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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함께 한 2020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전염병과 함께 한 시간 만큼 생겨나고 있는 코로나로 인한 불평등, 격차에 관한 이야기를 시민들이 직접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보고 씁니다. [편집자말]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우연찮게 케이블 TV에서 본 감동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펑펑 울었습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그의 대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의 한 장면. “나, 다니엘 블레이크는 한 사람의 시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라는 그의 대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다.
ⓒ 영화사 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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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가장 선도적이며 가장 선진적이라 자부하는 영국의 복지정책을 아프게 꼬집습니다. 40년 넘게 목수로 살아온 다니엘의 시선으로 그 모순의 세계를 고발하지요. 성실하게 일 하며 살아온 그에게 심장병이 찾아오며 영화는 시작합니다.

일 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그는 질병수당을 신청하지만 석연치 않은 이유로 탈락하고 맙니다. 실업수당이라도 받으려 해보지만 이번엔 컴퓨터가 그를 가로 막습니다. 평생 그 앞에 앉아본 적도 없었으니, 그건 신청하지 말라는 말과 같았습니다. 그래도 우여곡절 끝에 실업수당을 신청하고 질병수당은 재심을 청구합니다.

그런 중에 홀로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 맘 케이티를 만납니다. 둘 다 가진 것 없고 힘든 처지였지만 그들은 서로를 돕고 격려하며 난관을 함께 극복해 나가지요. 절망의 골짜기에서 희망의 빛을 이어가는 소외된 사람들의 사투와 같은 삶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보기 드문 수작이었습니다.    

영화 곳곳에 감동적인 장면이 많았는데요. 저는 다니엘이 난생 처음 컴퓨터 앞에 앉아 마우스를 잡던 장면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그를 도와주던 이가 마우스를 위로 올려보라고 하자, 그는 그걸 손에 쥐고 위로 들어 올립니다.

당연히 웃음이 터져 나왔지요. 영화에 대한 사전지식 없이 우연하게 영화를 보게 된 저는 거기까지만 봤을 땐 그저 흔한 코미디 영화인 줄 알았습니다. 영화를 끝까지 다 본 후에야 그 장면의 의미를 깨달았지만요.

영화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니 그건 이쯤에서 그만하죠. 아, 그래도 정말 좋은 영화였고, 아직 보지 않았다면 꼭 보시라 추천의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그럼 다시 제 얘기로 돌아갈까요.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진짜 다니엘'들에 관한 것입니다. 컴퓨터 같은 첨단 문명과는 하나도 친하지 않고 오직 전통과 고전만을 지키며 사는 이 시대의 아날로거(Analog+er)들 말입니다. 아닐 거라 생각하시겠지만 그런 분들 아직 꽤 많습니다.

각성의 계기가 된 코로나 팬데믹
 
첨단의 기기지만 우리같은 아날로거들은 전체 기능의 1/10도 못 씁니다
▲ 노트북과 스마트 폰  첨단의 기기지만 우리같은 아날로거들은 전체 기능의 1/10도 못 씁니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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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처럼 컴퓨터를 쓰지 못하는 분들을 '컴맹'이라 합니다. 첨단의 스마트 폰을 들고 있으면서도 전화기로 밖에 쓰지 못하는 '폰맹'도 있지요. 일단 저부터가 그렇습니다.

제법 하는 척 하지만 저는 컴퓨터나 스마트 폰에 내장된 기능의 1/10도 쓰지 못합니다. 사실 다니엘이 마우스를 집어 들었을 때 따라 웃을 처지는 아니었죠. 저만큼도 못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다니엘처럼 가끔 불편한 적은 있었지만 그 분들, 지금까진 그런대로 잘 살아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번 코로나 팬데믹은 아날로거들에게도 큰 위기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이 위험천만한 세상에선 집에 콕 박혀 온라인과 모바일로 필요(needs)와 욕구(wants)를 해결하는 게 가장 현명한 대처법이었지만, 우리야 그럴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죠.

우린 전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걸어서 은행에 갔고, 시장에 가 먹을 걸 사야 했으며, 화상 미사를 몰라 어쩔 수 없이 미사를 빼먹어야 했고, 세상 소식 궁금하면 손가락에 침 묻혀 가며 종이신문을 넘겼습니다.

그러니까 우린 공식적은 아니었지만 비공식적인 코로나 고위험군이었던 셈입니다. 담배를 끊지 못한 65세 이상의 아날로거들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던 거죠. 위기감은 점차 현실이 됐습니다.

전염이 됐다는 게 아니라 지금까지 디지털 문명을 외면해온 대가를 치르게 됐다는 얘기입니다. 모두 조금씩 달랐지만 그것으로 낭패를 보게 된 분들이 꽤 있었습니다. 저부터 정말 어쩔 수 없이 그동안 거부해 왔던 공인인증서를 만들어야 했지요.

제 친구의 경우는 조금 심각했습니다. 그는 중1짜리 늦둥이 아들을 키우는 홀아비입니다.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집에서 화상으로 수업을 한다는데 그는 그게 뭔지 당최 알 수 없었습니다.

그냥 아들이 컴퓨터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공부 잘 하는 줄 알았던 거죠. 그런데 이 녀석,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하고 있던 겁니다. 나중에 조카들로부터 진상을 보고 받은 친구는 아들에게가 아니라 자신에게 화가 났다고 했습니다. 컴맹 친구는 컴퓨터만 좀 알았더라면 게임과 화상수업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공부를 했어야 한다며 후회도 하더군요.

유튜브를 배워 보겠다고 나선 선배님도 있습니다. 그 분 컴퓨터 활용 능력은 저 정도였습니다. 그런 분이 온라인 수업을 따라가는 건 애초부터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아이들 도움으로 줌(Zoom)인가 뭔가를 '깔고', '입장'까지는 했는데 그 이후부터 그냥 '정지' 상태가 됐다고 했습니다.

강사 선생님은 뭘 또 깔고, 어디로 들어가서, 무슨 키를 눌러 저걸 끌어와서, 거기에 붙이고 하라는데 하나도 알아먹을 수가 없어 두 번째 수업 중에 분연히 '퇴장' 하셨다더군요. 선배님은 옆에 붙어 앉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일일이 가르쳐 줘도 모자를 판에 화면 속에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며 애꿎은 강사에게 화를 내셨습니다. 그러면서 평소 컴퓨터와 내외하며 지냈던 지난날을 반성했습니다.

디지털 세상을 향한 채비 서두르는 동년배들

둘 다 지금부터라도 공부하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우리처럼 시대의 흐름을 외면하거나 둔감한 사람들은 특징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용감하고 대범한 척 하면서 실제로는 겁이 많다는 겁니다.

철지난 유행어로 '그까이꺼(그까짓 것)'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 같아도 속으론 머리 써서 무언가를 새로 배운다는 자체를 참 어렵고 무섭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죠. 일부러 연필로 쓰는 게 좋다는 김훈 작가 같은 분도 많지요. 다만 제 주변분들 눈여겨 관찰한 결과가 그렇다는 겁니다.

코로나 팬데믹은 그런 전통의 아날로거들에게 엄중한 위기이자, 각성의 계기인 동시에 변신의 동기가 되어 주었습니다. 더군다나 이런 전염병이 일상이 될 수 있으며, 더 위험한 바이러스가 나올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측이 공공연한 판이니 더 이상 문명을 외면할 수는 없게 된 거죠.

그래서 이제 그네들도 저 도도한 디지털 세상을 향한 채비를 하게 된 겁니다. 물론 저도 그 중 하나죠. 아, 근데 이게 또 어떻게 바뀌진 않겠지요? 참 이래저래 피곤한 세상입니다.

태그:#코로나펜데믹, #아날로그, #다니엘블레이크, #위기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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