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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브루나이, 마셜 제도, 팔라우, 통가, 투발루, 그리고 대한민국.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일곱 국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국제노동기구(ILO) 기본협약 중 강제노동 협약을 비준하지 않은 국가들이다. 대부분 태평양과 동남아시아의 소국임을 감안하면, 주요국 중에서는 중국과 나란히 강제노동 국가로서의 악명을 떨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의문을 가질 수 있다. 대한민국에 아오지 탄광이나 굴락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염전이나 어선에서 '현대판 노예'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이따금 들려오기는 해도 그것이 세상이 용납하지 않는 불법적 행태로 인식되는 것은 명확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180여 나라들이 비준한 ILO강제노동협약을 왜 지금까지 비준하지 못했는가? 바로 과거에 흔히 공익이라고 불렸던 징집제도, 사회복무제도 때문이다. 매년 신체등급 4급 해당자 2-3만명의 남성이 사회복무요원으로 소집되고 있으며,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이들은 공공기관과 사회복지시설에서 현역 복무자와 같은 급여를 받으며 2년간 보조업무를 수행한다.

현행 사회복무제도가 ILO가 정하는 강제노동(compulsory labor)에 해당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시간과 장소의 선택권을 극도로 제약하여 순수한 군사적 성격의 일이 아닌 노동을 민간인 신분으로 강제하기 때문이다. 유사한 복무제도 때문에 협약위반 지적을 받은 이집트, 터키, 튀니지의 사례에 비추어 보아도 강제노동으로 간주될 여지는 충분하다. 때문에 정부는 강제노동국의 오명을 벗기 위해 강제노동협약을 비준하려 하고 있고, 올 7월에 병역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과연 정부는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 것일까?

공익에게 현역복무 선택권을 주면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정부

정부 발의로 9일 국회에 상정된 병역법 일부개정안의 내용은 매우 간단하다. 사회복무요원이 현역 복무를 원하는 경우에는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게 선택권을 준다는 것이다. 정부는 "병역의무 이행의 형평성 문제, 보충역에 대한 수요"를 들어 사회복무제도의 폐지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사회복무대상자에게 사회복무와 현역 사이에서 선택의 자유를 준다면 본인의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해서 사회복무를 한 셈이 되므로 강제노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일단 형평성 문제나 사회복무에 대한 수요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정부의 논리는 실소를 자아낸다. 사회복무 대상자들은 현역 복무가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이들인데, 이들이 원한다고 현역복무를 시켜줄 수 있다면 애초 부적합 판정의 의미는 무엇인가?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다는 것인가,  없다는 것인가? 군사적 영역의 일에 복무하는 것이 부적합하다고 판정된 이들이 이른바 '선택'을 통해 군사적 영역에 복무하는 것을 국가가 허용하는 것은 형용모순이다. 당연하게도, 현역복무에 부적격으로 판정된 자는 현역 복무를 해서는 안 된다. 만약 이들이 현역병으로서 군대 내에서 비군사적 영역의 일에 복무한다면 그 영역 역시 강제노동에 해당될 것이다. 사실상 군대의 관할 하에 현 사회복무제도를 유지하는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즉 정부는 선택해서는 안 되는 것을 선택하게 하면서 그것을 '선택권'이라고 포장하고 있다.

ILO가 강제노동의 예외로 인정하는 '선택권'은 현역 입영이 불가능한 사람들에게 '현역갈래? 공익갈래?'따위를 물어보는 것이 아니다. 징병제 시기의 독일처럼 현역 입영 대상자들에게 '현역갈래? 공익갈래?'를 물어보거나, 사회복무대상자들에게 '집에 갈래, 아니면 공익이라도 할래?'를 물어보는 선택권을 말하는 것이다. 튀니지 사회복무제도에 대한 ILO의 의견에 따르면(2009), 징집된 이들이 비록 현역과 사회복무 중 선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차원에서의 선택인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제도를 운용하는 것인지를 따진다. 국가의 필요에 의거한 것이라면 비록 선택권이 있더라도 강제노동으로 판정될 여지가 있음을 천명한다. 그만큼 ILO가 해석하는 사회복무의 선택권이라는 것은 국가의 필요보다는 개인의 권리에 무게를 둔다는 뜻이다. 그런 ILO에 한국 정부의 기만책이 먹힐까? 지금까지 어떤 국가도 감히 이런 수준의 시도까지 하면서 사회복무제도를 유지하려고는 하지 않았기에 확언은 할 수 없지만, 조롱거리가 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한-EU FTA 전문가 패널에 큰 기대 할 수 없어

정부가 이렇게 황당한 꼼수라도 써서 협약을 비준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EU와의 무역분쟁 때문이다. EU는 한국이 아직까지 강제노동협약을 비롯한 ILO기본협약을 비준하지 않는 것은 한-EU 자유무역협정(FTA) 위반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이 위반으로 확인된다 하더라도 무역제재로 이어질 수는 없지만, 세계 최초 FTA 노동기준 위반이라는 불명예와 다른 FTA 협약국의 제소로 이어질 위험성 때문에 정부는 위반 결정을 피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현재 EU측에서 전문가 패널을 소집해서 시비를 가리는 중으로 10월 8-9일에 관련 심의와 질의를 화상으로 진행했다.

고용노동부가 18일 공개한 회의록에 따르면, EU는 한국 정부에게 총 36개의 질문을 했으나 사회복무제도와 관련한 질문은 하나밖에 없었으며 그마저도 매우 간소하게 다루어졌다. 한국정부의 병역법 개정이 ILO강제노동협약에 부합하는지 질문하고, 이에 정부는 기존의 논리를 반복한다. ILO가 사회복무제도가 비군사적 영역에서 운용된다 하더라도 개인에게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강제노동이 아니라고 보므로, 한국 정부는 사회복무대상자에게 현역입영의 선택권을 주도록 병역법을 개정할 것이니 강제노동협약 비준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논리의 황당함은 이미 앞에서 이야기한 바 있으니 제쳐두고, 한국 정부의 관련 질문에 대한 EU측의 대답을 보자. 이 부분이 백미다.   

 
한-EU FTA 전문가 패널 질의 회의록 중 한국 정부가 EU측에 한 질문 "한국의 병역법 개정안이 강제노동협약에 부합하는가?"
 한-EU FTA 전문가 패널 질의 회의록 중 한국 정부가 EU측에 한 질문 "한국의 병역법 개정안이 강제노동협약에 부합하는가?"
ⓒ 고용노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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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정부가 앞에서 자신들이 설명한 병역법 개정안이 ILO 강제노동 협약에 부합한다고 보는지 이번에는 EU에게 역으로 질문을 던진다. 이에 대해 EU는 당황스럽게도 "자신들은 이 문제에 대해 조사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관심사는 강제노동 협약을 위한 한국정부의 노력 여부이지 한국법과 강제노동협약의 양립불가능성에 대한 것은 아니다" 라고 답변한다. 아니, 그러면 왜 EU는 한국정부에게 병역법 개정안이 강제노동협약과 부합하는지 물었던 것일까?
   
이유는 EU가 밝힌 관심사에서 드러난다. 애초에 EU는 강제노동으로서 사회복무제도를 문제삼았던 것이 아니라, 한국 정부가 ILO협약을 비준하지 않아 FTA를 위반했다는 사실이 문제인 것이다. 즉 바꾸어 말하면 국내법을 어떻게 개정하든지 간에 한국정부가 ILO기본협약만 맺을 수 있다면 EU측은 문제삼지 않을 것이며, 그 이후의 국내법과 협약의 충돌은 ILO와 한국 정부와의 문제이지 EU의 소관은 아니라는 뜻이다. 사회복무제도 자체는 다른 노동법 개정사안과 달리 직접적으로 산업경쟁력에 영향을 준다고 단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무역의제로 다루어질 수 없는 측면이 있다. EU의 강제노동협약에 대한 질문은 한국 정부의 성의를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지 그 내용 자체를 문제삼기 위한 질문은 아니었던 셈이다.

따라서 11월 30일에 있을 전문가패널의 최종판단에서 강제노동협약 관련한 전향적인 판단은 크게 기대할 것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설령 다른 사안에 대한 심각한 위반이 받아들여져 대한민국이 협약위반국으로 인정된다 할지라도, 강제노동협약에 대한 한국정부의 해괴한 접근법은 주요한 위반사항으로 다루어지지 않을 공산이 크다. 결국 ILO에 공을 떠넘기는 것이다.

사회복무제도 폐지 없는 강제노동협약 비준은 무의미

이미 필자는 지난 기사에서 사회복무제도가 아무 명분도 이익도 없는 대한민국 징병제 폐단의 산물임을 지적한 바 있다. (관련기사 : 30년간 무시해왔던 사회복무제, 폭탄돌리기는 끝내야 한다  http://omn.kr/1oe82

복무가 부적합한 사람들까지도 징집해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거기에 더해 이등시민으로 낙인찍는 것에 대다수가 문제의식을 품지 않고 수십 년 동안 순종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정부는 이것을 두고 현역복무자와의 '형평성'을 말하고, 공공부문에서의 '필요성'을 말한다. 얼마나 더 많은 국민을 불행하게 만들어야 '형평성'을 이룰 수 있을 것이며,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을 공짜나 다름없이 부려먹어야 그 '필요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라질 것인가.

노동계의 침묵도 납득하기가 어렵다. ILO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민주노총이 분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관심은 결사의 자유 협약 비준에 쏠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협약 비준을 통해 공무원과 플랫폼노동자를 비롯한 좀 더 많은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널리 인정되는 '노조할 권리'를 획득하는 것 역시 기념비적 진전일 것이다. 하지만 두 거대 노총이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사회복무제도의 강제노동 문제를 거론하지 않는 것은 의도적인 무관심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성명과 논평에서 한 줄이나마 언급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1999년, 일제의 강제징용이 ILO 강제노동협약 위반임을 이끌어 냈을 때 민주노총이 앞장섰던 역사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도대체 강제노동 문제를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에서 다루지 않는다면 대한민국의 그 누가 다룰 수 있단 말인가.

정부가 수십 조에 달하는 일자리 예산을 쏟아부을 수 있다고 한다면 현역병 임금의 정상화와 사회복무요원들이 담당했었던 공공영역의 보조와 돌봄노동을 정당한 노동으로 전환하는 데 역시 수십 조를 충분히 들일 수 있는 것 아닌가? 한쪽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퍼붓듯이 공공일자리를 만들어 실업률을 관리하고, 그 공공기관의 한켠에서는 노예노동을 부리는 이 슬픈 공존을 언제까지 지켜보아야 하는가? 정부의 꼼수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강제노동국'이라는 타이틀은 대한민국 징병제의 기괴하고 광범위한 착취시스템을 적나라하게 폭로하고 있다. 정부는 어차피 국제망신으로 귀결될 꼼수입법을 철회하고 근본적인 해결책으로서 사회복무제도 폐지와 병역제도 개혁을 검토해야 한다. 사회복무제 폐지 없는 ILO강제노동협약 비준은 무의미하며,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하다.

태그:#사회복무제도, #ILO 기본협약, #강제노동, #징병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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