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시즌 예년과 다른 여자프로농구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외국인 선수가 없다는 점이다. 공수에서 각 구단의 전력에 큰 역할을 담당하던 외국인 선수가 빠지면서 이번 시즌 경기당 평균 71.83득점으로 68.9득점이었던 지난 시즌에 비해 리그 전체의 득점력이 한층 나아졌다. 특히 지난 시즌 단 12명에 불과했던 두 자리 수 득점 선수가 이번 시즌엔 무려 20명으로 증가하면서 흥미로운 다득점 농구가 이어지고 있다.

외국인 선수가 한시적으로 사라지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난 몇 시즌 동안 WKBL을 양분했던 KB스타즈와 우리은행 위비가 여전히 양강구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특히 KB의 박지수는 득점(25.78점)과 리바운드(15.11개), 블록슛(3.11개) 부문에서 모두 1위를 달리며 외국인 선수 없는 WKBL을 '박지수 천하'로 만들고 있다. 박지수 덕에 편안하게 외곽슛을 던지는 슈터 강아정도 3점슛 부문에서 24개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한편 외국인 선수에게 골밑을 의존해 오던 우리은행의 선전은 다소 의외다. 우리은행은 팀 내에 골밑을 맡길 만한 정통빅맨이 없음에도 김소니아, 김정은 등의 헌신으로 KB에게 한경기 뒤진 2위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정작 우리은행에서 가장 많은 리바운드를 걷어내는 선수는 따로 있다. 올해로 프로에서 세 번째 시즌을 맞는 박지현이 리그 정상급의 활약을 펼치며 박혜진이 부상으로 빠진 우리은행의 새 에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4.8%의 확률 뚫고 지명한 여고농구 특급 유망주
 
 개막전에서 박혜진이 부상으로 이탈할 때만 해도 우리은행의 이번 시즌 전망은 매우 어두웠다.

개막전에서 박혜진이 부상으로 이탈할 때만 해도 우리은행의 이번 시즌 전망은 매우 어두웠다. ⓒ 한국여자농구연맹

 
WKBL의 6개 구단들은 저마다 팀 내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에이스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농구가 5명이 하는 운동이고 WKBL은 워낙 에이스에 대한 의존이 심한 리그라 에이스가 부상 등의 이유로 전력에서 제외된다면 팀에는 엄청난 타격이 될 수 밖에 없다. 박지수가 없는 KB나 김단비가 없는 신한은행 에스버드, 강이슬이 없는 하이원큐를 상상하기 힘든 이유다.

현재 우리은행은 팀 내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에이스 박혜진 없이 시즌을 치르고 있다. 시즌 개막 전부터 족저근막염 부상에 시달리던 박혜진은 지난 10월 10일 KB와의 개막전에 선발 출전했지만 5분도 채 뛰지 못하고 교체아웃됐다. 그로부터 약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났고 11월에는 3주에 걸친 제법 긴 휴식기까지 있었지만 박혜진은 여전히 코트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박혜진은 말이 필요 없는 현존하는 여자프로농구 최고의 선수다. 이미 20대의 젊은 나이에 우리은행의 통합 6연패를 이끌었고 5번의 정규리그 MVP와 3번의 챔프전 MVP를 휩쓸었다. WKBL 역사에서 박혜진보다 정규리그 MVP를 많이 수상한 선수는 현역시절 '바스켓퀸'으로 불리던 정선민(7회) 뿐이다. 박혜진은 이제 만30세에 불과해 향후 충분히 정선민을 넘어 역대 최고의 선수가 될 가능성이 높은 선수다.

그런 대단한 존재감을 가진 에이스가 빠졌다는 것은 우리은행에게는 엄청난 전력손실이 아닐 수 없다. 단순히 득점이나 리바운드,어시스트 같은 개인기록뿐만 아니라 박혜진이 코트에 있는 것만으로도 동료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고 상대의 기를 죽이는 효과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시즌 우리은행은 박혜진 없이도 충분히 좋은 시즌을 보내고 있다. 프로 3년 차 박지현의 존재 덕분이다.

숭의여고 시절부터 엄청난 유망주로 불리던 박지현은 자신이 출전한 모든 국내 대회의 우승을 쓸어 담았다. 2016년 U-17농구월드컵에서도 한국의 에이스로 활약한 박지현은 득점1위(16.5점), 스틸 2위(3.3개)를 기록하며 국제 무대에서도 통하는 선수임을 증명했다. 그리고 박지현은 2018-2019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고작 4.8%의 확률을 가지고 있던 우리은행에 지명됐다. 우리은행으로서는 엄청난 행운이었다.

전 부문 상위권에 빛나는 우리은행의 신형엔진
 
 박지현은 공격할 땐 가드처럼 움직이다가 리바운드 경합이 벌어지면 센터로 돌변한다.

박지현은 공격할 땐 가드처럼 움직이다가 리바운드 경합이 벌어지면 센터로 돌변한다. ⓒ 한국여자농구연맹

 
박지현은 가드 포지션의 선수지만 신장(183cm)과 골밑에서의 투쟁심이 워낙 좋아 고교 시절부터 많은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선수로 유명했다. 우리은행 입단 후에도 박혜진이라는 걸출한 선배의 존재로 인해 루키 시즌에는 가드 역할보다는 가드와 포워드를 넘나들며 활약했다. 입단 첫 해 8득점3.73리바운드1.67어시스트를 기록한 박지현은 고교 시절의 라이벌인 이소희를 제치고 신인왕에 선정됐다.

루키 시즌 20분 남짓한 출전시간을 가지는 조연이었던 박지현은 프로 2년 차 시즌부터 풀타임 주전으로 도약했다. 팀의 간판 포워드 임영희(우리은행 코치)가 현역 생활을 마감하면서 박지현이 그 자리에 들어간 것이다. 박지현은 지난 시즌 3점슛 성공률이 22.7%에 그치며 외곽에서 약점을 보였지만 8.37득점5.56리바운드3.44어시스트로 소포모어 징크스 없이 한층 성장한 기량을 과시했다.

지난 시즌까지 슈팅가드와 스몰포워드를 오가는 스윙맨으로 활약하던 박지현은 이번 시즌 박혜진의 부상 이탈로 포인트 가드 역할을 맡게 될 거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가드 포지션에서 김진희라는 뜻밖의 '깜짝스타'가 등장하면서 박지현의 활동범위는 더욱 자유로워졌다. 박지현은 이번 시즌 우리은행이 치른 9경기에 모두 출전해 리그 전체에서 득점 4위, 리바운드2위, 어시스트 10위, 스틸1위, 블록슛 3위를 달리며 맹활약하고 있다.

특히 가드 포지션임에도 경기당 평균 12개로 박지수에 이어 리바운드 2위에 올라 있다는 점이 가장 놀랍다. 이는 외국인 선수에게도 뒤지지 않는 힘을 자랑하는 김한별(삼성생명 블루밍스,11.56개)이나 국가대표 빅맨 진안(BNK 썸,11.33개)을 능가하는 기록이다. 우리은행의 골밑을 사수하는 박지현과 김소니아는 이번 시즌 22.33개의 리바운드를 합작하고 있는데 이는 KB의 박지수-김민정 콤비(21.38개)를 능가하는 리그 최고 기록이다.

물론 이제 프로 3년 차에 불과한 박지현은 아직 완성형 선수로 보긴 힘들다. 코트 위에서 크고 작은 실수들을 줄여 나가고 자유투 및 외곽슛 성공률을 더 높여야만 진정한 박혜진의 후계자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2000년생인 박지현은 이제 만20세에 불과한 젊은 선수다. 박지현이 앞으로 어떤 선수로 성장하느냐에 따라 우리은행과 한국여자농구의 미래도 어떤 청사진이 그려질지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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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프로농구 2020-2021 여자프로농구 우리은행 위비 박지현 박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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