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O리그의 한 시대를 이끌었던 선수들이 연이어 정든 그라운드와의 작별을 선언하고 있다. '악바리' 정근우와 '불꽃남자' 권혁도 최근 은퇴를 선언했다.

정근우는 8일 LG 구단을 통해 은퇴 의사를 밝혔다. 어느 정도 예견된 수순이었다. 정근우는 올 시즌을 앞두고 2차 드래프트를 통해 한화를 떠나 LG 유니폼을 입었다. 류중일 감독의 전폭적인 신뢰 속에 정근우는 3년 만에 주포지션인 2루수로 복귀하며 선수인생의 마지막 기회를 잡았지만 세월의 흐름은 감출 수 없었다. 2020시즌 성적은 72경기에서 타율 .240 1홈런 14타점에 그쳤고 실책도 무려 9개나 기록하며 부진했다.

베테랑으로서의 경험을 고려하여 LG의 이번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포함됐지만 지난 2일 키움과의 와일드카드 결정전에서 대주자로 나서 결승 득점을 올린 것이 활약의 전부였다. LG는 두산과의 준PO에서 패배하며 시즌을 마감했고 류중일 감독도 사임하면서 다음 시즌 구상에 정근우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고심 끝에 결국 현역 은퇴를 결정했다.

정근우는 KBO리그 역대 최고의 2루수로 꼽힌다. 고려대를 졸업하고 2005년 드래프트 2차 1라운드 지명으로 SK에 입단한 정근우는 한화와 LG를 거치며 통산 1747경기에 출장해 타율 .302, 1877안타, 121홈런, 722타점, 371도루를 기록했다. KBO리그 득점왕(2009년, 2016년) 2회, 골든글러브(2006년·2009년·2013년)를 3회 수상했으며, 끝내기 안타만 리그 역대 최다인 16회를 기록하며 클러치타임의 사나이로 이름을 떨쳤다. 특히 선수인생의 최전성기를 보낸 SK에서는 한국시리즈 우승 3회(2007-08, 2010)와 준우승 3회(2009, 2011-12)를 함께하며 명실상부 'SK 왕조'의 주역 중 한명으로 활약했다.

또한 정근우의 활약은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 더 빛났다. 2000년대 후반~2010년대 중반까지 국가대표팀 부동의 내야수로 군림하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2009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준우승,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금메달, 2015년 프리미어12 우승 등 한국야구 영광의 순간에 항상 정근우의 이름이 있었다. 작은 체구에도 포기하지 않는 근성과 집요한 승부욕으로 '악바리'라는 별명을 얻으며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나이가 든 뒤에는 주전이나 포지션에 집착하지 않고 항상 팀과 후배들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모습으로 성숙한 베테랑의 모범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불펜야구'의 전성시대를 이끈 특급 좌완 권혁도 올시즌 두산 베어스를 끝으로 선수생활을 정리한다. 2002년 1차 지명으로 삼성 유니폼을 입은 권혁은 안지만-오승환 등과 함께 2000년대-2010년대 전반기 KBO리그를 지배한 '삼성 왕조'의 핵심 불펜으로 활약하며 첫 번째 전성기를 열었다. 2015시즌을 앞두고서는 FA 자격을 얻어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며 다시 한번 화려하게 부활했다.

권혁은 KBO통산 781경기 874이닝에 나와 58승 47패 32세이브 159홀드를 기록했다. 현역 선수 가운데 최다 홀드 기록이자 역대 통산으로는 안지만(177홀드, 은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기록이다. 삼성시절인 2007년부터 2012년까지 5시즌 연속 두 자릿수 홀드를 기록하기도 했고, 한화에서의 2015년(78경기 112이닝 9승13패 6홀드 17세이브)과 2016년(66경기 95⅓이닝 6승2패 3세이브 13홀드, 평균자책점 3.87)는 불펜투수임에도 평균 100이닝에 가까운 투구를 기록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가대표 경력은 그리 길지 않지만,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좌타 원포인트 릴리프 임무를 맡아 3경기 1.1이닝 무실점으로 자신의 역할은 100% 완수했다.

권혁은 전성기 내내 특급 불펜투수들의 숙명이기도 했던 '혹사 논란'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그림자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운드에서 항상 열정적으로 투구하는 모습 때문에 '불꽃 남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지난해 두산으로 이적 후 첫해인 57경기에 나와 2승2패 11홀드 1세이브, 평균자책점 4.91로 활약했지만 올 시즌에는 15경기 7⅔이닝을 던져 2승2패 2홀드, 평균자책점 9.39에 그치며 크게 중용되지 못했다. 한화에서의 혹사 이후 고질적인 허리부상에 시달려온 권혁은 아쉽게 '200홀드 도전'이라는 마지막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채 유니폼을 벗기로 결심했다.

한편 투수 김승회와 포수 정상호 역시 은퇴를 선언했다. 두산은 은퇴의사를 밝힌 권혁 등 베테랑 3인방을 포함하여 무려 13명의 선수들과 다음 시즌 계약을 맺지 않기로 결정하면서 대대적인 선수단 정리를 단행했다. 한화 역시 김태균이 은퇴하면서 이용규-윤규진-최진행-안영명 등 11명의 노장급 선수들을 정리하면서 타 구단과의 계약 여부에 따라 앞으로 은퇴 선수가 추가로 더 쏟아질 가능성도 있다.

스타급 선수들이 비슷한 시기에 잇달아 그라운드를 떠나기로 결정하면서 프로야구에 '한 시대의 마무리'를 의미하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 프로야구가 한때의 침체기를 거쳐 2000년대 후반부터 500-700만 관중 시대를 넘나드는 중흥기를 맞을 수 있었던 데는, KBO리그의 첫 탄생(1982년)을 지켜보며 함께 성장한 프로야구 키즈인 '7080세대'의 역할이 매우 컸던 건 분명한 사실이다. 

올해 현역 최고령이었던 박용택(79년생)을 끝으로 프로야구에 이제 '70년대생 선수'는 모두 사라졌고, 한국야구의 최고 황금기를 이끌었던 '82년생 세대' 역시 김태균과 정근우를 시작으로 이제 하나둘씩 황혼기를 바라보고 있다. 최근 각 구단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재정악화와 내부 유망주 육성 정책 등의 이유로 선수단 규모를 축소하면서 베테랑 선수들과의 결별은 더욱 가속화되는 분위기다.

아직 이대호-오승환처럼 적지 않은 나이에도 건재한 선수들도 있지만, 미련없이 '쿨한 이별'을 선택한 선수들의 결단도 박수를 받기에 충분하다. 그만큼 그라운드 위에서 후회 없이 모든 것을 불살랐기에 가능한 용기일 것이다. 불과 10~20년 전 혜성처럼 등장했던 대형 선수들이 세월의 흐름 속에 하나 둘 저물어가고 있는 모습은, 그들의 활약을 바라보며 함께 울고 웃던 팬들에게도 묘한 감정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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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우 권혁 KBO최고령선수 82년생황금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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