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02 18:41최종 업데이트 20.11.02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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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두 아들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자 하는 고집불통 아버지의 길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아버지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기에 분명 자식으로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아버지 뜻을 이해했으니까 절대로 포기하면 안 돼!"
"그려 걱정들 마라,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저번에 피 쏟고 호흡곤란으로 쓰러졌을 때 이미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던 겨. 죽음을 각오하고 나니까 그 어느 때보다 의지가 강해졌고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고 있다. 걱정 마라. 수술을 권하는 사람들은 내가 삶을 포기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건 그들의 생각이고 생활방식일 뿐이다. 의사의 방식이 있듯이 내게도 살아온 방식이 있잖어. 평생 걸어왔던 그 길로 가겠다는 거지, 삶을 포기하겠다는 게 아니다."

  

두 아들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고자 하는 고집불통 아버지의 길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 송성영

 
그렇게 두 아들과 죽음을 껴안고 신파극의 주인공들처럼 울컥거리다가 끝내 마음을 합쳤습니다. 두 녀석 모두 아버지를 믿기로 했습니다. 수술 얘기를 꺼내 아버지를 혼란스럽게 하지 않기로 약속했습니다. 두 아들과 굳건한 언약을 했지만 그렇다고 어떤 특별한 방안도 대책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내일 당장 쓰러진다 해도 지금 이 순간 불행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몸을 건강하게 다스리는 양생법에 평소 관심이 없었기에 무엇을 먹어야 위암에 좋은지 구체적인 대안도 없습니다. 다만 마음을 다스리는 명상, 몸을 다스리는 기혈운동과 더불어 인터넷 정보와 책을 통해 알게 된 이런저런 발암물질을 멀리하고 항암식품 위주로 식탁을 마련한다는 막연한 생각뿐이었습니다.

남쪽의 귀인으로부터 온 메시지

그럼에도 수술 거부 결정에 대해 많은 분이 SNS를 통해 유익한 정보와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중에 특히 눈길을 끄는 메시지 한 통이 있었습니다. 다른 분들처럼 단식을 비롯해 어떠어떠한 대체요법이 좋다거나 위암에는 어떤 식품이 좋다 라는 언급조차 없이 자신의 전화번호를 남겨 놓고 '도움을 줄 수 있으니 전화를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만난 상처투성이 조랑말을, 그 방울 소리를 가끔 생각합니다. SNS를 통해 선생님 글을 읽고 있는 이순화라고 합니다. 많은 관심이 넘치는 상황이겠지만 저도 잠시 거들고 싶습니다. 연락 주세요. 지금 상황에 도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그분의 메시지 중에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에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그 조랑말은 내가 오래전 인도 네팔을 다녀와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글에 등장하는 조랑말이었습니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수년이 지난 그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이 눈앞으로 생생하게 다가왔습니다.

[관련기사] 등짐지고 산길 오른 조랑말들 "수고했어, 오늘도" 2016.07.01 (http://omn.kr/kc7w)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턱밑에서 고통스럽게 짐을 실어 나르던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은 이혼을 앞두고 인도 네팔을 떠돌다 만난 조랑말이었습니다. 그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은 무릎 인대가 나간 상태로 생사를 걸고 히말라야 기슭을 떠돌아다니던 처참한 내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생로병사의 '고통'이라는 무거운 등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인간들의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무거운 등짐을 지고 히말라야 산악지대를 오르내리는 조랑말들. ⓒ 송성영

 
당시 나는 이혼과 함께 몰아닥친 분노라는 고통을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 혹독한 고행길에서 정신적 자유를 얻었지만, 몸으로 암이라는 죽음의 사신이 찾아왔기에 그 '상처 입은 조랑말'은 여전히 내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암 수술을 거부한 것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등짐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울 소리를 내야 하는 그 상처 입은 '조랑말의 운명'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기도 합니다.

누군가 내 글을 읽어주고 기억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인데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생면부지의 분이 도움을 주겠다니, 가슴이 쿵쿵 뛰었습니다. 대체 어떤 분일까. 어떤 도움을 주겠다는 것인지, 그 도움이 어떤 것이든지 믿음이 갔습니다.

'제 삶을 마주할 때 혼란스러울 때 한눈에 다 담을 수 없는 산에게 끝없는 바다에게 힘없고 가여운 이름도 없는 생명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처럼 살면 되더라고요. 몸의 일부라며 암도 미워하지 않는 선생님의 마음에 안 하던 짓 타인의 삶에 조금 다가가는 짓을 무례하게 해봅니다.'

도움을 주면서도 무례를 범하고 있다는 그분의 겸손에 머리 숙여 전화를 걸었습니다. 이순화 선생은 부산에서 형부와 함께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였습니다. 자신의 형부가 조제하는 한약을 내가 원한다면 보내 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주저주저하자 가난한 내 형편 잘 알고 있으니 약값 걱정말라며 상처 입은 조랑말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답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형부라는 분, 박상도 선생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한의와 양의 모두를 공부했다는 박 선생은 내가 평소 생각하는 대체요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자신의 한약이 암을 낫게 한다는 허황한 언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희귀암을 앓고 있는 어머니가 자신이 조제한 한약으로 수술이나 항암제 없이 5년째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다며 그 한약이 내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그가 암을 완치할 수 있는 한약이라고 했다면 거부했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암 전문의들도 입을 모아 말하고 있듯이 아직 암은 불치병입니다. 하여 수술이든 신약이든 그 어떤 항암제로든, 모든 암을 완벽하게 치유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약으로 암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먼저 몸속의 독소를 빼내는 처방을 제시했습니다. 심장을 튼튼하게 하고, 평생 달고 살았던 축농증 때문에 원활치 못한 호흡으로 약해진 폐를 활성화시키는 등,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몸 바꾸기 치유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했습니다.
  

내가 주저주저하자 가난한 내 형편 잘 알고 있으니 약값 걱정말라며 상처 입은 조랑말 글을 읽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보답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 송성영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이 구원군을 데리고 오다

이 선생과 박 선생은 내 목숨을 노리는 암세포라는 대군을 만나 이렇다 할 대책 없이 사생결단으로 배수진을 치고 있을 때 난데없이 찾아온 구원군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상처투성이의 조랑말'이 구원군을 데리고 온 것이나 다름없지요. 나의 몸 상태를 수시로 기록하고 있는 모바일 메모장에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었습니다.

'한약을 보냈다 한다. 인드라망처럼 촘촘하게 엮인 인연 따라간다. 고맙고 고마운 인연, 그 고마운 마음으로 무소의 뿔처럼 가자. 두려움 없이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가자.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게 내 운명이다. 나의 수행이다.' -2018. 겨울-

박 선생의 한약을 복용하기 시작할 무렵 주변 사람들이 걱정했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고, 거기다가 어떤 성분이 들어 있는지 알지 못하는 한약을 복용할 수 있냐. 자신의 한약 처방을 암 환자인 나를 대상으로 임상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분들을 무조건 믿었습니다. 믿음은 약효를 증가시킬 것입니다. 진맥도 없이 모바일을 통해 주고받은 인연이 전부였지만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박 선생의 한약 처방을 철저하게 믿었습니다. 그에 대한 믿음은 나 자신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습니다. 하여 두 아들에게 다짐을 놓기도 했습니다.

"한약이 몸에 맞지 않아 만에 하나 잘못된다 해도 한약 처방이 아닌 내 몸과 마음 관리가 잘못된 것이니 그 누구도 원망하지 말아라. 그 어떤 일이 발생해도 그분들의 자비심을 깊이 새겨라."

박 선생이 처방한 한약을 보다 효과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병원에서 퇴원하자마자 시작한 단전호흡과 기혈운동 식이요법 등을 좀 더 심도 있게 병행했습니다. 한약 덕분에 좀 더 깊은 호흡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독소가 빠져나오는 현상 중 하나로 체중은 6개월 만에 10킬로그램이 빠져나갔습니다. 줄어든 체중만큼 몸은 가벼워졌고 지게질을 거뜬하게 할 정도로 기력은 여전했습니다.

물론 한약을 복용하는 도중에 '이제 죽는구나' 할 정도로 힘든 통증이 두서너 차례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견디기 힘들었던 통증은 몸이 좋아지는 명현 현상으로 여겨집니다(한의학에서 말하는 명현 현상 瞑眩現象은 장기간에 걸쳐 나빠진 건강이 호전되면서 나타나는 일시적 반응. 근본적인 치료가 이루어지는 징후로 이 반응이 강할수록 치료 효과가 높아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 삼부자를 살갑게 반긴 그분들 말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했습니다. 암을 극복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건강을 되찾아 그분들에게 받은 자비를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었습니다. ⓒ 송성영

 
암 판정 24개월... 나는 안 죽었다

2020년 11월 현재 암 판정을 받은 지 24개월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암 판정 이후 그동안 단 한 번도 시티 촬영이나 내시경 검사를 해 본 적이 없기에 암세포의 세력 확장이 멈췄는지 줄어들었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암 산업의 통계에 의하면 수술을 거부한 나는 이미 죽어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몇 차례 목숨을 위협하는 암세포의 반란이 있었지만 현재 멀쩡한 상태로 글을 쓰고 있듯이 일상생활에 큰 지장 없이 나름 건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언제 갑자기 쓰러져 저세상으로 가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요.

암 산업 통계와 달리 아직 살아 있는 것은 1년 넘게 복용한 박 선생의 한약이 큰 힘이 됐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을 단지 한약 한 가지의 효력만으로 얘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기혈운동과 명상 식이요법이 한약의 효과를 극대화시켰을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느 한 가지 처방으로 암세포의 세력을 멈추게 하거나 줄어들게 한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즐겨 먹고 있는 곡식 과일 채소 약초 등의 먹거리와 물심양면 도움을 준 수많은 사람의 자비로운 손길.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건강한 숲을 이루듯이 대자연에 깃들여 사는 인연들, 나와 좋은 인연을 맺은 그 하나하나의 기운들이 아직까지 나를 생존케 하고 있다 믿고 있습니다. 다만 그 기운의 정도가 다를 뿐이겠지요.

몸의 자생력을 기르기 위해 지금은 한약을 끊었지만 그동안 그 귀한 한약을 돈 한 푼 내지 않고 넙죽넙죽 받을 때마다 갚을 방도가 없어 마음 한쪽 편이 늘 무거웠습니다. 만에 하나 얼굴 마주 보고 고맙다는 인사말조차 건네지 못한 상태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면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위궤양 현상과 유사한 속 쓰림이 잦아 장거리 여행길에 제동을 걸었고 속 쓰림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코로나19가 주저앉혔습니다. 코로나가 안정세를 보이기 시작할 무렵인 지난여름, 나의 은인은 내 자식들의 은인이나 다름없기에 두 아들을 앞장세워 이 선생과 박 선생이 운영하는 부산의 영도구에 자리한 약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분들과의 인연을 맺은 지 1년 7개월 만이었습니다.

"구태여 찾아오지 않아도 됐는데 멀리서 힘든 걸음 하셨네요. 우리는 송 선생님이 건강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박상도 선생은 자신의 한약으로 암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보다는 먼저 몸속의 독소를 빼내는 처방을 제시했습니다. ⓒ 송성영

 
우리 삼부자를 살갑게 반긴 그분들 말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했습니다. 암을 극복해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건강을 되찾아 그분들에게 받은 자비를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었습니다. 지금 '암과 함께 살아가기'를 쓰고 있는 이유 또한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는 일이라 믿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되돌려 주는 것, 이 또한 나의 자연치유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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