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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균영 작가의 편지.
 이균영 작가의 편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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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문예에 계속 낙방하다

나는 대학재학 4년 내내 시간제, 입주 가정교사 등으로 거처를 10여 곳은 더 옮겨 다니면서 참 어렵게 마쳤다. 가난에 몹시 찌든 대학생활이었다. 적당한 가난은 낭만일 수 있으나 생계조차 절박한 가난은 모든 걸 앗아갔다. 그래서 나의 대학 4년은 삭막했다.

1969년 2월, 대학 졸업과 동시에 군에 입대했고, 제대한 지 열흘 만인 1971년 7월12일 경기도 여주의 한 중고교 교단에 섰다. 하늘은 가난 때문에 학교에도 다니지 못한 신문배달 소년의 첫 번째 소원인 교사가 되는 일은 쉽게 들어주었다.

그런데 하늘은 나에게 두 번째 소원인 작가의 입문은 쉽사리 들어주지 않았다. 교사가 된 이후 비로소 생활에 안정감을 찾은 뒤부터 해마다 가을이면 어김없이 단편소설이나 중편소설을 탈고하여 신문사 신춘문예에 공모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해마다 '꿩 구워 먹은 소식'인 듯 소식이 없었다.

10년 넘게 계속 떨어지니까 나중에는 나 스스로 재능이 부족하다는 자괴감, 거기서 오는 우울증 등을 심하게 앓았다. 1987년 그해에는 '화석(化石)'이라는 중편소설과 '둑'이라는 단편소설을 써서 두 신문사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각각 응모했다.

그런 뒤 내심 어느 한 곳에서 틀림없이 당선될 거라고, 오만하게도 미리 당선소감까지 써두었다. 그리고는 크리스마스 때부터 초조히 속달이나 전보를 기다는데 그해 연말까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때의 절망감은 수십 길 낭떠러지에서 추락한 기분이었다.

그 얼마 뒤 뜻밖에 낯모르는 이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발신인은 이균영 씨였다. 편지봉투 속에는 200자 원고지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박도 님
계속 쓰신다면 문운(文運)이 따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1987년 새해 이균영 드림

그 순간 '이 사람이 누구 약 올리나?' 싶어 화가 벌컥 났다. 그 며칠 후 그분의 이름을 더듬자 한 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며, 19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한 소설가로 그해 동아일보 신춘문예 심사 위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그분은 나에게 '아편 한 줌'을, 잦아진 용기를 북돋아 준 고마운 분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20년 가까이 해마다 신춘문예 공모에 계속 떨어지고 나니까 문득 나 자신이 미워졌다.
 
 전남 여수의 은사 댁으로 찾아가 인사드리다.
 전남 여수의 은사 댁으로 찾아가 인사드리다.
ⓒ 권태균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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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은사 박철규 선생님

그 무렵 어느 일요일 동네(서울 종로 구기동) 한 목욕탕에 갔다가 한 친구를 만나 가까운 커피집에서 차담을 나누었다. 그는 원래 고3 때 짝이었던 염동연(전 국회의원)의 외대 독문과 친구인 바, 대학 1학년 때 전남 보성 친구집에 갔다가 어울려 알게 됐다. 그 이후 대학 2학년 때 그가 내가 재학 중이던 대학 경제과로 편입해 와서 더욱 친밀하게 지낸, 부산의 한 고교 출신이었다.

"박형, 그새 작품집 낸 것 있습니까?"
"웬걸요, 아직 등단도 못 했습니다."


낙담하는 나를 보고 그는 자신의 얘기를 조심스럽게 들려주었다. 그 몇 해 전에 최고령으로 외무고시에 합격한 얘기를.  

"청춘을 담보삼아 여섯 해나 떨어지고 나니까 아찔하대요. 그런 뒤 냉철히 반성해 보니까 나 자신이 공부에 대해 오만했어요. 예를 들면 5천년 한국사를 공부하면서 2개월 작전을 세웠거든요. 그게 말이 됩니까? 게다가 떨어진 그 이듬해에는 지난해 부족한 교과 중심으로 대충 공부하고 다시 시험에 임했었지요. 그렇게 여섯 차례나 낙방한 그다음 해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새 출발에 앞서 나 자신의 오만함을 깊이 반성하고 백지상태로 초등학생의 처지로 공부했습니다. 그랬더니 운명의 신은 그해 최고령으로 합격 시켜 주더군요."

그 친구의 얘기를 듣는 순간, 바로 내가 20년 가까이 신춘문예에 낙방한 원인의 답을 얻었다. 그동안 나는 문학 공부를 열정적으로 하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고교시절에 얻은 문명이 큰 독이었다. 나는 얄팍한 내 재주에 취해 감나무 밑에서 홍시가 입에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요행꾼이나 다름이 없었다.

한 실례로 대학 재학 당시, 영문과 노희엽 교수로부터 '세계문학' 강의를 들었을 때다. 매주 노 교수의 '세계문학 리스트' 작품을 한 권씩 읽고, 리포트를 제출케 했다. 그런데 나는 그 작품을 정독, 통독하지 않고, 해설집이나 축소판만 보고 리포트를 써서 제출했다. 그리고는 그 줄거리나 주인공만 달달 외워 시험에 치른, 학점만 용케 따는 요령꾼으로 얕게 문학공부를 했다.  

문학이란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인데, 그게 그리 쉬운 공부인가? 설사 그런 요행으로 등단했다면 작가로서 그의 생명이 얼마나 가겠는가? 그 친구와 헤어진 후 귀가하면서 나는 참으로 많은 자성을 했다. 내 인생에 귀한 만남이었다. 

그날 이후 나도 마음속 자만심을 버렸다. 세상사를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 무명하다는 초등학생의  처지가 됐다. 그때부터는 글을 쓸 때 단어 하나, 문장 한 줄에도 프로야구 마무리투수처럼 최선을 다하는 습관을 길렀다.

하지만 이미 마흔(황금기)을 넘긴, 정시 기차를 놓친 듯한 패배감에서 오는 우울증으로 지냈다. 그 시절 어느 날 교사로서 판서를 많이 쓴 데서 오는 어깨통증으로 한방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고 있을 때였다. 퇴직 후 고향 여수에서 지내시던 박철규 선생님이 안부 전화를 했다.

인사말이 오간 끝에 내가 아직 소설로 등단치 못했다고 하니까 박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씀했다.

"박군, 내가 보기에 자네는 수필이 더 좋아. 이참에 수필가로 진출해보시게."

통화를 마친 뒤 선생님의 말씀을 새겼다. 어쩌면 선생님은 제자를 적확히 보신 다음의 충고 같았다.

  
 새한신문 칼럼
 새한신문 칼럼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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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한신문>에 칼럼을 연재하다

그 몇 해 전인 1983년 12월 중순, 퇴근길 복도에서 이대부고 정식영 교장선생님과 마주쳤다.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지나치는데 교장선생님은 뒤돌아서면서 나를 불렀다. 그래서 교장실 소파에 마주 앉았다.

"교총에서 발간하는 새한신문사에서 '중고교 남녀공학'에 관한 글을 연재하겠다고 나에게 필자를 의뢰해 왔어요. 박 선생님이 한 번 써 보겠소?"
"어떤 글을 요구하는지 알아보고 제가 쓸 수 있다면 써보겠습니다."  


내 대답에 정 교장 선생님은 그 자리에서 편집 담당기자의 전화번호 메모를 건넸다. 그 이튿날 전화로 편집 기자와 약속했다. 퇴근길에 서울 광화문 교총회관 구내 새한신문사에 들렀다. 담당 김강자 편집기자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당시 서울 시내 중고교에서 남녀공학을 시행하는 학교는 이대부중고와 서울사대부중고 두 학교뿐이었다. 게다가 완전한 남녀 혼성학급을 편성한 학교는 이대부중고가 유일했다.

편집기자 김강자 씨는 나에게 남녀공학학교의 학생생활에 대해 1회 8매 분량으로 한 달간 연재로 4회분을 청탁했다. 그때는 이메일이 널리 통용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래서 나는 매주 소정의 원고를 써서 원고마감 전날 퇴근길에 직접 광화문에 있는 신문사로 갖다주었다.

그때 나의 글은 <우리는 친구>라는 제목에 '남녀공학'이란 부제로 1984년 신년호부터 실렸다. 그 첫 회가 나간 뒤 여러 통의 전화를 받았다. 독자들로부터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말과 함께, 자기네 신문이나 잡지에 전재해도 좋으냐는 의사를 타진해 오기도 했다.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해 1월 하순, 마지막 4회분 원고를 써서 새한신문사로 갔다. 담당 김 기자는 나에게 4회를 더 연장해 써달라고 부탁했다. 나로서는 감히 청할 수 없는 고마운 요청이었다. 그래서 그해 2월 말까지 모두 8회가 나갔다.

그 연재가 끝날 무렵, 김 기자는 나에게 뜻밖에 또 다른 제의를 했다. 새한신문 1면 칼럼을 부탁했다. 그 무렵 새한신문 칼럼 필진은 대학교수나 언론인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돌아가면서 쓴다고 말하면서 그 필진으로 추천했다.

그러면서 중고교 교사에게는 좀처럼 칼럼을 청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그랬다. 그 무렵 한 잡지사 편집자로 있는 친구도 그와 같은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해 연말까지 새한신문에 칼럼을 썼다.

은사 박철규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뒤 그해 겨울방학 내내 그동안 여러 신문과 잡지 등에 실린 글을 찾았다. 그 글들을 다시 가다듬으면서 또 한편으로 새로운 글도 썼다. 그해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는 단행본 한 권 분량의 원고가 쌓였다.
  
 첫 산문집 <비어있는 자리>
 첫 산문집 <비어있는 자리>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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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집 원고를 준비하다

곧장 출판사 교섭에 나섰다. 학부모가 출판사 대표인 곳도, 교지를 편집하면서 알게 된 인쇄소와 출판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전혀 모르는 출판사에서 책을 내고 싶었다. 교보문고에 가서 그즈음 산문집이 잘나가는 10여 곳의 유명 출판사 주소와 전화번호를 찾아 수첩에 적어온 뒤, 퇴근 후 한 곳씩 찾아 나섰다.

하지만 애써 찾아간 출판사에서는 원고의 내용을 묻고 교육이야기라고 하면 보지도 않고 손을 저었다. 그러면서 선심 쓰듯이 자비출판이라면 내주겠다고 말했다. 그럴 경우 말없이 원고 보따리를 들고 돌아섰다. 간혹 두고 가라는 출판사가 있을 때는 가지고 간 원고 보따리를 맡겼다. 그러면 2주 후, 혹은 한 달 후에 찾으러 오라고 말했다.

1989년 새해 초까지 대여섯 출판사를 거쳤으나 선뜻 나서는 곳은 없었다. 한 출판사 사장이 말했다.

"그 솜씨로 국어참고서를 쓰세요. 홍익여고 서 아무개 선생 아세요?"
"예, 잘 압니다."


그분은 이웃 학교 교사로 나는 이대 앞 대광인쇄소에서 각자 학교 교지 편집을 하면서 서로 인사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서 선생, 국어참고서 요즘 불티나듯 잘나갑니다. 아마 준재벌급은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참고서는 내지 않을 겁니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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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교사생활 후 원주에서 지내고 있다. 장편소설 <허형식 장군> <약속> <용서>, 역사다큐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사진집<지울수 없는 이미지> <한국전쟁 Ⅱ> <일제강점기> <개화기와 대한제국> <미군정 3년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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