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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세 엄마와 51세 딸이 다시 고향에서 함께 사는 이야기를 씁니다.[기자말]
지리산의 집을 파는 게 결정되고 나서 지난 9월에 전셋집을 알아보러 제주에 내려왔다. 제주행을 결정한 후 어머니에게 전화할 때마다 내가 전셋집을 구해서 어머니랑 같이 살려고 한다는 말을 계속 했다. 어머니 지금 사는 집이 너무 낡아서 거기서 계속 살기는 어려우니 내가 전세를 구하겠다고. 어머니 역시 동의했다. 그래, 이 집은 태풍이라도 불면 이젠 불안하다며.

25년 전, 부모님은 은퇴를 몇 년 앞두고 그동안 어찌어찌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자그마한 땅을 사고 아마도 당시 최고로 싼 재료로 조립식 주택을 지었다. 그곳에서 내 할머니는 10년간을 사시다가 104세에 자신의 방에서 돌아가셨다.

마침 육지에 살던 우리 형제들도 제주에 내려가 있던 상황이었다. 밖에 나가 있어서 죽음의 순간을 지켜보지는 못하였으나, 소식을 듣고 집으로 갔을 때 할머니의 손에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내 인생에서 '죽음'이란 걸 처음 피부로 느꼈던 곳이 바로 그 집이었다.

할머니도 아버지도 살다 가신 집
 
이사를 오기 전 25년간 살았던 이 집에는 곳곳에 부모님의 손길이 닿아있다. 그래서 많이 낡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우리 둘 모두에게 낯선 지금 이집 역시 앞으로 우리의 손길이 닿는 만큼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 되어가길 바란다.
▲ 어머니의 기억의 공간 이사를 오기 전 25년간 살았던 이 집에는 곳곳에 부모님의 손길이 닿아있다. 그래서 많이 낡았지만 익숙하고 편안한 곳이었다. 우리 둘 모두에게 낯선 지금 이집 역시 앞으로 우리의 손길이 닿는 만큼 익숙하고 편안한 공간이 되어가길 바란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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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역시 20여 년을 그 집에서 사시다 가셨다. 아버지는 옆집의 정원 풍경을 마치 우리 집 마당인 양 즐길 수 있고, 여름에 창문을 열어놓으면 사방에서 바람이 들어와 너무 시원한 집이라며 좋아하셨다.

몸이 많이 안 좋아져서 화장실 한 번 가는 것도 온 힘을 다해야 했던 즈음, 아버지는 잘 안 들리는 소리로 무언가를 말하셨다. 귀를 기울여보니 화장실이 바로 여기에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는 말이었다. 생각해보니 부모님 평생에 화장실이 실내에 있는 집에 살아보기는 그 집이 처음이었다.

작년 말 아버지가 위독해져서 병원 입원하신 지 한두 달쯤 지나서 제주도에 갔을 때였다. 어머니랑 같이 자고 있던 새벽, 화장실에 다녀오신 어머니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나도 잠에서 깨어 왜 안 자고 앉아 있냐고 물었다. 최근에 일어난 많은 일들을 잊고 지내시는데, 아버지가 병원에 가시던 그 날의 상황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 상황에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병원 가시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아버지를 돌보러 오셨던 요양사 분은 너무도 당연히 위급한 상황을 큰 오빠에게 알릴 의무가 있었고, 소식을 들은 오빠는 황급히 병원으로 아버지를 모셔갔다. 너무나 상식적인 대응이었다. 그렇게 발 빠르고 상식적인 대응 앞에서 어머니는 자신의 생각을 말할 틈도 자신도 없었으리라.

어머니에게 죽음은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훨씬 자연스러운 어떤 것 같다. 늙고 병들면 죽는 것이다, 왜 병원 가서 고생고생하다가 가야 하느냐라는 게 내가 들은 죽음에 대한 어머니의 생각이다. 의료의 발전이 자신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평소에 잘 안 쓸 법한 단어들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셨다.

무엇이 정답이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 모두의 앞에 명확한 진로로 놓여 있는 '죽음'의 문제에 대해 살아 있을 때 충분히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무엇을 원하는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쇠약해진 상태에서 의료시스템에 일방적으로 맡겨진 채 침상에 누워 있는 광경들은 생명의 존엄보다는 삶의 비참함을 느끼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튼 그때 어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에서 돌아가실 수 있기를 바랐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할머니가 그러셨듯이. 그 집에서 어머니는 10년간 할머니를 모시다가 임종을 지켰고, 아버지와 20년을 함께 살고 마무리하였다. 그런 그곳이 어머니의 삶에서는 당연하게도 특별한 공간이었으리라.

이사해서 나와 함께 살게 될 거라고 수차례 이야기했음에도 어머니는 계약을 최종 결정하기 위해 집을 보러 갔을 때 매우 당혹스러워 하셨다. 집을 둘러보려 하지도 않았고,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거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 같이 갔던 언니와 나만 집을 돌아보며 괜찮지 않냐고 물어도 어머니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 정도만 했다.

차차 이야기하다보면 나아지겠지라는 생각으로 계약을 진행하고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가족들이 총동원되어 지금 사는 집이 얼마나 낡았고 그동안 충분히 잘 살았는지, 그리고 새로운 집은 화장실도 두 개나 있고, 춥지도 않고, 태풍에 창문도 덜컹거리지 않을 것이고 등등 좋은 점들을 나열하는 것이 일이 되었다.

어머니가 25년을 산 집을 떠나는 마음
 
한라산이 이렇게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날이 별로 없다고 알고 있는데, 며칠 전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주었다. 제주에 내려온지 2주째 되는 날이었다. 귀향 2주를 축하하는 한라산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집앞 한라산 풍경 한라산이 이렇게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날이 별로 없다고 알고 있는데, 며칠 전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주었다. 제주에 내려온지 2주째 되는 날이었다. 귀향 2주를 축하하는 한라산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 이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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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이 넘는 시간을 그렇게 보내고, 드디어 1박2일에 걸쳐 지리산의 짐이 제주로 내려왔다. 일주일간은 어머니 집에서 잠을 자고, 낮에는 이사한 집으로 가서 짐정리를 하며 보냈다. 그리고, 저녁에는 어머니 짐 중에 가져갈 것들을 챙기며, 어머니의 이사를 준비하였다.

이제 또 설명과 설득의 시간이 이어졌다. '내 짐은 이미 이사를 왔고, 어머니 짐은 일주일 후에 앞으로 우리가 살 새로운 집으로 갈 것이다.' 어머니는 내 설명을 듣고 상황을 이해는 하면서도 '이 집에서 그냥 살면 안 될까? 집이 헐어도 나 죽을 때까지는 여기 살아도 되지 않을까?' 등등의 이야기를 하셨다.

설명을 계속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은 발끈하기도 했다. 내가 그동안 너무너무 여러 번 목이 터져라 이 집에 살기 힘든 이유를 이야기했고, 어머니도 이 집이 불안하다며 동의해놓고 왜 이러시냐고, 나는 이 집에 살기 싫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게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우리 둘의 살림살이가 한 집에 들어왔고, 새로운 공간에서의 새로운 생활이 열흘째를 맞고 있다. 길게 보자면, 내가 제주행을 결심하기까지 2년이 넘는 주춤거림의 시간이 필요했다. 15년의 세월을 털어내고 정리한다는 것이 그만큼의 과정을 요구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머니에게도 지금까지 25년 동안 살아오셨던 그 집을 정리한다는 것이 그만큼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일일 수 있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막연하게나마 어머니는 그 익숙한 공간에서 자신이 숨을 거둘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이식된 나무가 몸살의 과정을 거치듯 우리 역시 그런 과정을 거쳐야 할 수도 있으리라. 이 모든 과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며, 창문 너머 아름다운 풍경에 감사한다. 

태그:#어머니, #제주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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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른 겨울밭, 붉은 동백의 아우성, 눈쌓인 백록담, 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와 포말을 경이롭게 바라보며 제주의 겨울을 살고있다. 그리고 조금씩 사랑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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