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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은 노동3권(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을 국민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 중요한 건 이 권리가 노동자나 노동조합만을 위해서가 아니라는 점이다. 노동3권이 침해되고 파업이 불가능한 나라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유마저 탄압하는 전체주의 국가에 가깝다. 그 피해자는 단지 노동자나 노동조합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다.

오늘날 누리는 대한민국의 자유와 부는 결코 특정 정치인이나 몇몇 기업들의 덕이 아니다. 열악한 근로환경에 청춘을 갈아 넣으며, 부단히 처우를 개선하고 권리를 관철한 수많은 근로자의 피와 눈물의 결과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1970년 11월 13일 피맺힌 절규가 하늘을 갈랐다. 스물두 살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은 암울한 노동현실에 맞서 결연히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절절한 외침은 거센 파도가 돼 퍼졌고 많은 이들이 그 울림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장기 위장 취업 1세대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이른바 장기 위장 취업한 1세대인 윤조덕(70) 한국사회정책연구원 원장.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이른바 장기 위장 취업한 1세대인 윤조덕(70) 한국사회정책연구원 원장.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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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전태일 열사의 외침은 당시 스무 살이었던 윤조덕(70)의 귓가에도 와 닿았다. 서울대학교 공대 2학년 학생으로 분신 정국에 참여했던 그에게는 50년 전의 그날이 어제처럼 생생하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한국노동연구원을 퇴직한 후 현재 사단법인 한국사회정책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는 윤조덕 원장(이하 윤 원장)은 1970년대 유신 시절 대학생 신분을 숨기고 이른바 장기 위장 취업한 1세대다. 몸으로 노동자들과 부딪치며 땀을 흘렸고, 당대 굵직한 인물들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또 노동 관계법 연구에 매진해 대한민국 근로자 권익신장의 큰 그림을 그렸다. 그럼에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건 좀처럼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 했던 그만의 고집 때문이다.

그런 윤 원장이 전태일 열사의 분신 50주기를 맞아 그동안 털어놓지 않던 지난날을 반추했다. 행여 시대에 누가 될까, 혹은 자랑이 될까, 수없이 망설였지만 소중한 노동운동 역사를 전하는 데 보탬이 되기 위해 결심한 윤 원장. 삶 자체가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이었던 그의 회고에 우리 사회가 견디어 낸 지난한 세월이 빼곡히 묻어 나왔다.

지금 이 세상에 없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것이 가능할까? 전태일 열사와 윤 원장의 관계가 그렇다. 윤 원장은 열사의 죽음 이후 열사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그 관계는 두터워졌다. 1969년 서울대 공대에 입학해 공대 내 써클인 산업사회연구회 멤버로 학생운동에 가담하고 있던 윤 원장은 1970년 11월 15일의 서늘한 기억을 잊을 수가 없다.

"서울 종로5가 KSCF(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 사무실에 갔더니 평소 잘 알던 고 오재식 사무총장께서 명동 성모병원에 함께 가자는 거야. 전태일 열사가 을지로 병원에서 그리로 옮겼다는 거지. 병원을 방문했는데… 영안실이었지. 열사 모친인 이소선 어머니가 계시더군."
  
1970년 11월 13일에 발생한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을 전한 ‘가칭 민권수호 학생연맹 준비위원회’ 명의 호소문 <농성근로자 분실자살 -처우개선 외치던 청년- 「근로기준법」 껴안고>. 윤조덕 원장은 11월 15일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이소선 어머니를 조문한 것으로 기억했다.
 1970년 11월 13일에 발생한 전태일 열사 분신 사건을 전한 ‘가칭 민권수호 학생연맹 준비위원회’ 명의 호소문 <농성근로자 분실자살 -처우개선 외치던 청년- 「근로기준법」 껴안고>. 윤조덕 원장은 11월 15일 성모병원 영안실에서 이소선 어머니를 조문한 것으로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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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조문을 하며 느낀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분노는 지금 떠올려도 생생하다. 전태일 열사와의 사후 관계는 그렇게 시작됐다. 분신 이후 청계노조 사무실이 만들어졌다. 사무실이라곤 해도 가건물로 된 옥탑방 같은 곳이었다고 한다. 윤 원장은 그곳을 자주 드나들었고 전태일의 친구들인 노동자들을 알게 됐다. 다들 20대 초반이었고, 열사의 죽음에 무척 힘들어 했다.

"서울 창동집이라고, 이소선 어머님이 사시던 판잣집이 있었어. 최종인, 이승철, 임현재 등 전태일 열사의 친구들 네댓 명도 그곳에서 함께 살았지. 통행금지가 있을 때여서 나도 가끔 자고 왔지. 나는 흔히 말하는 '학삐리'였지만 전태일 열사의 가족,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동지의식이 생겨났어. 가장 많이 드나든 건 장기표 선배였는데, 감시가 심할 때라 밤 12시 통행금지가 된 후 나타나곤 했지. 그렇게 모여 이소선 어머님 위로도 해드리고, 열사 친구들과 노동조합에 대해 이야기도 나눴어."

가족의 수난
 
윤조덕 원장이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1969년 1학기는 공대 학생회 주도의 3선개헌 반대 투쟁으로 정상적인 수업이 진행되지 못했으며, 6월에는 휴교령이 내려져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였을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의 고시문이 게시된 다음 날인 1969년 9월 14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 건너편에 위치한 별관에서 제3공화국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3선 연임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이 야당(신민당)도 모르게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 1969년 9월 13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 명의의 고시문 윤조덕 원장이 서울대 공대에 입학한 1969년 1학기는 공대 학생회 주도의 3선개헌 반대 투쟁으로 정상적인 수업이 진행되지 못했으며, 6월에는 휴교령이 내려져 조기 방학에 들어갔다. 그런데 우연의 일치였을까?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장의 고시문이 게시된 다음 날인 1969년 9월 14일 새벽, 국회 본회의장 건너편에 위치한 별관에서 제3공화국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의 3선 연임 허용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개헌안과 국민투표법안이 야당(신민당)도 모르게 날치기로 통과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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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 관련 데모 새 법 따라 단속’이라는 제목의 “대검찰청은 17일 아침 앞으로 국민투표에 관련하여 「데모」를 벌였을 때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적용치 말고 국민투표법을 적용, 처벌하도록 관하 각 검찰에 지시했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를 공고문에 그대로 실었다.
▲ 1969년 9월 17일 서울대 공과대학장 명의의 공고문 3선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 관련 데모 새 법 따라 단속’이라는 제목의 “대검찰청은 17일 아침 앞으로 국민투표에 관련하여 「데모」를 벌였을 때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을 적용치 말고 국민투표법을 적용, 처벌하도록 관하 각 검찰에 지시했다”고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를 공고문에 그대로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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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원장은 자신을 학삐리에 불과했다고 했지만 노동운동으로 점철된 그의 삶 구석구석엔 시대와 맞서던 저항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 자신뿐만 아니다. 그의 형제자매들 역시 불의에 항거하며 쉽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1950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난 윤 원장은 전형적인 시골 집성촌 출신으로 3남 1녀 중 장남이다. 윤 원장이 당시 전태일 열사와 맺은 인연은 동생들인 둘째 윤관덕(남, 1953년생, 고려대 수학과 72학번), 셋째 윤후덕(남, 1957년생, 연세대 사회학과 76학번, 현 더불어민주당 파주갑 국회의원), 막내 윤명신(여, 1959년생, 이화여대 사범대 77학번)에게도 운명처럼 이어진다.

쉽지 않은 고단한 세월을 겪어서일까. 윤 원장은 학생운동 등으로 얽힌 동생들과 가족사 이야기에는 늘 조심스럽다.

"살림이 어려웠던 전태일 열사 형제들은 공부를 하는 게 소원이었어. 동생 중에 전태삼이라고 있는데 초등학교 졸업을 못했지. 이소선 어머니와 친구들, 장기표 선배, 주변과 상의해서 전태삼에게 공부를 시키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서대문에 방을 따로 얻어 학원을 보냈어. 그 때가 1971년이었는데, 이소선 어머니와 의논해서 대입 재수하던 동생 윤관덕에게 제의하여 전태삼의 공부를 몇 달간 도와주게 했지."

전태일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은 덜었지만, 그 인연은 결국 동생을 사회개혁에 눈뜨게 했다. 대학에 입학한 윤관덕은 당시 운동권이던 제일교회에서 서울지역교회청년협의회 총무를 맡았다가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으나 다행히 1년 만에 출소했다. 하지만 훗날 또 다른 공안사건으로 엮여 다시 감옥에 갔다. 다른 동생들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윤후덕은 대입 시험 직후 두 달 정도 내가 공장 체험을 제의해서 서울 가리봉동의 전기소켓을 찍어내는 공장에서 일을 했지. 동생이 나중에 출판업을 했는데, 불온서적 출판이라는 죄명으로 감옥을 두 번이나 다녀왔지. 세계출판사라고, 거기서 전태일문학상 제1, 2회를 주관했어."

큰오빠의 영향력은 막내 여동생에게까지 미쳤다.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평화시장에서 시다(보조)로 일할 것을 제의했다. 당시 실제 시다들, 즉 여공들 나이가 여동생 또래였기에 그 어려움을 알기를 바라는 큰 오빠의 바람이었다. 이를 위해 윤 원장은 직접 청계노조를 통해 여동생을 추천했다. 윤 원장의 어머니도 동생의 구속 이후 민가협(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에서 이소선 여사와 인연을 맺어 마음을 나누는 사이가 됐다.

"훗날 동생들이 어릴 때부터 나를 롤모델로 삼았다고 이야기를 하더라고. 셋째가 펴낸 책에서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형이 정신적이 지주였다'고 썼어. 좋은 의미에서 권유를 한 건데 결과적으로 동생들과 어머니 모두 전태일 열사와 여러모로 관계 맺게 된 거지."

경기도 지방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윤낙용)를 둔 4남매가 모두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하던 가족사를 처음으로 털어놓은 윤 원장. 만감이 교차하는 듯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그는 마른침을 삼키고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동생이 수배 중 가명을 쓰고 도망 다녔지. 내 주민등록증도 빌려 주고. 친구 집도 소개해 머물게 했어. 한밤중에 모두 자고 있는데 경찰이 들이닥쳐 온 가족을 괴롭힌 일도 있었어. 일가친척도 샅샅이 조사하고. 본가, 외가, 처가 3족을 멸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할아버지 형제들까지 9족이 고난을 겼었지. 어머님(이정순)은 치를 떠셨지. 그때 놀라셔서 폐경이 왔어. 처음 하는 말이야. 가족이 너무 괴로웠지. 가족의 수난사라고 할까. 결국 아버님이 1977년 2월 48세에 공무원을 그만 두셔야 했어."
 
위장 취업했던 일신제강(주) 오류제조소 1978년 노동조합 임원 야유회 때의 윤조덕 원장(앞줄 왼쪽에서 3번째)
 위장 취업했던 일신제강(주) 오류제조소 1978년 노동조합 임원 야유회 때의 윤조덕 원장(앞줄 왼쪽에서 3번째)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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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편 "유일하게 찾아온 이가 후배 김문수였어"(http://omn.kr/1qcrj)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자료 제공 : 윤조덕 원장의 대학 동기 노태천씨


태그:#윤조덕, #전태일, #이소선, #위장취업, #노동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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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순창군 사람들이 복작복작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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