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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는 오늘도 느즈막이 일어나 하루를 빈둥거린다.
  아이는 오늘도 느즈막이 일어나 하루를 빈둥거린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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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인 큰애는 오늘도 오전 10시가 넘어야 일어나려나 보다. 수능을 앞둔 11월쯤 되면 원래 그런 건지, 코로나 때문인 건지 몇 주째 등교를 하지 않고 있다. 수시 원서접수다, 실기 시험이다, 그래도 잠깐은 분주하더니 요즘엔 특별히 가는 곳도, 딱히 해야 할 일도 없는 터이다.

그래도 녀석은 잘 지낸다. 느지막이 일어나 온갖 뉴스를 검색하고, 영화도 한 편 보고, 피아노를 잠시 뚱땅거리다, 동생이 하교하면 함께 희희낙락 거린다. 아이가 매일 집에 있으니 벌써 졸업한 기분이다. 수시 결과를 기다리는 마음은 좀 불안하겠지만, 등교도 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한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때가 자주 오는 일은 아니니 빈둥대는 녀석에게 잔소리를 할 마음은 없다. 

사실 아이는 학창 시절 대부분을 빈둥거렸다. 지금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빈둥거리는 녀석을 고운 눈길로 봐주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초등 4학년 무렵부터 큰애는 슬슬 학교 공부가 재미가 없고 힘들 뿐이라며 반항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에만 시간을 할애하고, 집중하고 싶어 했다. 결국 불안한 나는 아이와 잦은 언쟁을 벌였고, 관계는 자주 삐걱거리고 엇나갔다. 

하지만 어느 때부터인지 쓸모없다고만 여겼던 녀석의 여러 관심사들이 의외로 요긴하게 쓰이는 걸 보면서 한편으론 신기하고, 한편으론 아이를 대하는 마음이 점차 편안해져 갔다. '저 녀석이 어떻게든 세상을 살아 나가겠구나'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면서 말이다. 기억이 희미해지기 전에, 학창 시절 동안 녀석이 무얼 하며 빈둥거렸는지, 어떻게 나의 마음이 편안해지게 되었는지 녀석의 관심사들과 얽힌 일화들을 정리해 보고자 한다. 

남는 게 시간이었던 아이의 학창 시절

아이가 공부에 시간적, 심리적으로 매여있지 않다 보니 남는 게 시간이었다. 학교만 다녀오면 잠잘 때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주로 했다. 잔잔하게 관심을 가졌던 것들이 많았지만, 지금까지도 즐거워하며 기꺼이 시간을 보내는 일들은 크게 세 가지 정도이다.

우선, 어린 시절부터 주욱 즐겨온 유희왕 카드의 직접 제작, 그리고 역시 초등 입학 전부터 시작된 <해리포터> 시리즈와 마블의 <어벤저스> 시리즈로 이어지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 마지막으로 학교 수업이 지루할 때마다 허구한 날 교과서 이 바닥, 저 바닥에 그려댄 각종 낙서가 그것이다.

유희왕 카드의 경우, 어려서는 자기가 원하는 캐릭터 카드를 손으로 직접 그려 만들더니 나중에는 포토샵으로 정교하게, 더 자라서는 코딩 기술을 습득해서 아예 프로그램으로 진짜 카드처럼 만들어냈다.

좋아하는 카드를 직접 만들고 싶어 애쓰다 보니 저절로 포토샵이나 코딩 기술을 익힌 것이다. 아마도 이 즈음부터 아이를 한심하게 여기던 마음이 서서히 줄었던 것 같다. 대신 아이가 집중하는 일이 무엇인지 정말 궁금해져서 가끔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 신나서 대답하던 아이 얼굴이 생생하다. 
 
    큰애가 포토샵으로 제작한 유희왕 카드들
  큰애가 포토샵으로 제작한 유희왕 카드들
ⓒ 이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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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은 여러 가지로 유용하게 쓰였다. 한 번은 학교에서 수학이 실생활에 사용되는 예들을 찾아 글을 쓰는 대회가 있었다. 그즈음 녀석은 애니메이션 <토이스토리>의 제작법에 관심을 가졌던가 보다. 

관련 영상을 찾아보며 동물의 털이나 물결 입자 등이 방정식이나 함수 등 수학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표현된다는 걸 우연히 알고 놀라워했다. 그리고는 마침 그 내용으로 대회에 참가했다가 뜻밖의 1위를 수상했다. 녀석이 단지 운이 좋았던 걸까? 지켜보며 진짜 공부란 무엇인지 여러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대입 전공과 관련한 영상제작을 자주 시도했다. 직접 영상을 찍고, 찍은 영상에 음악을 입히고, 자막을 넣고, 적절하게 편집하는 법까지 스스로 찾아내 공부를 했다. 필요한 정보들은 주로 인터넷 검색과 유튜브 등을 이용했던 모양이다. 네트워크로 연결된 이 무한한 정보 속에서 정말 마음만 있다면 무엇이든 알아내고 배울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게 녀석 덕분에 실감이 났다. 

어려서부터 재미 삼아 끄적거린 낙서들도 잘 써먹고 있다. 영화 전공의 실기시험에서 스토리 보드에 그림을 그리는데, 순식간에 핵심을 표현해 내는 게 제법이다. 학원은커녕 학교 미술 시간에도 제대로 배운 적 없이 낙서로만 갈고 닦은 그림 실력을 이렇게 써먹을 줄 누가 알았나 싶다. 
 
    낙서로 갈고닦은 그림실력을 입시 실기에 써먹을 줄 누가 알았겠나.
  낙서로 갈고닦은 그림실력을 입시 실기에 써먹을 줄 누가 알았겠나.
ⓒ 이지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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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잡다한 이슈들에 대해서도 궁금해했는데, 주로 저녁 식사를 하며 가족들과 되는대로 중구난방 의견을 나누곤 했다. 대화 중 내 말꼬리 잡기는 녀석의 특기이다. 나의 설명이나 의견이 뭔가 근거가 미약해 보인다 싶으면 바로 검색해서 사실을 들이대며 반박하기 일쑤였다.

그런 덕분인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국어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이나 수업시간에 배우는 내용의 80% 정도는 한 번은 다 알아본 내용일 때가 많다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높은 점수가 나오는 건 아니다. 다만 학교 공부를 위해 문제집 한 권 제대로 풀지 않은 녀석이 제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해 나가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탐구할 시간이 있다는 것

정리하다 보니, 아이 초등학교 때 학부모 연수에서 들었던 강연 하나가 생각난다. 성함은 기억나지 않지만 저명한 의사분이 강사였는데, 강연의 메시지는 아이가 뭔가를 좋아할 때 웬만하면 마음껏 탐색하도록 가만히 놔두라는 것이었다. 자신도 의사가 될지 몰랐지만, 의사가 되어 연구를 하고 논문을 쓰다 보니 어려서 좋아했던 그림과 글쓰기 능력들을 모두 유용하게 녹여내고 있다며 말이다. 

당시에는 에이, 그냥 꿰어 맞춘 이야기가 아닐까 의구심만 가득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 아이 성장기의 일면을 간추리다 보니 7, 8년 전 대수롭지 않게 들었던 그 강사님의 메시지와 문득 겹쳐지게 되어 참 놀랍다. 강사님 말씀을 따라 살려고 전혀 애쓴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분 말씀대로 그리고 우리 아이 일화를 몇 가지 들추어 보건대, 본인의 취향과 관심사를 맘껏 쫓다 보면 언젠가는 그 관심사들이 자신의 진로와 연관되어 도움이 되기도 하고, 학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닌가 싶다. 설령 직접적으로 진로와 연결되지 않더라도, 의지를 가지고 무엇에든 깊이 파고 들어가 즐거움을 맛 본 경험! 그 자발적 경험이 많이 쌓인 아이일수록 장애물을 덜 두려워하고 새로운 것에 더 도전해 보려는 힘을 기르게 되는 것이 아닐까?

이제 큰애는 수시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합격하면 좋겠지만, 설령 대입에 실패한다 하더라도 크게 걱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껏 하던 대로 자신이 원하는 걸, 원하는 방식으로 탐구하며 실력을 갖춰나가다 보면 언젠가, 어느 공간에서든 제 몫을 하며 잘 살아나가리라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저 학교 공부만이 미래를 준비하는 길이라고 윽박지르며 아이와 대립하느라 소모했던 많은 시간들이 아쉬울 뿐이다. 좀 더 일찍, 좀 더 많이 아이가 좋아하는 것에 나도 기쁜 마음으로 공감해 주었다면 더 많이 행복했을 텐데 말이다. 호기심 많은 어린 자녀와 오늘도 시간을 놓고 줄다리기하며 걱정하고 계실 부모님들께 우리 아이의 일화들이 작은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덧붙이는 글 | 본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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