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의 공식 포스터

영화 <윤희에게>의 공식 포스터 ⓒ (주)리틀빅픽처스

 
지난 11일 '제40회 영화평론가협회상 시상식'이 열렸다. 영화평론가들이 작품성을 평가해 수상작을 선정한 영평상 시상식에서 3관왕을 차지한 영화가 있다. 감독상과 각본상, 음악상까지 수상한 영화, 바로 <윤희에게>다.

어느 계절을 떠올렸을 때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봄의 벚꽃과 여름의 매미 소리, 휴가로 떠났던 바닷가와 같은 것들 말이다. 그 계절에 있었던 좋은 순간들이 마치 하나의 계절처럼 기억되어 비슷한 날씨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 순간이 떠오르는 경험. 나에게도 그런 날이 존재한다. 바로 작년 겨울, 영화 <윤희에게>를 본 날이다.

<윤희에게>는 작년 11월 14일에 개봉한 임대형 감독의 장편영화다. 개봉 당시 김희애 배우가 출연한다는 사실이 크게 주목을 받았는데 이 영화는 여성 간의 사랑을 담은 퀴어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희에게>는 두 여성의 사랑을 담은 이야기만은 아니다. 세상의 시선에 맞춰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온 윤희와 그런 윤희의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그녀의 딸 새봄의 이야기이도 하다.

영화는 일본에서 건너온 편지를 윤희(김희애)의 딸 새봄(김소혜)이 발견하면서 시작된다. 바다를 건너온 이 편지는 윤희의 첫사랑 쥰(나카무라 유코)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쥰이 적은 편지를 그녀의 고모(키노 하나)가 우체통에 넣으면서 우연히 한국으로 전달되었고, 이 편지로 인해 윤희와 새봄은 새로운 여행을 떠나게 된다. 편지가 온 일본의 오타루로 말이다. 먼저 편지를 발견한 새봄은 윤희에게 편지의 발신지인 오타루로 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한다. 윤희는 공장 급식실에서 일하는 노동자로 그녀의 상사는 휴가 신청을 받아주지 않는다. 결국 윤희는 직장을 그만두었고 그렇게 오타루로 향하는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윤희가 직장을 그만두고 나온 장면부터 극의 분위기는 조금씩 달라진다. 극 중 윤희는 셔틀을 타고 공장에 가서 음식을 만들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며 살고 있었다. 퇴근 후 한 대씩 피는 담배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숨어서 피던 그녀는 술을 마시고 집 앞에 찾아온 전 남편(유재명)에 의해 더욱 지쳐갔고, 그녀의 얼굴은 삶에 지친 어른의 표정으로 가득했다. 그런 윤희의 얼굴은 직장을 그만두고 나오는 순간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간 눌러왔던 마음을 표출하듯 살짝 미소 짓는 윤희의 표정은 이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아름답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 스틸컷 ⓒ (주)리틀빅픽처스

 
그렇게 떠나온 오타루에서 새봄은 비밀스럽게 윤희와 쥰의 만남을 준비한다. 윤희는 모르게 함께 온 남자친구 경수(성유빈)와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보기도 하고, 쥰의 고모가 운영하는 카페에 찾아가 자신이 윤희의 딸임을 밝히기도 한다. 이런 새봄의 노력으로 윤희와 쥰은 결국 만나게 된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 함께 시간을 보냈던 한국이 아닌 일본의 어느 거리에서 만나게 된 둘은 짧은 대화를 나누지만 그 내용은 영화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오랜만이네"라는 말과 함께 걷는 두 사람의 뒷모습으로 표현될 뿐이다. 그들의 만남에서 어떤 대화들이 오고 갔을지 생략된 부분을 상상하게 하는 연출은 영화를 더욱 오랜 기간 마음에 머물게 만든다.

쥰의 편지로 시작된 영화는 윤희 답장으로 마무리된다. '쥰에게'로 시작한 이 편지는 그간 윤희가 살아온 삶이 담겨있다. 쥰을 사랑한다고 말한 윤희를 정신병원에 보냈던 가족들과 그렇게 헤어진 두 사람의 사연, 너를 만났던 그 순간처럼 충만했던 시간은 다신 없을 거라는 고백, 편지를 적고 있지만 너에게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망설임, 언젠가 용기를 내 딸 새봄에게 쥰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바람. 김희애 배우의 목소리로 내레이션 되는 이 편지는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주었고, 그 울림의 절정은 영화의 엔딩으로 이어진다. "추신. 나도 네 꿈을 꿔." 블랙스크린과 함께 등장하는 마지막 대사는 이 영화의 완벽한 엔딩이자 관객들을 가슴 저리게 만드는 장면이다. 편지라는 매개체와 배우의 목소리를 사랑하는 분들이라면 <윤희에게>는 절대 잊히지 않는 인생작이 될 것이다.
 
 <윤희에게> 스틸컷

<윤희에게> 스틸컷 ⓒ (주)리틀빅픽처스

 
포스터에 나타나듯 <윤희에게>는 눈이 가득한 일본의 오타루를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이다. 세상을 가득 채운 하얀 눈 속을 걸으면서 윤희와 새봄은 모녀의 여행을, 새봄과 경수는 풋풋한 고등학생 커플의 여행을, 윤희와 쥰은 20년 만의 재회를 한다. 이때, 눈이라는 배경은 차갑고 쓸쓸한 기운이 아닌 포근한 느낌을 준다. 쉽게 떠날 수 없는 시기, 겨울을 아름답게 담아낸 영화는 관객들에게 눈이 가득한 오타루로 떠나온 것 같은 기분을 선사할 것이다.  

글을 마치며 나는 세상의 수많은 윤희에게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윤희는 쥰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병에 걸린 취급을 받으면서 정신병원에 다녀야 했고, 오빠에게 대학을 양보해야 했으며, 결국 오빠가 소개해 준 남자와 결혼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윤희는 자신의 이런 삶을 벌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에게 벌을 주면서 살았다고 말한다. 자신이 부끄럽지 않다는 쥰의 편지에 나도 더 이상 내가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답한다.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윤희가 아님에도 말이다. 엔딩에 이르러서 윤희와 새봄은 그동안 살아온 동네를 떠나 새로운 곳에서 삶을 시작한다. 그동안 겨울은 봄이 되었고, 길거리에 쌓인 눈은 모두 녹아내렸다. 윤희의 도전으로 끝나는 영화를 보면서 세상의 많은 윤희들이 용기 낼 수 있기를.

마지막으로 새봄이처럼 윤희의 삶을 응원하고픈 사람들에게도 이 영화를 추천한다. 윤희를 보면서 나는 엄마를 떠올렸다. 삶의 무게가 가득한 그녀의 얼굴은 언젠가 엄마에게서 보았던 표정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새로운 시작을 하는 윤희를 새봄의 마음으로 응원하게 된 것은. 지나온 세월을 딛고 새 출발을 시작한 윤희를 응원하고 싶은 많은 새봄이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난초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윤희에게 영평상 김희애 임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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