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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기 위해 1554년에 준공되었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여러 부속 시설들이 들어서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로 변모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부속시설은 현재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 임고서원 포은 정몽주 선생을 기리기 위해 1554년에 준공되었다. 지금은 예전과 달리 여러 부속 시설들이 들어서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로 변모했다.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부속시설은 현재 운영을 중단한 상태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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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경상북도 영천이다. 그리고 고향 집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임고서원'이라는 곳이 있다. 어린 시절, 임고서원은 꽤 괜찮은 소풍지였다. 그런데 이 일대 아작골(절골)이라는 곳은 한 번에 무려 150명 이상의 주민들이 학살당한 곳이었다.

지난 추석 연휴, 코로나로 인해 하루만 어머니를 뵈러 고향에 내려갔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 아작골을 찾아갔다. 지역신문에서 찾아본 바로는 임고서원에서 등산로를 따라 2.5킬로미터 정도 가다 보면 당시 사건을 기록한 안내판이 있는 현장을 찾아갈 수 있다고 나와 있었다. 그런데 찾기가 퍽이나 어려웠는지 두 번의 시도 끝에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나도 마음을 굳게 먹고 출발했다. 하지만 태풍으로 넘어진 듯한 나무를 헤치며 두 시간 이상 헤맸지만 현장을 찾지 못했다. 결국 체력도 떨어지고 해까지 기울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산길이 익숙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면서도 현장을 안내하는 어떠한 이정표도 없었던 점은 무척 아쉬웠다.

'우리는 죽으러 간다', 임고면 아작골의 절규
 
  이런 길을 헤치고 한참을 헤맸지만 이정표가 전혀 없어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 쓰러져 길을 막고 있는 나무  이런 길을 헤치고 한참을 헤맸지만 이정표가 전혀 없어 결국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 박기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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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7월 말께, 임고면 주민 10여 명은 경찰에 잡혀 영천 경찰서로 끌려 갔다. 이때 경찰서에는 약 150명이 구금돼 있었다고 한다. 1주일 정도 지난 후 임고면 주민 중 일부는 풀려났다. 하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8월 7일 새벽, 트럭 대여섯 대에 나눠 타고 아작골이 있는 임고면 선원리로 이동했다. 끌려온 사람들은 임고면뿐 아니라 고경면이나 화북면 주민들도 다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밧줄에 묶인 채 아작골로 올라갔다. 이때 이미 자신들의 운명을 직감했던지 산으로 올라가면서 '우리는 죽으러 간다!'라고 울부짖었다. 이 절규는 트럭 소리에 잠을 깬 주민들의 귀에까지 와 닿았다.

잠시 후 골짜기에서 총성이 울렸다. 얼마 후 주민들이 올라가 보니 굴비 엮듯이 한 줄로 묶여진 시신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는데 그 높이가 어른 키 이상 되는 골짜기를 다 채울 정도였다. 

이를 바탕으로 학살 장면을 대략적으로 재구성해볼 수 있다. 먼저 경찰들은 끌고 간 사람들 중 일부를 횡으로 줄 세운다. 그리고 총을 쏘았고 사람들은 골짜기로 떨어졌다. 곧이어 그 다음 줄을 세우고 다시 총을 쏘았다. 이렇게 시체들이 골짜기에 겹겹이 쌓이게 됐다.

가족들은 시신을 수습하고 싶었다. 하지만 경찰은 현장에 접근하면 사상범으로 간주하겠다며 막았다. 그리고 낙동강 전투가 치열해지면서 주민들은 피난을 떠나야 했다. 결국 시신들은 수습되지 못하고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9월이 돼서야 주민들이 피난에서 돌아왔다. 그러자 경찰은 집집마다 한 명씩 나오라고 해서 시신을 치우게 했다. 더운 여름 날 한 달 이상 비까지 맞으며 방치됐던 시신은 형체를 알기 힘들 정도로 뭉개지고 뒤엉켜 있었다. 당시 아버지의 시신을 찾기 위해 온 구영회(1935년생)는 시신들의 부패 상태가 너무 심해 결국 아버지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은 사건 현장에 대충 묻었다. 그러다 보니 사건 이후 10여 년이 지난 1960년 5월 26일자 <영남일보>에는 그때까지도 현장에 백골이 나뒹굴고 있다고 나온다. 또한 같은 기사에서 희생자들 중 일부는 '빨갱이 전과'가 있지만 대부분은 '관제 빨갱이로 몰려 학살된 양민들'로 보인다고 했다.
  
왼쪽 산 너머에 아작골이 있다. 현재 임고강변공원에는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지역 내 코로나 확진자 발생으로 인해 공원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 임고면 아작골 왼쪽 산 너머에 아작골이 있다. 현재 임고강변공원에는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지역 내 코로나 확진자 발생으로 인해 공원 출입이 통제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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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한 '국민보도연맹'

1950년 7월에서 9월까지 영천의 전체 희생자 수는 600여 명에 달한다. 특히 8월에만 380여 명이 집중적으로 희생됐는데 이중 아작골을 포함한 임고면 일대에서 사망한 인원은 280여 명이다. 일가족이 몰살 당해 수십 년이 지나도록 사망신고조차 못한 경우도 있었다.

이런 희생자 수는 인구 대비 규모가 큰 편에 속한다. 이에 대해 그저 좌익세력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단순화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미군정의 가혹한 미곡수집령과 일부 지주들의 농토 독점으로 쌓였던 분노가 불안한 정세 속에서 연쇄작용을 일으킨 것으로 봐야 한다.

특히 미군정의 미곡수집은 영천에서 가장 가혹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였다. 당시 영천군수 이태수는 미곡수집에 불응할 시 엄벌에 처하겠다고 했다. 군 식량계원은 공출에 응하지 않는 사람들을 세워두고 서로 뺨을 때리게 한 후 차에 태워 유치장에 가뒀다. 그런데 이때 운임 10원과 유치장 숙박료 90원까지 강제로 내게 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계속되니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1946년 인접한 대구에서 미군정에 저항하는 10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러자 영천 주민들은 쌓였던 분노를 표출하며 수만 명이 봉기한다. 영천은 같은 시기에 봉기했던 22개 지역 중 가장 격렬하게 저항했던 곳 중 하나이다. 이 사건은 영천에서만 600여명이 체포되고 9명이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 마무리되었다.

이후 국가는 1949년 6월 5일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했다. 1950년 2월 경 영천에도 국민보도연맹이 결성됐다. 그리고 10월 사건을 포함해 이후 발생했던 유사 사건 가담자들이 다수 가입하게 된다. 이렇게 국민보도연맹 가입자가 많아지다 보니 희생자 규모도 커진 것이다.

국가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면 과거 좌익 활동 혐의를 묻지 않고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준다고 선전했다. 앞선 임고 아작골 희생자 일부도 남로당 경력이 있었지만 이런 정부의 말을 믿고 가입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가입자들을 모두 좌익 인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남로당 조직원들이 자수하고 가입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다수는 할당량을 채우기 위한 경찰과 당국의 회유와 협박 때문에 가입을 '당한' 사람들이었다.

빨치산에게 식량을 빼앗긴 사람도 전후 맥락 고려없이 무조건 부역자로 취급하던 시기였다. 이렇게 좌우익 양쪽에서 시달리던 양민들은 혹시라도 뭔가 작은 것이라도 책잡힐까 하는 걱정에 보도연맹에 가입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이들을 모두 적대세력으로 간주하고 군과 경찰에 정리하라고 지시한다.

인권평화연구소 신기철 소장은 한국전쟁 초기에 정부가 낙동강 방어전선까지 후퇴했던 경로를 따라 보도연맹원 학살이 자행되었다는 점을 밝혔다. 국민을 '보호'하고 '인도'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 명명했지만, 실제로는 '비국민'으로 낙인찍어 죽음의 길로 인도했다.

학살은 가까운 곳에 있다

얼굴을 본 적 없는 나의 큰아버지는 한국전쟁에서 전사했다. 하지만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대전 현충원에 이름만 남겨져 있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할머니 손을 잡고 여러 보훈 행사에 따라가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천에서 벌어졌던 낙동강 전투의 치열함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끔찍한 학살에 대해서는 누구도 얘기해 준 적이 없었다. 영천의 학살은 임고뿐 아니라 대창, 북안, 금호 등 곳곳에서 자행됐다. 이곳은 모두 학창 시절 친구들이 살았던 곳이다. 친구들과 뛰어다니고 멱을 감던 산과 들, 강에서 수많은 민간인들이 피를 흘렸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너무 무관심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이를 계기로 시간이 날 때마다 전국의 학살 현장이 현재 어떤 모습인지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어떤 곳은 추모비와 추모공원이 세워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곳은 아작골처럼 현장을 안내하는 이정표 하나 없이 잊혀지고 있었다. 우리는 현대사의 불행한 일들을 나와는 멀리 떨어진 이야기로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아무 지역명이나 입력하고 뒤에 '학살'이라는 단어를 붙여서 검색해보라. 조직적인 학살이 놀라울 정도로 광범위하게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올해로 진실화해위원회가 활동을 종료한 지 10년이 됐다. 하지만 아직도 밝히지 못한 사건들과 억울한 이들이 많다. 그래서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우여곡절 끝에 '5.18 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발족했다. 이들의 노력에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내는 것이 더이상 이런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길 바라는 우리들의 역할이 아닐까 생각한다.

[참고자료]
박태균, <한국전쟁>, 책과함께
신기철, <국민은 적이 아니다>, 헤르츠나인
임영태, <한국에서의 학살>, 통일뉴스
영천신문(2020. 5. 23) <영천문화유산 다시보기 2, 임고면 선원리 아작골 원혼비>
진실화해위원회, <경북 영천 국민보도연맹사건>

태그:#영천, #임고서원, #임고, #국민보도연맹, #아작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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