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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전남 해남군 송지지서로 향하는 강금순(당시 16세)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했다. 어젯밤에 본 아버지 강부천의 몰골이 생각나서였다. 불과 이틀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탄탄한 체격에 과묵한 선비의 기품이 묻어나는 분이었다. 그런데 어제 만난 아버지는 파리한 얼굴에 초조한 눈빛을 하고는 자신을 무척이나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서에 도착하니 벌써 수십여 명의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모두 남편과 자식, 오빠에게 밥을 갖다주기 위해였다. 지서 문이 '철컥' 열리고 문 앞을 지키는 경찰이 턱짓을 하자, 아낙네들이 가져온 밥과 반찬을 일렬로 놓았다. 조금 열린 문으로 가족을 보려고 하거나, '여보'라고 부를라치면 가져온 밥이 경찰의 군홧발에 내동댕이쳐지기 일쑤였기에 송지지서 앞에는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나마 식사 시간에는 잠깐의 자유가 허용됐다. 그래 봤자 유치장 철창을 통해 잠시 대화를 나누는 정도였다. 강금순 차례가 왔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말에 "금순아! 으쩔끄나. 내가 꼭 살아야 할 낀디, 내가 살아야 니들이 고생을 안 할 낀데"라며 아버지 강부천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강금순은 평소 과묵한 모습만 보였던 아버지가 '저럴 수도 있구나'라고 생각하고는 아버지를 따라 울기만 했다. 다음날 아침 송지지서에서는 소란이 일어났다. 지서에 있던 보도연맹원 수십여 명이 온데간데 없어졌기 때문이다. "울 남편 어디로 갔습니까?"라는 아낙네들의 말에도 경찰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어린 강금순은 경찰에게 항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집으로 와 할머니 박삼월에게 이야기하자 그 말을 들은 박삼월은 맨발로 지서까지 뛰어갔다. "내 아들 어데로 데리고 갔노?" "뭐야 이 늙은이가! 없다면 없는 줄 알지 웬 행패를 부리고 XX이여." "야 이놈들아, 내 자식 내놔라." 30여 분을 시달린 경찰들은 박삼월에게 두손 두발 들었다. 그리고 "자, 보시오"라며 유치장 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1950년 7월 15일의 일이었다.

석삼(三)자 쓰인 고무신
 
어란진 항구 당시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실었던 곳
 한국전쟁 당시 진도 갈매기섬에서 학살당한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실었던 곳.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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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부터 박삼월과 손자 강성칠(당시 10세)은 해남군 송지면 어란진 곳곳을 다니며 강부천을 찾았다. 해남 보도연맹원들이 어란으로 이송되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아들이 없어진 후부터 박삼월은 식음을 전폐했고, 밤에 잠도 한숨 못 잤다. 며칠 동안을 다닌 끝에 실낱같은 단서를 찾았다.

박삼월의 집안 손주뻘인 김공배가 "아저씨가 며칠 전에 줄에 묶여 범선에 태워졌어요. 밤 12가 넘었을 때인데, 동네 사람들 10여 명이 동원되어 보도연맹원들을 배에 실었당께요"라고 했다. 

하지만 배에 실린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음 미로를 찾는 데는 10여 일이 걸렸다. 어란진으로 끌려간 지 보름 만이었다. "진도 갈매기섬에 시체가 잔뜩혀요." 어란진에서 어장 일을 하는 송지면 마봉리 신흥마을 사람 추병선의 말이었다. 바닷일을 하던 그는 갈매기섬에 흰 옷이 바위를 뒤덮고 그 위에 버섯구름 모양으로 파리떼가 있는 것을 보았다.

추병선의 말을 들은 송지면 마봉리 다섯 가족은 쌀 한 가마니씩 추렴해 1950년 7월 31일 밤 갈매기섬을 향해 출항했다. 갈매기섬에 도착하니 다음 날 새벽이 되었다. 갈매기섬에서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당한 1950년 7월 16일부터 보름이 지난 때였다.
 
 증언자 강성칠
 증언자 강성칠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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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강성칠과 갈매기섬에 온 박삼월은 아들 강부천의 시신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당시 강부천이 신고 있던 석 삼(三)자가 쓰인 고무신을 쉽게 발견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머지 사람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이었다.

몇 시간에 걸쳐 시체 더미를 세 번 헤집었는데, 결국 한 명의 시신은 찾지 못했다. 파김치가 된 마봉리 사람들이 귀항을 준비할 때 웬 '귀신'이 나타났다. "악" 하며 사람들은 기겁했다. 하지만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갈매기섬의 아수라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난 송지면 어란리 내장마을 사람이었다.

그는 보름간 빗물과 굴로 목숨을 유지했다. 그에 따르면 1차 사살 시에는 절반 가량의 사람들이 생존했는데 다시 경찰이 와 기름을 붓고 불을 질러 3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갈매기섬에서 죽었다. 그는 겁에 질려 자기 이름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는 마봉리 사람들의 귀항선에 몸을 실었다.(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유해발굴 보고서』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 감사장 받은 사람도 처형

'귀하는 금반(이번에) 실시되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위한 역사적 총선거의 추진완수에 열렬한 애국심을 발휘하여 절대한 공헌을 하였기에 충심으로 감사의 의(뜻)를 표함'

1948년 5월, 국회선거위원회 위원장 노진설 명의의 감사장이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강부천에게 수여되었다. 강부천은 초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해남군 갑선거구 선거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그는 특정 정당의 지지자라기 보다는 중립적인 입장의 지역 유지였다. 그런 그도 1949년도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돼 한국전쟁 직후 갈매기섬에서 학살됐다. 당시에 '중립'은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강부천 집안은 한학에 조예가 깊은 지역 유지로 이름을 날렸다. 강부천의 아버지 강경희(1888년생)는 1919년 4월 16일 해남장터에서 열린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강경희는 서당 훈장으로 송지면 마봉리의 박천홍(1892년생)과 함께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당시 검거를 면했기에 그의 독립운동이 기록으로 남겨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만세운동에 참여한 같은 마을 박천홍의 증언으로 강경희의 활동상이 밝혀졌다.
 
 강부천의 이버지 강경희의 만세운동 관련 기사
 강부천의 이버지 강경희의 만세운동 관련 기사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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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일제의 미움을 산 박천홍은 딸이 정신대에 끌려가는 아픔을 겪었으며, 큰아들은 해방공간에서 실종되었고, 둘째 아들은 인공시절 송지면사무소(송지면 인민위원회)에 근무했다는 이유로 수복 후에 경찰에게 총살됐다.

강경희의 아들 강부천도 1946년 추수 봉기 때 참여했다는 이유로 갈매기섬에서 학살당했다. 송지면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의 자제들이 한국전쟁기 국가폭력의 희생양이 되었다.(<해남우리신문> 2010년 3월 8일자 기사)

인공 시절 두 사람의 다른 행동

"느그 부모들은 소 안 키우냐? 무고한 사람들 소를 잡아 술판을 벌이냐!"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인민위원장 강상표가 인민군들한테 겁 없이 항의했다. 인민군은 인공(인민공화국) 초창기에 마봉리 신흥마을에서 소를 끌고 가 송호리 송종마을 해변가에서 술판을 벌였다. 당시 소는 시골에서 재산 목록 1호였다. 그러니 소를 빼앗긴 주민이 강상표에게 억울함을 호소했고, 강상표도 겁도 없이 인민군에게 항의했다. 목숨을 건 행위였지만 정당한 문제제기였기에 인민군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또 강상표는 인공 때 마봉리에서 우익인사 학살을 막아냈다. 그 결과, 마봉리에서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학살은 전혀 없었다. 경찰이 수복하면서 마봉리 부역 혐의자 2명이 학살되었는데, 이는 다른 마을에 비하면 현격히 적은 수였다.

수복 후 경찰이 부역 혐의자들을 검거했을 때, 강상표는 마봉리 인민위원장이었다는 이유로 연행, 송지면 산정지서 유치장에 구금됐다. 송종리 사람들은 소매를 걷어부치고 강상표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그이는 절대 죽일 사람이 아니어라." 송종마을 사람들의 겁 없는(?) 구명운동이었다. 그들은 강상표의 의로운 행위를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북한군 점령 시절, 해남군 송지면 면소재지에서는 지방 좌익이 자신들의 동지를 때려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름 아닌 송지면 노화도 출신인 김민재였는데, 그는 인공 시절 초기에 우익인사 여러 명을 학살했다. 보다 못한 동료들이 그를 죽였는데 지방 좌익들 역시 목숨을 경시하고 민간인을 학살하는 김민재를 놔둘 수 없었던 것이다.

'인권'이란 단어는 사치에 불과

하지만 송지면 마봉리 인민위원장 강상표와 면소재지 지방좌익들의 노력은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1950년 10월경 경찰은 송지면 산정지서를 수복하고 주민들을 산정국민학교에 모이게 했다. 경찰은 인공 시절 부역 혐의자들에게 자수를 종용해, 그렇게 자수한 이들을 지서 옆 창고 5곳에 구금했다. 이들 400여 명은 나중에 산정리 산진목, 어불도 앞바다, 치소리 쑥고개 등지에서 집단 살해됐다.

"지서에서 가까운 산진목에서 많이 죽였다. 경찰은 총알이 아깝다고 사람들을 어란리 앞바다로 끌고 가 수장시켰다."(강성칠, 80세, 전남 해남군 송지면 마봉리 신흥마을) 한 개 면에서 부역혐의자 400여 명이 학살된 것은 엄청난 규모였다. 그러다 보니 피해를 입지 않은 마을이 없을 정도였다. 

송지면 산정리 석수마을은 면소재지에서 가까워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부분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 인공 시절 인민위원회에 가담했다. '토지개혁'과 '공동분배'라는 인민군의 주장에 쉽게 공감한 것이다. 수복 후 여타의 집성촌과 달리 유대감이 약했던 석수마을은 서로를 부역 혐의로 밀고해, 15~22명의 피해자가 발생했다.

송호리 갈두마을 주민 6명도 부역 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산정리 창고에 구금되었다가, 1950년 11월 12일 송지면 어란리 어불도 앞바다에서 수장됐다.

군곡리 방처마을은 송지면에서 피해가 가장 컸다. 수복 후 주민 50여 명이 부역 혐의로 산정창고에 구금되었는데, 이 중 40명이 학살되었다. 앞서 인공 때 지방좌익이 일제강점기에 부면장을 했던 김○○의 모친을 죽였는데 이에 대한 보복 학살로 40여명이 죽음을 당했다. (진실화해위원회, 2008년 상반기 보고서』)

북한군 점령 시절 북한군과 지방좌익에 의해 우익인사나 그 가족들이 학살되었다면, 법적 심판을 통해 처벌을 하면 된다. 하지만 실제로는 경찰에 의해 400여 명이 불법적으로 즉결 처형되었다.

송지면은 해남군 전체 상황과 유사하다. 일제강점기에 농민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을 꿈꾸었던 젊은이들이 해방 후인 1946년 11월 11일 '추수 봉기'에 참여했고, 이들은 '빨갱이'가 돼 전쟁 와중에 갈매기섬에서 집단학살되었다. 또 수복 후에는 '부역혐의'로 2차 학살이 진행되었다. 그 와중에 '인권'은 사치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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