여걸의 카리스마는 그대로였다.

고모의 화법은 늘 직설적이다. 결코 우회하거나 망설이지 않고 바로 과녁으로 향하는 직설의 멘트와 위트. 거기에 촌철살인의 해학까지 덧붙인 옛이야기를 듣노라면 모든 것을 놓아 버린 채 통쾌함에 잠식되고 만다.

고모는 2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의 힘겨움은 다 버린 듯했다. 오로지 고대생들과 공동으로 연출했던 수백수천의 드라마 씬 중에서 가장 리얼하고 배꼽을 쏙 빼고야마는 포복절도의 희극만을 담고 있었다. 언제든 다시 떠올려도 가슴 벅차고 흐뭇했던, 그래서 가장 행복했던 그 기억만으로 23년을 재구성하고 있었다. 당연히 고대를 떠난 24년 간의 시간도 그 연장이었고.

그 이듬해에도 현석이랑 고모를 만나고 또 수다를 떨었다. 하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찾아뵙겠다는 약속은 허언이 됐다. 한 해가 저물 때 즈음이면 가봐야지 하다가도 지친 육신 핑계로 손을 놓아 버렸던 게으름, 그래서 더 세차게 밀려오는 송구함. 하필이면 고모 돌아가시던 그 주에 늦게나마 고모를 방문하겠다며 계획을 세웠다는 과 동기들의 뒷이야기까지. 얄궂은 심정에 더 얼굴이 화끈거린다.

시간을 1980년대로 되돌려 보면, 난 고모집 근처를 기웃대는 굶주린 하이에나였다. 수없이 야단을 맞으면서도 이른 아침부터 해장국을 달라며 떼를 쓰고 기어이 난로 옆자리에 앉아 국물을 들이키던 룸펜 거지였다. 또 저녁이 되면 어김없이 일행들을 이끌고 끝도 없이 막걸리를 퍼붓던 내게 "안주는 안 먹고 또 술만 처마신다"며 불호령을 내리곤 했다. 야단만큼 정이 든 것일까. 그랬다. 고모는 불호령의 고수였고 우리는 그 앞에 늘 주눅이 든 여린 학생이었다.

때로는 형형한 눈빛으로 매섭게 야단을 치고 또 어떨 때는 흐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좌중을 폭소케 하는 농(?)을 던지는 희극배우. 그러면서도 한없이 속이 깊은 휴머니스트였다. 정보기관과 경찰에 의해 폭행당하고 끌려가는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면서 늘상 안타까워했고 배를 곯는 학생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고모집 터줏대감이었던 부랑자 '충성아저씨'를 매일같이 타박을 하면서도 정작 어디서에선가 쓰러져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버선발로 달려가곤 했었다.
 
 고대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와 고대 국문과 졸업생 권무혁.구현석씨
 고대 막걸리집 "고모집" 고모와 고대 국문과 졸업생 권무혁.구현석씨
ⓒ 권무혁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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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사랑스러운 고대생들..."

고모가 고대 앞에서 터를 잡은 햇수가 23년이고 그로부터 우리와 멀어져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시간까지는 27년이 된다. 그렇게 보면 고모는 무려 반세기 동안 고대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아니, 기억하려 한다면 더 오랫동안 추억할 수 있을 터. 지금은 흐느끼듯 고모를 추억하고 있지만, 난 앞으로 따스한 봄볕의 고모 얼굴을 그리워하려 한다. 지난 시절 여리고 비겁했으며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치열하고 용감했던,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빛났던 시간을 송두리째 저장하고 있는 곳이기에.

땅거미의 어스름을 밟을 때면 늘 향했던 후미진 그곳은 선배들의 손때 묻은 흔적과 함께 이지러진 영혼들이 결기를 세우려 울부짖었던 곳이다. 잿빛 하늘에 방황하며 막걸리와 함께 눈물을 삼키며 목놓아 노래를 불렀던 곳. 어느 날 사발을 들이키며 그 허연 막걸리를 제기천 '세느강'에 쏟아붓고는 시커먼 개천에 비친 별빛이 너무 슬플 수도 있다는 걸 느꼈던 곳. 어느 선배의 구슬픈 노랫자락이 울려퍼져 진혼곡으로 휘감으며 가슴을 후비는 아픔이 견딜 수가 없었던 그때에도,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진 선후배를 기다리면서 퍼부어 마시던 그때에도, 격렬히 외치며 출정을 준비할 때에도 고모는 늘 우리 곁에 있었다. 젊음을 산산히 흩뿌렸던 그 작은 광장에서 고모는 우리를 지키는 보호자였고 어머니였다.

1993년 KUBS(고대방송국)가 촬영한 <고모가 가시는 날> 방송 말미에 이런 인터뷰가 나온다.

"눈에 넣어도 전혀 아프지 않은 사랑스런 고대생들. 평생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지만 고대생 사랑은 듬뿍 받았다."

그런 고모를 추모한다.

'고모님! 조문도 못 간 미욱함을 책망해 주시고요. 그곳에서 기다리시다가 아직도 외상값 못 갚은 고대생들이 오면 강남 아파트 1평과 학생증 바꾸셔서 함께 즐겁게 쉬시길...'

덧붙이는 글 | 이 추모글은 고대 국문과 졸업생인 권무혁씨가 고대민주동우회의 청탁을 받아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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