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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항구다. 서울이 코 앞이다. 격변기 이 땅에 들어온 모든 외세가 인천항을 통한 건 그 때문이다. 제국주의 일본도, 일제를 무너뜨린 점령군 미군도 그랬다. 6.25 한국전쟁 때 연합군도 인천으로 상륙했다. 얼마 전 시민들에게 개방한 부평의 '캠프 마켓(Camp Market)'은 그런 역사의 흔적이다. 그 너른 땅이 광복 전엔 일본군 조병창이었고 해방 후 지금까진 미군의 보급부대다.

인천항의 서글픈 현대사

광복 직후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은 항구와 가까운 남인천역(현 숭의역) 부근에 터를 잡았다. 거기서 6.25 한국전쟁까지 치르고 1970년대 초 철수했다. 그 미군부대에서 많은 '미제' 물건들이 흘러나왔다. 미군이나 거기 드나드는 한국인들이 암암리에 들고나온 것들이었다. 군복, 군화를 비롯해 담배며 술, 버터와 치즈, 씨레이션이라 불렸던 전투식량까지 다양했다. 지금의 동인천역 뒤편에는 그것들만 거래하는 시장이 섰다. 양키시장이라 불렀다. 지금도 있다.

군대 쓰레기도 쏟아져 나왔다. 물자가 풍족한 나라의 군인들이다 보니 씀씀이가 헤펐다. 도무지 아낌이 없었다. 제법 쓸 만한 물건들이 많았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그걸 뒤져 돈 될 만한 것들을 건져냈다. 음식물 쓰레기도 있었다. 좋은 말로 잔반이라고 했다. 일반 쓰레기야 그냥 내다버리거나 태우면 됐지만 음식물 쓰레기는 그럴 수 없었다. 한국 업자를 골라 그걸 전담해 처리하게 맡겼다.

잇속 밝은 업자는 그걸 내다버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돈 받고 팔았다. 미군에게 돈 받고 갖고 나온 쓰레기를 돈 받고 되판 거다. 양쪽으로 이문이 남는 장사였다. 가축에게나 줄 성싶었지만 그들에게는 돌아가지 않았다. 사람들이 먹었다. 먹을 게 없던 시절이었다. 게다가 햄이나 소시지 같은 건 난생처음 보는 거였다. 맛은 물론이려니와 영양가도 만점이었다. 가끔 담배꽁초나 껌 종이 같은 게 나오기도 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다.

사람들은 줄을 서가면서까지 문제의 트럭을 기다렸다. 지금의 숭의종합경기장(옛 인천공설운동장) 부근이었다. 그걸 받아다 음식을 만들어 파는 식당마저 생겼다. 지금의 창영동 일대에는 그걸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 골목이 생겼다. 거친 일, 막일 하는 분들이 주요 고객이었다. 넘치는 기름기가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다. 지금으로선 도저히 믿기지 않는 풍경은 6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다. 인천사람들은 그걸 꿀꿀이 죽이라 불렀다. 모두 없이 살던 시절의 이야기다.

하지만 있는 사람들도 남몰래 사다 먹을 만큼 별미였다고 한다. 그나마 없어 못 먹는 사람이 더 많았다. 그건 오늘날 우리가 즐겨 먹는 부대찌개의 원형이 됐다. 찌개 이름이 '부대'인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니 사실 부대찌개는 우리의 서글픈 현대사가 담긴 음식이다. 먹고 살기 어려웠던 유년기의 처참한 추억이 어려 있다. 불과 50여 년 전이다(인천역사자료관 역사문화자료관 간 「인천역사문화 총서 25호, "인천개항장풍경(김윤식 편)"」 참조).

전통의 맛을 지킨다, 신포동 양지부대고기
 
신포동 양지식당의 부대찌개 신포동 양지부대고기의 부대찌개는 손에 집히는 모든 것이 식재료라는 전통의 방식을 충실히 따른다. 온갖 채소가 벽을 쌓았다
▲ 신포동 양지식당의 부대찌개 신포동 양지부대고기의 부대찌개는 손에 집히는 모든 것이 식재료라는 전통의 방식을 충실히 따른다. 온갖 채소가 벽을 쌓았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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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까지 신포동 일대는 인천의 대표적 번화가였다. 브랜드 매장이 밀집해 있었고 고급스러운 다방과 유명 음식점도 즐비했다. 그중엔 부대찌개 집들도 꽤 있었다. 하지만 인천 외곽에 신도시가 많이 생기고 인구가 빠져나가면서 지역은 쇠락해 갔다. 부대찌개 식당들도 거의가 문을 닫거나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그런 부침의 와중에도 40년 넘게 한 자리를 지켜온 부대찌개 집이 있다.

신포동 주민센터 뒤에 있는 '양지부대고기'다. 주인장 황미선 여사가 1978년 개업 이래 꼿꼿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식당도 거의 개업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다소 낡고 허름해 뵈지만 정갈하다. 사장과 식당이 함께 곱게 늙어가는 중이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면 '천하양지(天下陽地)'라 쓰인 액자가 눈에 확 들어온다. 양지식당이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야심이 담겼다.

식당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집은 스테이크가 대표메뉴다. 물론 미국식이 아니라 한국식이다. 소금장에 찍어 먹는 등심구이와 비슷하다. 찌개에도 고기가 많다. 소 살코기가 한 주먹이나 얹혀 나온다. 밑바닥에는 민스(잘게 간 소고기를 뭉친 덩어리)도 숨어 있다. 채소도 풍부하다. 깻잎, 쑥갓에 각종 버섯과 미나리까지 빽빽이 들어 있다. 특히 미나리는 특유의 향으로 고기의 묵직한 맛에 상쾌하고 시원한 반전을 준다. 

부대찌개는 사실상의 잡탕찌개다.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함께 넣어 끓인다. 그래야 양도 풍부해지고 조금 역한 '미제 냄새'도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다. 양지식당은 그런 전통의 레시피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는 셈이다. 물론 푸성귀는 철에 따라, 시세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기본은 변하지 않는다. 황 사장은 처음 문 열 때부터 이 방식을 고수해 왔다고 한다. 그게 제일 맞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앞으로도 그럴 거란다.

늘 푸른 솔처럼, 부평 솔밭정 부대찌개
 
부평 솔밭정 부대짜개 부평 솔밭전 부대찌개는 간 마늘과 독자적 양념장이 비법이다. 칼칼하면서 시원하고 개운하면서 깊다.
▲ 부평 솔밭정 부대짜개 부평 솔밭전 부대찌개는 간 마늘과 독자적 양념장이 비법이다. 칼칼하면서 시원하고 개운하면서 깊다.
ⓒ 이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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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평엔 1945년 이후 계속 미군부대가 있다. 도시 한복판 노른자위 땅이다. 그 부지를 반환하고 철수하기로 했지만 아직 남은 시설과 인력은 있다. 그 주변으로 부대찌개 집이 여럿 있었다. 부평시내에도 꽤 있었다. 하지만 그 전통의 부대찌개 집들은 시나브로 사라졌다. 그 자리를 프렌차이즈 식당들이 대신했다. 그 와중에도 유독 한 집은 살아 있다. 1년 전쯤 부평에 다시 문을 연 '솔밭정 부대찌개' 집이다.

이 식당의 서일호 사장은 80년대 초 부평시내에서 같은 상호의 식당을 냈었다. 시내의 가게 임대료가 오르는 바람에 외곽을 돌아야 했지만 '솔밭정'이란 상호를 바꾸진 않았다. 사계절 늘 푸른 소나무를 닮고 싶은 마음을 담았다. 지금은 손님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추려 찌개백반 따위의 다른 메뉴도 곁들이게 됐지만 부대찌개는 언제나 누가 뭐래도 대표 메뉴다. 처음 할 때부터 쭉 그래 왔다.

이 집 부대찌개 레시피는 간결하다. 번잡스럽게 이것저것 넣지 않는다. 햄과 소시지에 쑥갓 몇 대, 파와 무 정도가 들어갈 뿐이다. 그 식자재들은 개업 때부터 똑같은 브랜드를 쓰고 있다. 다른 걸 쓰면 맛이 안 난단다. 물론 '미제'다. 허전할 것 같은 빈틈을 서 사장의 특제 양념이 채운다. 놀랍도록 깊은 맛을 낸다. 또 하나의 특징은 간 마늘이다. 1인분에 보통 차 숟갈로 세 개쯤 넣는다. 마늘의 알싸한 향이 배여 맛은 한층 풍요로워진다. 칼칼하고 개운하다.

"사실 저도 어릴 적에 꿀꿀이죽을 먹었어요. 근데 그때만 해도 누린내 같은 게 조금 났거든요. 그럴 때 마늘 한 주먹 갈아 넣으면 시원하니 맛이 났죠. 그 방식으로 40년을 온 겁니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마늘이 건강에도 좋다고 하잖아요."

서일호 사장은 '배운 게 도둑질'이라며 앞으로도 계속 부대찌개로 장사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가게를 옮겨 다녀도 단골들은 어찌 알고 찾아온다. 그 정성이 고마워서라도 장사를 그만두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다만 장사가 조금 된다 싶으면 임대료 올려 쫓아내곤 했던 건물주들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서 사장은 그게 제일 걱정이다. 어느 기사의 제목처럼 착한 건물주는 아직 없는가 보다.

부대찌개는 이 땅에 들어온 미군과 그 역사를 함께 한다. 오늘날 의정부나 송탄이 부대찌개로 유명해진 건 그 도시에 오래도록 미군이 주둔해 있었기 때문이다. 인천은 사실상 주한미군의 베이스캠프 격이다. 꿀꿀이죽도 여기에서 시작됐다. 그런데 인천 부대찌개는 없다. 굳이 '부대찌개는 인천이 원조'라고 말하는 이도 없다. 아직도 노포들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걸 보면 그걸 싫어해서 그런 건 아닌 듯하다.

어쩌면 인천 사람들에게 그건 그냥 숨기고 싶은 흑역사여서 그럴 수 있다. 아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정말 큰 상처는 쉬 드러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지난 시간이 늘 자랑스러울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아프고 시린 시절의 기억은 오늘을 사는 힘이 되어 준다.

인천상륙작전의 포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삶의 터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처참한 절망의 공간에서도 인천 사람들은 꿋꿋하게 생존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인천 사람들은 그렇게 어질지만(仁)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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