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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10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윤석열 검찰총장이 지난 10월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의 대검찰청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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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임명식이 있었던 2019년 7월 25일, 문재인 대통령은 '살아 있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해야만 검찰의 정치적 중립에 대해서 국민들이 체감도 하게 되고, 그 다음에 권력의 부패도 막을 수 있는 그런 길"이라고 말했다.

임명권자로부터 이런 주문을 받지 않고도 살아 있는 권력과 용감히 맞서 싸운 검찰총장이 있었다. 검찰이 권력의 시녀였던 1987년 6월항쟁 이전 시기에 총장직을 수행한 인물이다. 임시정부를 계승하는 대한민국정부 수립 뒤의 제2대 검찰총장인 김익진(1896~1970)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가 총장에 임명된 다음날 발행된 1949년 6월 7일 치 <동아일보> 1면 머리기사에 그의 약력이 소개됐다.
 
본적 충남 부여군 구룡면 논시리 240. 단기 4250년(서기 1917년) 경성전수학교 졸업. 4250년 임(任, ~에 임명되다)재판소서기. 4253년(1920년) '임'평양지방법원판사. 4260년 동(同) 지방법원을 퇴직. 4260~해방까지 평양에서 변호사를 개업함. 4281년(1948년) 3월 서울서 변호사 개업. 4281년 11월 '임'대법관.
 
조선총독부가 지정한 사립 법률학교인 경성전수학교를 21세 때 졸업한 김익진은 그 해에 법원 서기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24세 때는 특별임용시험을 거쳐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됐다. 7년 뒤 퇴직한 뒤부터는 변호사로 활동했다. 7년간의 일제 판사 경력 때문에 친일 여부를 의심할 수도 있지만,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는 그의 이름이 없다.

변호사 시절의 김익진은 일종의 인권 변호사였다.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것으로 알려진 그는 법률을 통해서도 일본제국주의에 저항했다. 독립운동과 관련된 각종 시국 사건에서 그는 변호사로 등장했다.

일례로, 일제가 일으킨 공안사건인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흥사단 사건) 때도 변호인단에 참여했다. 도산 안창호 등이 검거된 이 사건에서 김익진은 김병로 변호사(김종인 할아버지) 등과 행동을 함께했다. 1964년 1월 17일자 <경향신문> '가인 김병로 선생의 추억'에 이런 대목이 있다.
 
흥사단 사건은 예심을 거쳐 당시의 고등법원까지 올라가는 동안 전후 5개년이 걸렸는데, 가인 선생은 이인·김익진 기타 몇 분과 함께 무료로 3심을 통해 시종(始終) 변호를 맡아주셨다.
 
위의 <동아일보> 기사에는 해방 때까지 평양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1948년에 서울로 영업 무대를 옮겼다고만 언급돼 있지만, 두 시기 사이에도 사연이 매우 많았다.

해방 직후에 그는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준비위원회(건준) 평양 지부에 참여했다. 북한을 점령한 소련군이 건준을 해체한 뒤에는 좌·우파가 연합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에서 부위원장 겸 치안부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11월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을 창당하자 김익진은 거기에 가세해 총무부장으로 일했다. 하지만 1946년 연초에 조만식이 신탁통치를 반대한 뒤 행방불명(실제는 호텔 연금)되고 조선민주당 간부들이 체포되는 일이 있었고, 그 후에 김익진은 38선과 서울에 모습을 나타냈다.

우여곡절을 거쳐 1948년 11월 남한 대법관이 된 그는 이듬해 6월 6일 문제의 제2대 검찰총장 자리에 임명됐다. 미군정 시기인 1946년 12월 대검찰청으로 개칭되기 전까지 이 기구는 '대법원 검사국'이었다. 법원과 검찰이 미분화된 시기를 살았던 당시 사람들한테는 대법관 김익진이 검찰총장에 취임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신임 검찰총장인 김익진이 정권 안정에 기여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가 공산주의 세력에 밀려 월남한 전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경찰 파워가 검찰을 능가했고 이승만 정권도 경찰을 더 신뢰했지만, 그래도 정권 입장에서는 검찰의 협력이 당연히 필수 불가결했다.

친일청산과 분단반대 등을 외치며 이승만 정권과 싸우는 사람들을 경찰이 잡아오면 이 사람들을 판사 앞에 데려가 구형해줄 사람들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검찰의 역할도 긴요했다. 이승만은 공산주의 정권 때문에 월남한 김익진이 그런 역할을 잘해주리라 믿었다.

양심과 소신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김익진 제2대 검찰총장(왼쪽 하단).
 대검찰청 홈페이지에 소개된 김익진 제2대 검찰총장(왼쪽 하단).
ⓒ 대검찰청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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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그에게 '살아 있는 권력의 눈치도 보지 말라'는 당부는 하지 않았다. 김익진은 주문받지 않은 그 사항까지도 훌륭하게 이행했다. 살아 있는 이승만 정권 앞에서도 양심과 소신을 굳건히 지켰던 것이다.

김익진은 멀쩡한 국민들을 빨갱이로 몰아 처벌하는 이승만 정권의 반인권적·반민족적 행태에 동조하지 않았다. 이승만이 직접 개입한 용공조작 사건에 대해서까지 엄정한 태도를 견지했다. 사법 기능이 반공 이념에 예속되는 반공사법을 기대했던 이승만의 구상을 정면으로 거슬렀던 것이다.

2006년에 <법사학(法史學) 연구> 제34호에 실린 문준영 부산대 교수의 논문 '헌정 초기의 정치와 사법'은 "반공사법에 내포되어 있던 정권안보 사법의 성격이 노골화되면서 대통령과 검찰총장 사이에 대립이 불거질 수밖에 없었다"며 "그중 하나가 1950년 4월 발생한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이다"라고 말한다. 논문은 사건 개요를 이렇게 요약한다.
 
경무대에 줄을 댄 정치브로커 김태수·김낙영 등이 '공산 게릴라가 봉기하여 경무대를 습격하고 정부 요인을 암살하려 한다'는 날조된 정보를 보고한 뒤,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사설 수사기관을 만들고 무고한 사람들을 붙잡아 고문하고 공산당으로 몰다가 적발된 사건이다.
 
이승만은 '사건을 건드리지 말라'고 특명을 내렸다. 하지만 김익진은 듣지 않았다. 김익진 검찰총장은 권승렬 법무부장관 및 서울지검장과 손잡고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섰다. 위 논문은 이렇게 말한다.
 
김태수의 허위 정보에 참모총장·헌병사령관·내무부장관·치안국장서리 등이 놀아났다. 첩보가 입수된 뒤, 검찰이 수상히 여겨 수사하려 하였으나 대통령의 측근이 수사(받는) 중이므로 '검찰은 이 사건에 일체 관여하지 말라'는 특명이 내려진 상태였다.

그러나 권 장관과 김 총장은 대통령의 특명에도 불구하고 서울지검의 정보부 검사를 수사에 투입하여 1950년 4월 정치공작대원 108명을 검거하였다. 김 총장은 대검찰청 차장검사가 직접 지휘하여 수사·기소하도록 지시하였다. 5월 19일 정치공작대장 김태수 등 11명이 기소되었다.
 
김익진이 얼마나 용감했는가는, 대통령의 친서를 무시하는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회답을 보내 공정수사 의지를 천명한 사실에서도 드러난다. "이 대통령은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을 기소하지 말라'는 친서를 보냈으나, 담당 검사들이 소신껏 기소장을 작성할 수 있도록 김 총장은 이를 공개하지 않았고, 현행법상 불기소처분이 불가능하다는 회답을 대통령에게 보냈다고 한다"고 위 논문은 설명한다.

미국에도 맞서다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의 깃발이 날리는 모습.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의 깃발이 날리는 모습.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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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진이 맞선 '살아 있는 권력'은 이승만 정권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싸움은 '살아 있는 세계권력' 미국에도 맞서는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의 용공조작은 동북아에서 냉전정책을 전개하는 미국의 세계전략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김익진이 맞선 권력은 더 있었다. 그는 반공으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기득권세력의 요구에도 부응하지 않았다. 대통령에게 맞서면서도 기득권층에게는 맞서지 않으려는 검사들이 대한민국에 수도 없이 많지만, 김익진은 대통령뿐 아니라 기득권층의 사익도 정면으로 무시했다. 전남도경국장이 수뢰혐의로 구속됐는데, 그를 풀어달라는 현역 국회의원들에게 "국회의원이 간섭할 일이 아니다"라면서 싸운 일화도 전해진다.

용공조작에 담긴 미국·기득권층·이승만의 욕망을 몰랐을 리 없는 김익진은 오로지 법률과 양심에 따라 사건을 처리했다. 공산주의 때문에 고향에서 밀려났다는 사적인 감정도 철저히 배제했다. 오로지 법조인과 검찰총장의 자세에만 충실하고자 했다.

이런 검찰총장이 오랫동안 자리를 지켰다면, 대한민국 검찰이 권력의 시녀라는 오명을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총장이 이승만 정권 하에서 자리를 오래 지킬 수는 없었다. 이승만 정권 하에서는 이런 총장에게 2년 정도의 넉넉한 재임도 보장되지 않았다.

결국 김익진은 보복성 인사를 당했다. 한국전쟁 발발 3일 전인 1950년 6월 22일, 이승만 대통령은 그를 서울고검장으로 좌천시켰다. 검찰총장이 고검장으로 강등된 것이다.

김익진의 시련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이승만 정권은 1952년 6월 25일 발생한 대통령 암살미수 사건을 다루는 법정에도 그를 피고인으로 세웠다. 하지만 1심과 2심은 무죄를 선고했고, 대법원은 면소(공소권 없음) 판결을 내렸다. 그는 1970년에 세상을 떠났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치검찰 때문에 항상 염려를 품고 산다. 제2대 검찰총장은 그렇지 않은 검사와 검찰총장도 있었다는 위안을 우리에게 주고 떠났다. 그의 인생에 흠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이만하면 훌륭한 검찰총장'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행적을 남긴 뒤 떠났다.

태그:#김익진, #검찰총장, #검찰의 정치적 중립, #정치 검찰, #윤석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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