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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박물관 역사 자료가 많았습니다.
▲ 4.3박물관 역사 자료가 많았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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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20일부터 22일까지 일정으로 전태일 노동대학 3학년 현장학습에 다녀왔습니다. 제주도에서 발생한 1947년 4월 3일 항쟁 유적지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울산에선 새벽 5시경 남구 태화다리 아래에서 김해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출발했습니다. 울산에서는 5명의 학우가 출발했습니다. 김해공항에도 제주공항에도 항공기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습니다.

여러 곳에서 20여 명이 모였습니다. 젊은 사람도 있었고 나이든 사람도 있었습니다. 대부분 노동조합 활동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제주공항에 오전 9시까지 집결하기로 했습니다. 모여서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관광차로 이동하였습니다. 처음 가본 곳은 관음사라는 사찰이었습니다.

관음사는 1909년 창건된 사찰로서 무장대의 근거지인 어승생악과 가깝다고 합니다. '관음사 전투'라 불리는 교전이 토벌대 간 벌어지기도 했고, 1949년 2월 12일에는 토벌대에 의해 대웅전, 향적전 등 8채가 전소되었다고 합니다.

관음사를 지나 산으로 들어가니 제주도 특유의 돌담이 여기저기 있고 세월의 흔적으로 이끼가 많이 끼어 있었습니다. 그곳은 무장대의 사령부로 쓰여지던 곳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간단한 제 음식을 차려놓고 영령들에 대한 제례를 했습니다.

산길을 따라 관음사를 나와 4.3평화공원으로 이동하였습니다. 10여 년 전에 가족여행으로 제주도를 일주했지만 4.3관련 유적지는 한 곳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상물을 관람하고 위령재단, 위령탑, 각영비, 행방불명인표식, 유해봉안관을 보면서 충격과 놀라움을 느꼈습니다.

조천읍 너븐숭이 4.3 기념관도 돌아보았습니다. 북촌 너븐숭이는 500여 명의 주민이 토벌대에 학살된, 제주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마을이라고 했습니다. 안내하시는 분은 기념관 밖으로 나가 위령비와 순이삼촌 문학기념비, 애기무덤, 방사탑도 둘러보게 하였습니다. 여러 구의 애기무덤을 보면서 슬픈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다음날에는 무등이왓으로 이동하여 여러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무등이왓은 300년전에 형성된 화전마을로 130여 가구가 살고 있었는데 1948년 11월 초토화작전으로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은 모두 불태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을 잃어버린 마을이라 불렀습니다. 제주도 중산간에는 그렇게 사라진 마을이 많다고 했습니다.
 
큰넓궤 내부 180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붉은색이 주민이 생활했던 곳이라 합니다.
▲ 큰넓궤 내부 180미터나 된다고 합니다. 붉은색이 주민이 생활했던 곳이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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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는 좀 넓었습니다. 입구 안쪽에서 밖이 보입니다.
▲ 입구는 좀 넓었습니다. 입구 안쪽에서 밖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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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큰넓궤라는 곳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큰 길에 내려 산속으로 1.3키로 걸어들어가니 입구에 4.3유적지라는 푯말이 있었습니다. '궤'라는 게 뭔지 몰라 물어보니 자연으로 생긴 동굴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큰넓궤는 동광리 주민 120여 명이 토벌대의 무차별 공격에 살기 위해 2개월가량 숨어지내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주민들은 끝내 토벌대에 발각되어 한라산 쪽으로 달아나다 잡혔고 정방폭포에서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노동대학 관계자는 직접 들어가보자고 했습니다. 참석자 대부분이 굴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도 따라 들어가보았습니다. 입구는 좁았습니다. 다리부터 집어넣고 간신히 들어가니 조금 널찍했습니다. 서서 갈 수 있는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기었습니다.

들어갈 때 안전모에 손전등과 무릎, 팔 보호대를 했음에도 굴 안 돌들이 날카로워 앞으로 기어나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조금 고개를 틀려고 하면 안전모가 위에 부딪혔습니다. 옆으로도 좁아 1인만 겨우 지나갔습니다. 가다 보니 조금 높은 곳도 있었지만 더 낮은 곳도 있었습니다. 더 낮은 곳은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도 힘들었습니다.

얼마쯤 가다 보니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했고 땅을 짚은 손바닥이 얼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헉헉거리며 작은 전등에 의존해 어둠 속을 한참을 기어가니 널찍한 곳이 나타났습니다. 깨진 도자기가 보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이곳에 들어온 주민들이 많아 두 곳으로 분산하여 지냈다고 합니다. 끝까지 가보자 싶어 다시 좁고 어두운 길을 기어서 들어갔습니다. 넓은 공간이 두어 곳 더 있었습니다.
 
굴 안 안으로 갈수록 좁아졌습니다.
▲ 굴 안 안으로 갈수록 좁아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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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막혔습니다. 산소가 부족하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일행이 모두 도착하자 희생자를 위해 묵념 시간을 가졌습니다. 모두 전등불을 껐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 이런 걸 말하는구나 싶어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만 캄캄했습니다. 마치 검정색 물감을 칠한 듯이....

지금 우리는 안전 장비를 갖추고 전등불 가지고 있어도 이렇게 답답한데, 그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답사에 함께 해주신 주민분은 미군정의 책임도 크다며, '초토화작전' 지시는 이승만과 미군정이 핵심이 아니겠냐고 말씀하셨습니다.

70년 넘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미흡한 진상규명 4.3제주항쟁 퍼즐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 보입니다. 4.3항쟁 영화 지슬에 보면 가장 잔인하게 그려지는 서북청년단. 그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을까요? 이런저런 생각에 다시 기어 나올 때는 속이 뒤집어졌습니다. 숨이 막혔습니다.

2000년 제정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은 4·3사건의 시기를 1947년 3월 1일부터 한라산 금족지역이 해제되는 1954년 9월 21일까지, 약 7년 7개월간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이 시기 토벌대의 진압 과정에서 당시 도민 인구의 11%가량에 해당하는 2만5000~3만여 명의 주민이 희생당했다고 합니다.

'초토화작전'이라고 불리는 이 토벌 활동으로 가옥 4만여 채가 소실되었고, 중산간 지역의 상당수 마을이 폐허로 변했다고 합니다. 또한, 상당수 제주민이 일본으로 밀항하여, 지금도 두려움에 떨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분도 있다고 합니다. 당시 생존자들에게는 지금도 트라우마가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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