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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매년 이맘때면 불청객처럼 들이닥치는 찬바람의 기세가 나날이 사납다. 20년 넘게 습관처럼 챙겨 마시는 커피 한 잔이 어느 때보다 간절하다. 자연스레 외출에서 돌아오면 한껏 여몄던 옷깃을 풀고 서둘러 포트에 전원을 넣는다.

몸이 처질 때나 밤샘 작업을 할 때마다 입에 달고 살다 보니 몸에 이상 신호가 감지되면 '이번엔 진짜로 끊는다' 작심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싸구려 커피조차 마다치 않으며 커피를 즐긴다. 돌아보면, 소싯적 이맘때는 커피 대신 얼은 몸을 녹여 주던 생명수 같던 차(茶)가 따로 있었는데 말이다.
 
할머니의 특제 율무차에는 잘 볶은 땅콩을 잘게 부셔서 넣어 주는 것이 포인트다.
▲ 땅콩 할머니의 특제 율무차에는 잘 볶은 땅콩을 잘게 부셔서 넣어 주는 것이 포인트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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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녀왔습니다. 할머니, 어디 계세요?"

추위에 떨며 학교에서 돌아오면 책가방은 냅다 팽개치고 할머니부터 찾았다. 날이 좀 춥다 싶으면 할머니께서 만드시는 특제 차(茶)가 궁금하여 부엌문 안으로 성큼 들어선다.

할머니표 특제 차는 약한 불 위에서 냄비 바닥에 눋지 않도록 숟가락으로 저어가며 우유를 끓이다가, 율무차 한 두어 스푼을 넣어 한소끔 더 끓인 것이다. 먹기 직전에 잘게 부순 땅콩을 넣어 영양이 옹골진 율무차를 '후후' 불어가며 먹고 나면 허기진 속이 금세 달래지곤 했었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도, 성찬을 차려냈던 할머니 
 
할머니의 밥알 인절미 재료는 따끈한 밥과 콩가루가 전부다.
▲ 할머니의 밥알 인절미 할머니의 밥알 인절미 재료는 따끈한 밥과 콩가루가 전부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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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알을 뭉쳐 콩가루를 입히면 할머니의 '밥알 인절미'가 완성된다.
▲ 밥알 인절미 밥알을 뭉쳐 콩가루를 입히면 할머니의 "밥알 인절미"가 완성된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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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께서 이따금 요깃거리로 챙겨 주시던 '밥알 인절미'는 율무차와 환상 콤비다. 말이 인절미지 갓 지은 밥이나 보온한 밥에 소금 약간을 쳐서 뭉친 후, 쟁반에 쏟아놓은 콩가루 위에 굴려주는 게 전부다.

손자국이 나도록 '꾹꾹' 눌러 만든 밥알 인절미를 입 안에 넣으면 콧등까지 전해지는 구수한 콩 내음과 씹을수록 쫀득거리는 식감이 좋아 한참을 입안에서 오물거렸다. 돌이켜 생각하면 별반 특별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그땐 왜 그리도 맛있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70, 80년대는 모든 물자가 귀하여 너나없이 아끼며 살았다. 국민학교 4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버려지는 담뱃갑 속지를 이면지로 사용하게 할 정도였다. 지금처럼 가정에서 2, 3대씩 냉장고가 필요치도 않았고, 쟁여놓은 음식물이 상해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시절이다.

모든 것이 부족하던 때니 집집마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어딘지 부실한 밥상이 차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밥알 인절미와 특제 율무차는 일하는 엄마를 둔 안쓰러운 손주들에게 차려낸 할머니의 최고의 밥상이었던 셈이다.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따스한 손맛이 그리울 때면 
 
시중에는 율무가루만 들어간 율무차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 다양한 견과류가 들어간 황제 율무차 시중에는 율무가루만 들어간 율무차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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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도 맛도 세련돼진 인절미가 얼마나 많아졌는가.
 모양도 맛도 세련돼진 인절미가 얼마나 많아졌는가.
ⓒ 박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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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변한 외출복도 없이 지내시던 할머니는 얄궂게도 먹고살 만해진 1992년에 돌아가셨다. 이젠 간편식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골라 먹을 수 있는 배달 음식이 차고 넘친다. 뭐든 손이 덜 가게 편해지고 부족함 없이 풍족한 세상이다. 언젠가부터 시중에는 호두니, 잣, 아몬드 같은 견과류나 현미, 새싹가루를 넣은 율무차가 팔리고 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손맛이 그리워서 그걸 사다 진하게 타 보지만, 도통 어릴 적 먹던 그 맛이 안 난다. 인절미도 그렇다. 알밤 인절미, 쑥 인절미, 흑임자 인절미, 카스텔라 인절미 등 모양도 맛도 세련돼진 인절미가 얼마나 많아졌는가. 그러나 달곰하니 맛있던 그것도 몇 점 집어먹고 나면 입안에서 쉬이 물린다.

진한 커피 한 잔으로는 부족한 가을밤이 깊어간다. 문틈으로 세찬 바람이 숨어든다. 할머니의 온기가 시린 가슴을 맴도는 계절은 또 이렇게 시작되려는가 보다.

태그:#인절미, #인조왕, #이괄의 난, #공주인절미, #지리적 표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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