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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초기 조선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쳤으나, 청나라로부터는 모략당했고, 조선으로부터는 추방당했으며, 본국 정부로부터는 해임당했다. 어느 날 일본의 호젓한 산길에서 홀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의인 조지 포크에 대한 이야기이다.[기자말]
* 이 기사는 구한말 조선에 머문 미 해군 중위 조지 클레이턴 포크의 이야기를 사료와 학술 논문 등을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이전 기사 : 영국 외교관의 1878년 부산 방문기 최초 공개]


안녕하세요. 조지 포크예요.

우리는 지금 의문의 승려 이동인이 1880년 일본 주재 영국 외교관 사토우를 찾아가게 된 동기와 경위를 탐구하고 있는 중입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사토우의 부산 행적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사토우가 가지고 갔던 편지 사본을 누구에게 전달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부산 주재 일본 관리관(외교관으로서 나중에 직명이 '영사'로 개칭됨)과 조선인 변찰관(부산의 대외업무 책임자)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동인 스님은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통해 편지를 보았을 것입니다. 편지와 함께 사토우의 명함도 같이 보았겠지요. 이제 이 두 사람 중에 누구를 접촉하였는지를 알아내면 수수께끼가 풀릴 겁니다.

이동인이 만난 사람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 
 
 이동인은 왜 영국 외교관을 그토록 만나려 했던 것일까요?
 이동인은 왜 영국 외교관을 그토록 만나려 했던 것일까요?
ⓒ 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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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왜 이런 걸 탐구해야 하는지 그 뜻을 생각해 봅시다. 이동인이 목숨을 걸고 영국 외교관을 만나려 한 것이 사실이라면 무척 묘미가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조선인이 주도적으로 서양인을 찾아나선 초유의 일이니까요.

당시 조선인들은 서양인을 배척허거나 증오하거나 두려워했습니다. 만일 서양인을 접촉하다 발각되면 무슨 변고가 닥칠지 모르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천민에 속했던 일개 승려가 영국 외교관을 만나려 했다면  거기엔 깊은 곡절이 있었을 건 두말할 나위가 없겠죠. 

앞서도 말했지만 나는 조선의 초기 급진 개화파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 중 서재필은 훗날 이동인에 대하여 이렇게 회고합니다. 
 
"일본의 외교사절이 조선에 오기 전 몇 해 동안 몇 사람의 조선 지식분자들은 총명한 불교 승려와 통신을 하고 있었다. 그 승려는 일본에서 구미문명에 관한 많은 서적을 가져왔다. 초기 개화파들은 그 승려가 가져온 책들을 탐독함으로써 조선이란 울을 벗어난 바깥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차츰 알게 되었다."
- 출처 서재필의, <회고 갑신정변>(1934) 

"하루는 김옥균이 동지 여러 사람을 데리고 서대문 밖 새 절 붕원사로 놀러가자고 하여 갔다. 그 절에 승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매우 공손하고 말도 잘 하고 또 공부도 많이 한 모양이었다. 그 승려가 처음에 사진을 보여주는데 세계 여러나라 도시와 군인의 모습 같은 것을 요지경이라는 글라스로 보여주어 매우 재미가 있었다.지.우리가 그가 전해 준 <만국사기>라는 책을 돌려보고 여러 나라 이름이며 내력을 대강 알 수 있었고 다들 재미있어 했다. 스님은 지금 일본인들이 서양사람들과 사귀어 가지고 여러 가지 제도를 문명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가 준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강 짐작할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다.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맨 먼저 나서게 된 근본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라는 승려가 우리를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되었으니 봉원사가 개화파의 온상이라고 할 것이다. " - 출처 김도태 저 <서재필박사 자서전>(1972)
 
이처럼 초기 개혁가들에게 서양에 대한 지식을 전해주고 세계 정세에 대한 안목과 개화 정신을 일깨워 준 사람이 바로 이동인 스님이었습니다. 

1884년 봄 내가 조선에 첫 발을 디뎠을 때에는 이미 이동인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에게서 영향을 받은 개혁가들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죠. 그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나는 갑신정변이 일어날지를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본국 정부에 상세히 보고하였지요. 그 보고서가 지금 보존되어 있을 겁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 하겠습니다. 지금은 이동인 스님의 행적을 알아내야 하니까요.

이동인 스님은 자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두 건을 여기 소개할 참인데, 여기에서 수수께끼가 풀릴지 모릅니다.

이동인과 일본 당국의 동상이몽

먼저 <朝鮮開敎五十年誌조선개교 50년지>를 봅니다. 일본 불교의 조선 진출 역사 기록입니다. 이동인이 부산의 일본 절(교토 동본원사東本願寺의 별원別院)에 출입했던 정황이 여실히 나타나 있습니다. 
 
"부산별원이 개설된 이듬해인 1878년 12월의 어느 날, 살을 에는 듯한 차가운 아침이었다. 승려 이동인이 간절히 오쿠무라(奧村) 법사의 가르침을 받고 싶다며 별원을 찾아왔다. 품격도 있고 문필도 뛰어나서 오쿠무라 법사가 만났던 승려들과는 대단히 분위기가 달랐으므로, 오쿠무라 법사도 그를 대단히 정중하게 대했다. 그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떠났다.

그 후 그는 오쿠무라 법사의 후의에 감사하며 여러 차례 내방했고, 어떨 때는 별원에 며칠간 머물면서 항상 시사(時事)와 국제 정세를 말할 뿐 굳이 불교를 이야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오쿠무라 법사는 더욱 그가 심상한 승려가 아님을 알고, 넌지시 그의 진면목을 간파하려고 했지만, 그는 쉽게 마음속을 털어놓지 않았다. 그렇게 반년이나 지났을 것이다. 1879년 초여름 경부터 경성에 간다고 하면서 일시 소식이 두절되었다. 8월 중순에 이르러 갑자기 경성에서 찾아와서는 사람을 멀리하더니, 이제까지는 충심(衷心)을 털어놓기를 꺼렸지만 이제 그 시기에 도달했다, 부디 나를 위해 도움을 주길 바란다고 전제하면서 일본의 정세를 시찰하고 문물을 연구해서 조선의 문화개혁(文化改革)에 공헌하고 싶다는 희망을 밝혔다.

내 뜻을 도와달라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참된 진심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또 박영효·김옥균 두 사람에게서 그 여비로 받은 길이 2촌 남짓의 순금 막대 4자루를 보여주면서 여행준비를 상담했다." - 출처:大谷派本願寺朝鮮開敎監督部 編, 『朝鮮開敎五十年誌』(京城: 大谷派本願寺朝鮮開敎監督部, 1927), pp.137~138

이 자료를 통해 우리는 이동인이 의도적으로 일본 승려를 접촉하여 일본에 건너가려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1879년 1월의 시점은 바로 사토우가 부산을 방문했던 시기와 근접합니다. 바로 그 즈음 이동인이 오쿠무라와 매우 가깝에 지냈다는 사실을 주목해 봅시다. 오쿠무라와 일본 관리관이 같은 동네(일본인 거류지)에서 살면서 늘 접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오쿠무라를 조선에 진출시킨 것은 일본 당국이었습니다. 1877년 일본 정부당국으로부터 조선 포교 요청을 받은 교토의 동본원사에서 오쿠무라를 파견했던 것이지요.

그 해 9월 28일 부산에 도착한 오쿠무라는 옛 왜관(倭館)의 서관(西館)을 빌려 포교를 시작합니다. 앞으로 부산을 넘어 다른 개항장으로 교세를 확장하려는 오쿠무라와 원산과 인천도 개항시키려는 일본 외교당국의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에 서로간에 긴밀한 공조가 이루어지고 있었지요.

그러한 상황에서 이동인은 그들에게 교묘하게 접근했습니다. 일본 측은 친일 세력을 조성하려 한 반면, 이동인은 일본을 따라잡고 앞질러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상이몽이라고 할까요?

1878년 11월 말 경 사토우가 부산에서 일본 관리관과 긴밀히 접촉할 즈음에 오쿠무라는 그런 사실을 알았을 것입니다. 한편  오쿠무라의 절에서 며칠씩 묶기도 했던 이동인으로서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토우의 동정을 탐문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이동인이 관리관을 만났다는 직접 증거가 존재합니다. 

흥미롭게도 초대 조선 주재 일본 공사 하나부사(花房)가 1879년 봄 이동인과 2시간 남짓 대화한 내용이 도쿄 도립대학 도사관에서 발굴되었다 합니다. 이 자료는 이동인의 인물이나 사상을 이해하는데 더 없이 귀중한 사료라는군요. 여기에서는 서두만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부사는 4월 25일 이동인이 찾아와 처음 만났는데 그의 의복과 두발 모두가 고관 같기도 하고 또 선비 같기도 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나아가 하나부사는 이동인의 동작과 언어가 "우리와  달랐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이동인이 지난 번에 마에다(前田)를 만나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었음을 적고 있습니다. 이동인이 하나부사에게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것이지요. 

이동인은 하나부사를 만나기 전부터 마에다라는 인물과 접촉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마에다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가 찾고 있는 관리관입니다. 마에다 겐키치(前田獻吉)일본 외무성 5등급 외교관입니다. 마에다는 1879년 6월의 정식 부임을 앞두고 미리 업무를 익히기 위해 부산에 와 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튼 이로써 이동인이 관리관과 긴밀히 접촉하고 있었음이 확인됩니다. 또한 이동인은 마에다의 전임관리관(山之珹祐長)도 만났을 것입니다. 이 시기는 영국의 사토우가 부산을 방문한 즈음입니다. 그때에 이동인이 사토우의 편지를 지니고 있던 관리관을 만난 것입니다. 

누가 이동인을 왜 죽였을까요?

이제 우리는 퍼즐을 확실히 푼 셈입니다. 이동인은 일본 승려 및 외교관을 통해 애써 사토우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고 그 정보로 동경의 사토우 집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그 깜깜했던 시기에 이동인은 왜 영국 외교관을 그토록 만나려 했던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볼 사토우의 일기가 의문을 풀어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동인에 대한 타자의 기록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합니다. 초대면에 이동인에 감복한다는 점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김옥균은 그를 만나자 마자 열흘 동안 같이 지내며 의기투합했다고 하고, 아까 언급했던 일본의 고위 종교인 오쿠무라는 이동인의 비범함을 첫 눈에 알아보았습니다.

더욱 이채로운 것은 오만한 고위 외교관 하나부사가 이동인은 자기들과는 다른 인물이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한편 1880년 수신사를 이끌고 일본에 왔던 김홍집은 이동인과 대화한 후 "조선에 이런 남아가 있었단 말인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도 합니다. 앞으로 보겠지만 영국 외교관 사토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 그를 누가 왜 죽였을까요?

다음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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