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내가 죽던 날> 포스터

영화 <내가 죽던 날>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태풍이 불던 날 외딴섬 벼랑 끝에 선 소녀가 바다를 바라본다. 이내 소녀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유서로 추정되는 편지와 정황을 바탕으로 사망사건으로 종결지으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소녀의 이름은 세진(노정의). 아버지의 범죄 때문에 졸지에 보호관찰을 빙자한 감시에 처한 인물이다. 온실 속의 화초같이 커서 세상 물정을 잘 몰랐던 철부지처럼 보이나 이상함을 직감했는지 아버지의 장부를 몰래 빼돌렸고 이를 경찰에 제출한다.
 
그 후 중요한 증인이 된 세진은 섬에 가면 새엄마(문정희)를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감을 품지만 새엄마는 연락 두절된다. 찾아오는 사람이라고는 담당 형사 형준(이상엽)이거나, 가끔 들여다보는 순천댁(이정은)뿐이다. 세진은 사생활 보호가 전혀 되지 않던 감옥 같은 집에서 혼자 지내며 고립과 불안, 분노를 키워왔다. CCTV의 감시와 불면증, 스트레스뿐만 아니라, 아무도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을 거라 생각에 하루하루 우울한 날들을 보내왔다. 애써 증거를 찾지 않아도 충분히 자살의 정황이 드러난 상태. 섬마을 사람들은 세진의 안타까운 사연에 동정심을 갖는다. 
 
한편, 불미스러운 일로 휴직 후 복직을 앞둔 형사 현수(김혜수)는 사건이 더 골치 아파지기 전에 마무리해야 하는 인물이다. 남편의 불륜과 이혼 조정, 교통사고, 마비, 그리고 직장의 파트너와 불륜으로 오해를 사는 등. 승진은 고사하고 시끄러운 개인사를 정리해야만 했다. 모든 것이 무너졌지만 어렵게 다시 시작하기 위해 세진의 흔적을 쫓는다. 하지만 세진이 머물렀던 집주인인 순천댁은 말이 없다. 그녀는 불의의 사고로 성대를 잃고 말을 하지 못하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의식조차 없는 조카를 돌보며 마을 사람들과도 어떤 교류도 하지 않고 철저히 고립을 자처한다. 이 사건의 유일한 단서를 쥐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시종일관 모르쇠 일관하며 수사를 지지부진하게 만든다.

현수는 복직을 위해 선배가 말한 조건에 맞게 사망 처리하면 되지만 어쩐지 쉽게 서류를 마무리하지 못한다. '자살'과 '실종' 사이에서 썼다 지웠다는 반복하며 고민하던 찰나. 우연히 CCTV에 담긴 세진의 얼굴에서 자신의 모습을 읽는다. 세진에게 한 걸음씩 다가갈수록 자신과 닮은 모습에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마치 거울 속의 나, 과거의 나라 생각할 만큼 삶의 질곡이 느껴졌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지만 격한 끌림에 사건을 재수사하기 이른다.

절망 끝에서 만난 내 안의 나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내가 죽던 날은> 여성이 주·조연을 맡은 보기 힘든 탐문 수사 형식을 취한다. 흔한 여성 서사나 성별만 바꾼 무늬만 여성 영화가 아니다. 감동과 공감이 적잖이 전해지는 인물에 대한 세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인다. 각본과 연출을 맡은 박지완 감독은 여성 영화라고 극명히 선을 긋기보다 '드라마' 장르로 봐주길 원한다고 밝혔다.

탄탄한 시나리오와 캐릭터 전사가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어 충분한 몰입을 돕는다. 이는 김혜수, 이정은, 노정의 세 배우의 호연이 있어 가능했다. 이미 연기력과 스타성을 인정받은 김혜수와 이정은 배우뿐만 아니라 신예 노정의 배우까지, 누구 하나 튀지 않고 서로 보조를 맞추며 안정적인 흐름을 유지한다. 특히 김혜수는 드라마 <시그널> 이후 또다시 형사 역에 도전했다. 김혜수라는 스타보다 캐릭터 현수가 먼저 보였고 영화가 끝나도 계속 잔상이 남는다.
 
긴장감이 흐르는 장르적 형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캐릭터의 진실이 드러나며 안타까움이 커진다. 그들은 나이도 환경도 다르지만 모두 외롭고 소외된 존재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속은 썩어 문드러진 상처를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상처가 다 낫기도 전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기 일처럼 나서 조건 없는 도움을 준다. 보이지 않은 끈으로 단단히 연결된 세 사람은 절망적인 상황이 닥쳐도 끈을 더욱 팽팽히 당겨 서로를 보호한다. 자살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되듯, 스크린 너머 전해지는 생명력은 큰 위로로 다가온다. 세 사람은 최악의 순간에도 담담히 희망을 써 내려간다.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영화 <내가 죽던 날>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인생은 의외로 길다. 지금의 자리에 그저 주저앉기엔 고통은 길고 살아갈 날은 많이 남았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행복과 불행의 무한 루프를 달리는 일일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긴 인생을 살아가며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돕는다는 것. 누구도 당신 인생을 구해주거나 살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남은 인생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되었나, 누가 이렇게 만들었나"라며 원인을 찾기보다 그 편이 훨씬 빠르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다.

그래서일까. 영화 <내가 죽던 날>은 흔한 위로의 말 몇 마디가 아닌 직접적인 행동을 보여준다. 시종일관 미스터리함을 유지하던 분위기는 현수와 순천댁이 조우하는 결말부에 다다라, 말로 다 할 수 없는 따스한 온기를 전한다. 때로는 말하지 않아도 상대의 진심이 전해지는 순간이 있게 마련이다.
내가 죽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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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쓰고, 읽고 쓰고, 듣고 씁니다. https://brunch.co.kr/@doona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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